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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오시나? / 미 5:2-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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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시나? / 미가 5:2-5a 


# 1

우리 인간은 기다림 속에 태어나, 기다림 속에 살다가, 기다림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부모의 기다림 속에 태어납니다. 또한 인생은 기다림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아침에 헤어진 가족, 저녁에 만날 것을 기다리며 하루를 지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길고 짧은 이별들 속에 이러저러한 기다림을 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란 단어는 그 기다림이 완성될 때까지 늘 우리 가슴에 크고 작은 파고를 일으킵니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이 말은 기다림이 사라진 인생, 그 마음이 죽은 인생, 꼭 마네킹 같은 인생이란 뜻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무엇도 기다릴 것이 없는 인생, 살았으나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릴 대상이 있음은 은총이요, 기다릴 수 있는 마음 주심은 축복입니다. 혹시 요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까? 혹시 요즘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까? 결과와 상관없이 먼저 그 기다림 자체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슴 속 기다림은 그 자체로 은총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성도는 주 안에서 하늘 가족인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이번 주일에 만났던 주님과 하늘 가족이 그리워 일주일 내내 기다림 속에 다음 주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곧 성도입니다. 해서 담임목사는 여러분을 그렇게도 기다립니다. 해서 우리는 매 주일 교회를 나가면서 또 다음 주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을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마 외로워,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 말은 뒤집으면 내가 찾아갈 수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여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고, 또 누군가가 기다려주는 만남 그 자체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합니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 기다릴 대상이 있음은 은총이요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좀 기다린다고 짜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다림 때문에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림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이 나를 기다려 주신다는 점입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주님,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계셔, 나를 위해 간구하시며, 내가 저 천국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기다려주시는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행복 무엇과도 바꾸지 마시고, 이 행복 누구에게도 빼맛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2

오늘의 주인공 미가는 주전 8세기,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매불망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메시야입니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왜? 그 분이 오셔야만 그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천년이 넘도록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미가의 기다림은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기다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요, 천년을 기다렸다는 말은 그만큼 그 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분이 왜 오셔야 하는지를 저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 미가는 천년도 넘은 기다림의 의미를 오늘 다시 설명하는 것일까요? 천년이나 기다려온 그 분이 왜 오시어야 하는지를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다시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기다림이 잘못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니 정작 내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기다림의 내용과 대상이 변질될 것을 염려한 까닭입니다.

그랬습니다. 미가는 기다림을 예언으로 승화시켜 낸 인물이요, 그 예언 속에 그 분이 왜 오시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선포한 인물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서 우린 성탄의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비전을 가슴에 품고 우린 오늘도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 왜 오시나? 하는 질문의 빛에서 오늘 주신 말씀을 풀어 봅시다. 이를 통해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점검하고,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소명과 책임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1. 5:2 / (읽고) / 우리 주님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위해서 오십니다.

여기 베들레헴이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이란 단어 자체의 뜻은 떡집입니다. 거기 함께 나오는 <에브라다>라는 단어는 열매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둘을 합쳐 읽으면, 떡이 많은 집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은 먹을 것이 많은 풍요로운 떡집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아주 작고 초라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곳에서는 절대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멸시받고 조롱당하던 말 그래도 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작은 곳에서 우리 예수님이 나신다는 겁니다. 저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여기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오신다는 겁니다.

왜 그러신다는 것일까? 그것은 작다고 무시당하던 베들레헴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그 분이 예루살렘에서 나셨다면, 예루살렘 집중 현상은 더 심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오시나 마나 베들레헴은 영원히 소외당한 자들의 고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베들레헴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베들레헴에 오셨고, 그 분이 오심으로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 가장 위대한 고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예루살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선 작다는 이유만으로 괄시당합니다. 작기 때문에 내 몫의 떡마저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덩치 큰 녀석들이 작은 자의 떡까지 빼앗아갑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요지경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힘의 논리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우리 주님, 작은 자를 위해 베들레헴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 베들레헴에 오심으로 작다는 이유만으로 서러움 당하는 모든 이들을 품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아니 작아야 진정 클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며, 가장 낮은 자를 높이 들어주신다는 역설적 진리를 몸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혹시 내 사는 집이 작다고 느끼십니까? 혹시 나의 일터, 나의 기업이 작다고 느끼십니까? 혹시 나의 교회가 작다고 느끼십니까? 혹시 어쩌다 이렇게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났느냐고 한탄하십니까? 그 작다는 느낌이 나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까? 하여 더 큰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오, 작은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작다고 기죽을 일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자축하며 감사할 일입니다. 왜? 그 작은 곳에 우리 주님 오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오시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오시기만 하면, 작은 베들레헴이라 하더라도 위대한 고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주님과 함께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 동광 교회가 한국 교회의 ASEM 센터로 우뚝 서서 작지만 위대한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라면 비록 작은 나의 집이지만 위대한 일을 위임 맡은 행복한 떡집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비전을 품고 주님과 함께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십니다!

