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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영화를 거부하는 용기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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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히브리서 11장 24-26절
제 목 모세의 믿음 I - 세상의 영화를 거부하는 용기 

오늘 저희가 믿음을 배울 믿음의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여러분 잘 아시지요? 40년은 애굽의 왕궁에서 살고 40년은 광야에서 살고 그리고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지도자로서 그렇게 120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의 삶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24-28절>까지 묘사해 주는데, 저희는 둘로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의 영화를 떠날 때의 믿음<24-26절>까지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때의 믿음, 이렇게 둘로 구분하여 보겠습니다.

성경의 멧세지를 잘 깨닫는 방법 중의 하나가 "동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사는 사람의 행동의 특징을 묘사해주며 마음의 상태를 잘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세의 믿음을 나타내주는 세 구절에서도 동사에 주의하면 모세의 믿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동사가 무엇이 있습니까? "거절하고", "더 좋아하고(선택하고)", "여겼으니", "바라봄이라"
이렇게 동사를 추려 보니까 모세의 믿음의 정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요? 믿음은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은 거절하고 마땅히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믿음은 정작 귀중한 것을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의 정립이고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의 원리, 세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세상의 영화를 거부하고 하나님 편을 선택하는 결단력입니다. - "거절하고 선택하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거절한다는 것은 믿음의 방어적 표현이라면 더 좋아하여 선택한다는 것은 믿음의 능동적, 공격적 표현입니다. 마땅히 거절해야할 것을 거절하고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을 그래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 가져 보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는데 왜 히브리서에는 모세가 능동적으로 애굽의 영화를 거절하고 고난을 자처한 것으로 묘사했는지 모르겠다고 이런 의문들 갖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믿음은 충동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정적 행동을 낳는 순간적 계기는 있을지라도 믿음은 순간적 충동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 순간적으로 광야로 나아갔지만, 그 후로 그는 많은 날들을 생각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익숙치 않은 거친 광야의 환경을 대할 때마다, 왕궁에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았던 때가 그라고 왜 기억이 안났겠습니까?
그 기억이 날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적지 않은 세월동안 갈등과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이 척박한 광야의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 애굽으로 돌아간다면, 한번 무릎을 꿇지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 호탕하게 놀 수 있는 죄악의 쾌락, 그리고 애굽 궁전의 많은 보화, 소유들.. 소위 인간의 본성이 원하고 느끼는 세 가지, 명예와 즐거움과 소유가 다 보장됩니다.
그의 마음안의 갈등의 줄다리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죄악의 낙이냐 하나님의 가치냐,/ 몸뚱아리 편안한 것이냐, 양심의 떳떳함이냐,/ 세상의 명예냐,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이냐,/ 애굽의 모든 보화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냐../ 이 갈등이 광야에 거하는 모세의 마음에 거듭거듭 찾아왔을 것이고 그 때마다 모세는 무릎꿇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편에서 고난받는 것이 더 낫겠다는 선택을 반복하였을 것입니다.
세상 영화의 유혹이 어디 한번 찾아오고 맙니까? 수없이, 수없이 찾아옵니다. 모세의 마음에도 수도 없이 찾아오는 그 세상 영광의 유혹에 그가 굴복하여 애굽으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아무도 모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고 성경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세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육신이 정신을 노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 육신을 노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전자와 같은 사람을 "저희의 신은 배요.." 배때지가 신인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제가 배나온 사람 비난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빌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자라"
맛있는 것 먹는 것, 몸뚱아리 편한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람들, 맛있는 밥 한 끼 먹겠다고 2시간, 3시간씩 쫓아 다니는 이상한 양반들.. 배가 신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배가 신인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배신자라고 합니다. "배가 신인 놈", 다른 말로는 속물 내지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나는 배부른 도야지보다 고뇌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서양 철학가의 이 말이 가치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느낍니다.  여러분 언제 식사가 맛있습니까? 길거리에서 김밥과 라면을 사먹을지라도 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식사를 할 때에 제일 맛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가치있게, 잘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정신이 반듯한 사람입니다. 힘들어도 정도를 가는 사람들이고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고생스러워도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게 피흘려 죽으시는 고귀한 사랑의 은혜를 베푸심은 우리로 배신자의 모습에서 돌이켜서, 회개하고 이제는 정신이 반듯하여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참 가치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 거룩한 영을 부어주시는 뜻은, 우리 스스로는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가치의 삶, 참된 삶을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넉넉히 살아가도록, 영혼이 육신을 다스리는 내적 질서를 바로 잡아가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소망하십니까? 여전히 배신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모세처럼, 세상의 명예와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여 선택하는 당당한 믿음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지금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쾌락도 있어야 하고 가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저는 세상의 명예도 있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인정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꼭 그렇게 믿어야만 하나요? 세상에 예수 믿으면서 돈도 많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그런 사람 많잖아요? " 이렇게 말하고 싶으십니까?