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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내 마음에 있도다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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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가 내 마음에 있도다 
본문 : 빌립보서 1:3~11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가르치다 은퇴하신 피터 드러커 교수는 경영, 미래, 조직, 리더십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 분이 책을 쓰기만하면 즉시 번역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분이다. 그 분은 1909년 생이니 현재 94세이시다. 지금도 맹렬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Next Society, 21세기 리더의 선택 등 유명한 책이 많다. 책 중에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그의 책이 다시 번역돼 우리 사회에 소개가 됐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7가지의 인생 지침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인생의 목표와 비전을 가진자. 둘째부터 여섯째까지는 모두 설명할 수 없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산다.

첫 번재 중요한 지침이 삶의 방향이라면 마지막의 중요한 요소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을 마음에 담고서 살라는 가르침이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이다. 최고의 치과 의사를 만나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니 “나는 내가 치료한 환자들이 죽어서 병원 안치대 위에 누웠을 때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정말 최고의 치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군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억되리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서 환자를 돌본다면 이 사람은 당연히 최고의 의사가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만일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드러커 교수가 13세 때에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종교과목을 배웠는데 그 선생님이 어느날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들은 죽은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물론 아무도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잠시 있다가 선생님이 껄걸 웃으시면서 “나는 너희들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50세가 될 때까지도 여전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봐야 할 거야.” 세월이 지난 후에 선생님 밑에서 배운 학생들이 나이 80이 되어 다시 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13살 때에 선생님의 질문을 서로 이야기 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지금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뭔가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족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옆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주의 종의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교회의 역사에 두고 두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로 인하여 마음에 큰 위로를 얻는다. 큰 기쁨을 얻는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라.”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너희가 내 마음에 있도다”라고 고백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울의 마음에는 빌립보 교인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우리의 삶을 정말로 보람있게 살려면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검사를 받게 되었다. 검사를 받고 병실에 누워 있는데,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고 한다.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병명은 암이고, 몇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집사님은 무척 놀랐지만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집사님은 자기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유서까지 써놓았다. 그런데 병원에서 암을 선고한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집사님의 몸이 멀쩡한 것이었다. 너무나 이상해 다른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암 진단이 오진이었다. 얼마나 황당한가? 주변 사람들은 그가 병원의 오진을 모르고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린 것에 대해 아까워하며 집사님의 심정을 물었다. 그러나 집사님은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다. "6개월 동안의 시한부 인생이 저의 삶 전체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보람있게 살았던 순간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아마도 죽음을 앞에 둔 집사님은 내가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해 줄까?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가 친구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좋고, 가족에게 기억되는 것도 좋고, 이웃에게 기억되는 것도 좋지만 주의 종의 마음에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교회의 역사에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주의 종은 예쁜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을 기억한다. 주의 종과 교회의 역사에 기억되는 사람은 즉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이 아닌가?

말씀을 준비하며 감독님이 쓰신 “한 우물만 팠더니 물이 나오더라”는 책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36페이지와 37페이지에 보면 감독님의 목회 중에 기억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한 분은 여경옥 권사님이다. 1963년 구로제일교회에 계실 때에 공동묘지 옆에 흙벽돌로 세워진 10평 남짓한 초라한 교회이었다. 동네에 불량배들이 이따금 교회를 괴롭혔다. 밤이면 위협을 느낄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 때에 여경옥 권사님은 고령의 연세에 새벽 두세시가 되면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이 찬송을 부르면서 교회 주변을 돌고 계셨다. 나도 아직 권사님의 찬송소리의 메아리가 내 마음에 기억된다. 감독님의 마음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권사님이시다.

바로 뒷 페이지에는 63년 추수감사절에 일어난 기억이다. 가난에 지친 성도들이 어느 권사가 바친 쌀 두가마를 강단 위에 올려 놓고 기뻐하고 있었다. 교인들이 감사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깥에서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더니 교회의 문히 확 열린다. 여자 권사의 남편이 들어서서 “도적같은, 쌀을 바친 것도 도적이요, 쌀을 받은 목사도 도적” 소리치며 쌀 가마를 실어갔다고 한다. “이튿날 추수감사절, 강단 위에 쌀가마는 없어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감사는 있었다.” 다행히 이 남편은 몇 년이 지난 후에 찾아와서 무릎 꿇고 회개했다고 한다.

주의 종의 마음에 어떤 사람은 좋은 기억으로 남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데 사랑하는 성도여! 마지막 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우리가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교회의 역사는 기억한다. 주의 종은 기억한다. 복음의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고대신화와 복음서가 다른 점이 있다. 고대신화는 믿거나 말거나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복음은 과거의 일어난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현장에 그 복음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일본은 잡신의 왕국이다. 어디를 가나 다양한 신당이 있다. 나무도 신이요 바위도 신이요 왕도 신이요 죽은들도 다 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미우라 아야꼬는 성경을 읽는 동안 복음서에 나온 말씀들이 과거의 역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현장에 그대로 이루어짐을 깨달았다. 그녀는 13년 동안 폐결핵으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 요양했던 사람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폐결핵은 죄가 많은 사람들에게 천벌로 내리는 병이래요.” “오만한 사람은 왼쪽 폐가 나빠지고 색정에 빠진 사람은 오른쪽 폐가 상한데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우라 아야꼬는 절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때에 요한복음을 읽는다. 앞을 못보는 저 사람이 누구의 죄 값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쓰시기 위함이라.” 스스로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던 미우라 아야꼬가 복음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한다. 그리고 복음의 참여자가 된다. 복음의 일꾼이 된다. 많은 책을 통해서 많은 감동을 주었다.

복음은 과거의 사건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지금 나에게 역사하신다.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주변에 믿음의 식구들이 기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베다니에 들르셨다. 그곳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와 옥합을 깨뜨린다. 가룟유다가 왜 그렇게 낭비하느냐고 화를 낸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가만히 놔두어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을 기억하리라.”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자는 분명히 기억된다.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자, 주의 일에 참여하는 자, 교회의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교회는 기억한다. 주의 종은 기억한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 보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복음에 참여하는 일은 끝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성도들 중에 이정도면 되었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나님의 일은 끝이 없다. 특히 연말이 되면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 이제부터는 쉬어보자. 이러한 생각은 이미 나에게 영적인 병이 들고 있는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봉사하는 방법과 봉사하는 부서는 달라질 수 있어도 일하는 것은 쉴 수가 없다.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들이 계신다. 원로장로님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제 물러나셨다. 내년부터는 스스로 대표기도도 사양하셨다. 원로장로님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물러나셨다고 일하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니다. 일하는 자리와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원로장로님들이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도하고 내려 오시고 얼마나 은혜스럽고 좋은가?

복음에 참여하는 일은 끝이 있을 수 없다. 평생 교회와 주의 종을 잘 섬기다 가신 박남숙 장로님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마지막 까지 복음의 일에 참여하다가 가셨다. 기억에 남는 분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주의 종의 마음에, 교회의 역사에 “너희가 내 마음에 있도다” 이렇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나님 만나는일,

하고 싶은일 다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줍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거리에서도 삼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일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일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일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일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일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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