5;2 / (다시 읽기) / 거기 보니, 그 분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곧 우리의 왕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2절의 끝 대목을 보니, 그의 근본은 상고요 태초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메시야의 근본은 '옛날, 곧 영원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상고, 태초로부터 시작된 거룩한 탄생의 비전, 곧 우리를 다스릴 분에 대한 비전이요, 그 비전이 이루어져 오늘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스림을 받을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내 구주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나의 왕시이오, 나는 이제 그 분의 다스림 속에서 예수님만 섬기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심각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2003년 한 해, 나는 누구의 다스림 속에 살아왔습니까? 내 인생을 지배해 온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아오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오셨습니까? 성령의 권능이 나의 삶을 지배해 왔습니까?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인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아닌 것에 종노릇 하는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님 아닌 그 무엇의 다스림도 받지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분이 지금 다시 오십니다. 마음 열고 그 분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확실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한 말씀만 드립니다. 신앙적 자존심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영적 자존심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시시하게 세상 것에 얽매어 사탄과 마귀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오직 그 분의 다스림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다스림 속에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장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주님은 우리의 평강이 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5:5a / (읽기) / 여기서 주목할 것, 평강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평강을 주신다가 아닙니다. 평강이 되신다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모두의 평강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심각한 질문 앞에 섭니다. 저를 보십니다. 2003년 한 해 나는 누군가에게 평강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평강이 되는 인생입니까? 나는 내 가족들에게 평강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있어 당신이 평안합니까? 아니면 내가 있어 오히려 당신이 불안합니까?

우리 주님이 그리 하셨습니다. 작은 고을, 떡집 베들레헴에 오신 주님, 온 이스라엘의 평강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셨다 했습니다. 아하, 그 분 안에서 다스림과 평강이 만나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평강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다스림의 강령을 배우게 됩니다. 다스림, 곧 정치인데요, 그렇습니다. 다스림과 정치의 목적은 평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부모는 가정을 평강으로 다스리는 부모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도 가정을 평강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부모는 빵점짜리 부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 공동체를 평강으로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뒤집으면 평강을 이루지 못하는 지도자가 가장 형편없는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형편없는 지도자는 평강 대신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다스리려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작은 다스림의 상징으로 완장 하나 채워주면, 죽창 들고 온 동네를 휘젓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 정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평강이 깨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크고 작은 정치적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지도자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관계와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하실 것, 다스림의 강령은 평강이요, 다스림의 결과 역시 평강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평강으로 다스리는 그 곳에 천국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모든 평강이 충만한 천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강으로 천국 이루시기 바랍니다.>

# 3

자, 그러면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주님 따라 이 세상의 평강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며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1) 해산의 고통을 참아내야 합니다.

5장 3절을 보실까요?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남은 자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엔 남은 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강대국의 침공으로 민족 전체가 몰살당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우리 주님, 이스라엘 안에 남은 자가 있다 하신 것입니다. 죽지도 않았고,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은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위해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과 함께 새 역사를 펼쳐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하십니다. 그것은 해산하기까지 참는 일이라 하십니다. 외세를 물리치고 평강이 넘치는 새 하늘 새 땅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 평강이란 옥동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해산하기까지 참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보기 위해선 해산의 고통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해산을 위한 진통에는 그 어떤 진통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산모 스스로 그 산고를 참고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이 때 해산을 돕는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더 힘 줘! 안 돼! 힘을 주란 말이야! 맥을 놓으면 안 돼! 그렇지, 옳지, 이제 다 됐다. 조금만 더 참아! 힘을 내!”

새 생명은 해산의 고통을 넘어 태어나는 법, 그 진통을 참지 못하는 자,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강이 된다는 것, 이 땅을 평강으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평강을 맛보기 위해선 산고를 참아내야 합니다. 그 날을 위해 여기 남은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아, 이제 천국이야, 우리 주님 오시고 계셔, 이제 평강이야, 조금만 더 힘을 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금만 더 참고 견딥시다.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사회가 불안하다고 합니다. 문화가 타락했다고 합니다. 교육이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국제 정세까지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린 믿는 이들은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모두가 포기한 그 자리에서도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셔서 모든 문제 해결해 주시고 평강으로 다스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그 날을 기다리며 해산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 고통 넘어 평강의 신비를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5:4 / (읽기) 여호와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여 일어서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어서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5장 4절에 보니, 그 분도 오셔서 우뚝 서 소명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여호와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섰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일어서야 합니다. 여기 주저앉아 새 날을 기대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일어서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다리에 힘이 없는 자,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 주님의 능력과 그 이름에 의지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교만하여 주님 대신 자기 힘을 믿으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차라리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허세를 부립니다. 차라리 권세 있는 자의 이름을 믿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여 주님의 이름 대신 인간의 이름을 앞세우고, 힘이 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이름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 이름값으로 엄청난 돈을 가져다주었다가 나중에 들통이나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이름 대신, 권세 있는 세상 사람의 이름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직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할 때 크고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놀라운 승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5:4b / 먹여서 안연하고 창대하게 해야 합니다.

5장 4절의 뒷부분을 보실까요? 거기 세 개의 서술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먹여 주시고, 안연하게 거하게 해 주시고, 창대하게 해 주신다는 서술어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 주시는 말씀을 먹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안연하게, 곧 안전하게 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주시는 은혜를 먹기만 하면 마침내 창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나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린 안전합니다. 믿으십니까? 나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린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나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린 창대해 질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탄의 비전은 그 분을 영접하는 만민에게 복음이요 온 세상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여기서 성탄을 대망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소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주 안에서 서로를 열심히 먹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주 안에서 서로의 안전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크게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 안에서 모두가 창대해지시기 바랍니다. 하여 마침내 주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평강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탄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다림은 이천년을 견디어낸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분 오실 때의 감격과 기쁨은 더욱 크리라 믿습니다. 이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우리의 옷깃을 여밉시다. 작지만 아름다운 이 곳,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깨끗하게 청소하십시다. 그리고 어김없이 베들레헴에 오시는 주님을 마음 열어 영접하십시다. 우리 주님, 오셔서 먹여 주시고, 안연하게 해 주시며, 창대케 해 주시고, 마침내 서로가 서로에게 평강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성탄의 비전으로 우리 미리 인사 한번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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