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재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모세처럼, 세상의 영화를 거절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추구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덤으로, 그 방편으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성결케 하여 하나님 한분 추구해 보십시오. 정직한 믿음으로 응답해 보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도리어 하나님의 깜짝 놀라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영화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가치를 무시하고 세상의 신기루를 좇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지랑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이 둘을 다 잡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살피라 그리하면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리라" 에미 카마이클의 권계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세상의 영화보다) 하나님의 것을 더 좋아하는 가치관의 정립입니다. - "여겼으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여겼다는 것은 간주했다는 것이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창피를 당하고 욕먹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왕자라는 명예와 왕궁의 보화라는 재물, 마음대로 즐기는 쾌락의 즐거움과 창피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욕을 먹는 능욕 중에 어느 것을 택할래? 했을 때, 능욕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모세가 가학주의자, 새디스트여서 능욕받기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의미상 엄밀하게 말하면, 능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뜻입니다.
누군들 능욕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기를 기꺼이 더 좋아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 그 자체의 가치가 너무나 큰 것임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당신의 인생의 운명에 대하여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내 영원의 운명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꾸어 놓으신 은혜의 주님이시라면, 그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은, 오늘 능욕을 받을지라도, 넉넉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까? 
모세가 거듭되는 세상의 영화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바른 가치관이 잘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죄악의 낙을 과소평가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세상의 영화에 목매어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권력이 있으면 얼마나 뿌듯한데요, 돈 많아봐요, 보통 편리한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실제를 모르고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도 죄악의 낙, 즐거움이라고 묘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들이 "잠시"임은 잊지 마십시오. 지나가는 것임을, 영원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매혹적으로 보이는 세상의 영화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은 잠잠히 생각하지 않으면 깨우쳐지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냥 마음이 원하는대로, 몸이 원하는대로, feel이 향하는대로 해서는 결코 터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도 거듭거듭 "그러므로 생각하라!" "생각건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강조합니다.
믿음의 자라간다는 것은 영적인 가치관이 강건하게 바로 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위 이성적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냥 떼쓰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특징도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행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것을 좋아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모세가 세상의 편리한, 뿌듯한 소유보다 능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가치있게 여겼다, 간주했다는 것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의 생각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믿음의 가치관을 반듯하게 세워가십시오. 제가 왜 성경공부를 그렇게 강조하겠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예배만 많이 드리면, 그냥 교회만 열심히 나오면 하나님이 복주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그 미신에 잡신이 응답하여 돈 벌게 해 주고 그럴지는 몰라도,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상급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하고 떳떳하게 하고 영원을 약속해 주는 하나님의 상급은 성경 말씀에 따라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고 믿음의 응답을 드리는 사람에게 베풀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을 더 좋아하는 가치관의 정립입니다.

셋째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상 주심을 기대하는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26절>
오늘 말씀은 모세가 세상의 명예와 쾌락과 소유 이 모든 것을 "다 필요없습니다" 거 부하고 고난을 받을지라도 능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왜 선택했는지 그 주요한 이유를 밝혀 주었습니다.
그 주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고서, 세상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믿음의 결행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보상, 하나님의 갚아주심,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상을 베푸십니까? 하나님의 상은 현재적인 것입니까? 미래적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포함하듯이, 하나님의 상급도 모두가 미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상급이 모두가 현세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도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상에 대하여, 흥미로운 이 말씀부터 풀어가 보겠습니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나님의 보상이 재물일 수도 있고 영광일 수도 있고 생명, 장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부자들 중에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부자되게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자가 다 하나님의 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상이 모든 사람에게 꼭 재물과 영광과 생명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간사한 속내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 자신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치우치기 잘하는 속물적 존재임을 하나님께서도 잘 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오기쟁이라 그래서 내가 더 안 준다 이런 분이 아니라, 이간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는 재물의 다소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기에, 거듭거듭 깨우쳐 주십니다.
