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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 (시 5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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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시50:22-23


  현대를 대변하는 중요한 말 가운데 ‘생각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오래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빌게이츠가 사용한 이 말에서 보는 것처럼 앞으로의 세계는 생각의 속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속도가 현대를 대변하는 말이라면, 현대를 특정 짓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생각의 상실’입니다. 생각이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현대는 점점 생각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싫어하는 분위기가 ‘썰렁’인 것을 아십니까? 뭔가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아예 싫어하는 것이 요즘 세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기피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거룩하고 엄숙한데, 바로 그런 딱딱하고 심각한 분위기를 못 견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예배도 복잡하면 오지 않습니다. 예배가 심각하면 딴전 피고, 딴 생각하고, 집중을 하지 않습니다. 설교도 내면을 돌아보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한바탕 웃는 분위기로 가야 먹힌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상실, 이것이 무섭게 우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 점점 나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향한 사탄의 작전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생각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아무 깨달음이나 생각 없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만이 생각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에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 순간부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가 사용한 말입니다. 물론 그의 말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적잖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의 말 자체는 새겨야 합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생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역시 프랑스의 사상가인 파스칼이 ‘팡세’ 라는 작품에서 인간을 비유하여 일컬은 말입니다. 인간은 광대한 자연 가운데 '갈대'와 같이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는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하는 존재, 생각하는 갈대, 바로 이것이 인간이기에 성경은 끊임없이 ‘생각’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빌립보서 4장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것들을 생각하라,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가르침이요, 믿음과 삶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를 생각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두 다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묵상으로 진행되고, 결국 사색으로 마치는 것을 봅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은 다 이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늘 기도하며 사는 우리이기에 기도에 관심이 많습니다. 도대체 기도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장에 한나의 고백 속에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한나가 마음이 아플 때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한나는 하나님께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의 응답은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나왔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중요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오늘도 우리는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또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이날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려왔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예배인데 여러분은 예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이 전달되는 시간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나라와 열방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어려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고통을 받고 계시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련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 믿고 늘 복되고 형통한 삶이 이어져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도 답답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나운서도 자기들이 어쩔 수 없이 전하는 뉴스에 미안하고 송구스럽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정치가 어렵고,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이런 때 마음이라고 고와야 하는데, 사람들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요즘 먹는 음식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참 비극적인 일이요, 힘든 세상이요,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우리 삶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이런 고난의 때를 극복하는 승리의 길이 어디에 있을까요? 전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이 어려움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고한 때에 생각하지 않아 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곤고한 날이 지속될 때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곤고한 날의 사색, 이것이 승리와 성공의 비결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생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동일한 관점에서 우리는 ‘감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1월은 교회적으로 감사의 달입니다. 특히 셋째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감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중요한 시점입니다. 감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감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감사가 주제이고, 감사를 위해 필요한 우리의 ‘생각’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잊으면 결코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찢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하여 감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축복과 은혜와 선물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생각의 밀접한 관계를 본문은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메이 플라워 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어려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인디안들의 방해가 있었고, 자연과 기후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여와 곡절 끝에 그들은 이듬해 농사에서 얻은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감사주일은 1864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11월 넷째 주간으로 확장되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한번 변경된 이후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의 유래입니다. 추수감사는 분명 청교도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들이 가졌던 신앙에 있어서 형태만 배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한마디로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새긴 감사신앙의 슬로건입니다. 지금도 영국의 교회에 가면 크게 써 붙여 놓은 글귀입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 이것이 청교도의 감사신앙이었습니다.

  영어의 ‘생각’과 ‘감사’는 단어 하나 차이입니다. 감사를 ‘thank' 라고 하고, 생각을 ’think'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a'와 ’i'의 차이 뿐입니다. 감사의 기원이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사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강조한다고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깊은 생각에서부터 감사는 터지고, 표출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생각과 연관시키는 것은, 인간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그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점점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삽니다. 자꾸 잊어버리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분명 우리가 살면서 잊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잊을 것을 기억하면 본인도 힘들도 다른 사람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사색하고, 기억하고, 묵상하고, 깨달을 때, 우리는 온 몸과 정성을 다해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고 인격이 삶을 낳는다” 참 귀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한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고,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 사람의 인격을 만듭니다. 바로 그 인격이 삶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의 처음과 끝만 한번 연결해 보십시오. 생각이 삶을 낳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어떤 삶을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생각한대로 다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계절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해의 끝을 감사의 절정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생각하십시오.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생각이 우리의 인격과 삶을 형성합니다. 생각이 우리 삶과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제 생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예배드리고, 생각하면서 어려움도 극복하고, 그리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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