"재물이 늘어날지라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시62:10>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23:4>
오히려 보편적으로 현재에 임하는 하나님의 상급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아세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상급을,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아세요?
<벧후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신 자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생명은 살맛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삶의 현실을 사람들이 죽을 맛이라고 하지요? 이 생명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합니다.
경건은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보람되게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에게는 경건, 바르게 사는 능력이 있어야 떳떳하게, 가치있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급으로서 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현세에 임하는 하나님의 상급, 다르게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일본의 크리스챤인 우찌무라 간조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 잠은 살 수 없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다
아름다운 옷은 살 수 있어도 아름다움은 살 수 없다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다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다
쾌락은 살 수 있지만 평안은 살 수 없다
사치품은 살 수 있어도 문화는 살 수 없다
오락은 살 수 있지만 기쁨은 살 수 없다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는 살 수 없다
교회건물은 살 수 있지만 천국은 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선적인 상급은  단잠, 입맛, 아름다움, 가정, 건강, 평안, 문화, 기쁨..이런 것들입니다. 아니 이런 것들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좋은 침대입니까? 단잠입니까?
비싸고 희귀한 음식입니까? 입맛입니까?
유명 메이커 옷입니까? 아름다움입니까?
대궐같은 집입니까? 화목한 가정입니까?
오락입니까? 마음의 기쁨입니까?
네온사인의 십자가가 장식된 예배당입니까? 성령이 교통하시는 교회입니까?
제일 유명한 교회입니까? 영원한 천국입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침대, 음식, 아름다운 옷이 아니라 단 잠, 입맛 아름다움, 가정.. 이런 것들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상급의 전부는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내적인 행복과 가치는 영원한 천국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에 비하면, 태양 앞에 촛불같을 것입니다.
영생은, 구원은 이 땅에서도 맛보여지지만, 그것을 미래의 구원과 비교하면, 비유컨대, 그것은 백화점에서의 시식코너에서 조금 떼어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상급도 이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힘있게 하는 것일진대, 하늘 나라에서 예비된 상급은 얼마다 우리를 황홀하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상급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수정처럼 맑고, 황금길이 깔려 있고, 열 두 보석으로 치장되었다고 하고.. 사람이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제일 황홀한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모세, 그는 어떤 하나님의 상급을 받았습니까? 세상의 명예는 잃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전세계인이 모세를 길러준 공주의 이름은 관심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 압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는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이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쾌락의 낙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모세는, 그의 마음 눈에 구체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편에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주심을 바라보고 당당히 세상의 영화를, 세상이 주는 즐거운 쾌락을, 세상이 주는 우쭐한 명예를, 그리고 세상이 주는 뿌듯한 재물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을 받을지라도, 능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믿음의 결단과 삶을 드리고 지속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기를 소망하십니까?
잠시 세상이 주는 쾌락의 낙을, 잡으려고도 잘 잡히지도 않는 세상의 주는 뿌듯한 재물을, 어쩌다 어느 사람에게 주어질지 모르는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며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잡으려고 연연하며 목매어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때로 고난이 길게 느껴질지라도, 사람들이 혀를 차며 "쟤도 결국 골수 예수쟁이가 되었구나" 멸시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오늘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으로 나의 심령과 삶을 풍요롭게 하시고 내일 영원한 세계에서 확실하게 약속하신 상급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추구하시겠습니까?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양영자 선수가 지난 10월 전주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의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양영자 선수가 익산의 이일여고 출신입니다.
그가 매달 100만원씩 나오는 체육연금은 시골의 어느 노목사 앞으로 돌려 놓고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몽골에 선교사로 나아간 지 5년이나 되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토착 바이러스의 감염, 올림필 금메달리스트인 것을 전혀 알아주지 않고 냉담한 현지 교육청의 반응,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한국음식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생활을 견디는 일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고 하지만, 이제는 "몽골에서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그런 고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하는 기자들에게 양영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귀영화보다 당신의 뜻대로 가시밭길이 더 행복합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진정한 가치와 행복의 삶을 선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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