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절된 기도 / 고후 12:1~10

  • 잡초 잡초
  • 673
  • 0

첨부 1


< 제 목 > 거절된 기도
< 본 문 > 고후12:1~10

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어떤 문제를 놓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결과가 전혀 나타나질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울며불며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들으시는지 마시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지쳐서 아예 기도를 포기해 버립니다. 심한 경우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런 일은 누구라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에 관한 오해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관해 이렇게 오해하죠. 기도를 마치 도깨비 방망이 뚝딱 하면 척척 이뤄지는 것처럼, 혹은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무슨 소원이든 성취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기도는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하나님이 척척 들어주시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심부름꾼이란 말입니까? 그럴 수 없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응답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액면 그대로 응답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일단 거절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든 하나님에게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절당하는 게 무조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절당하는 것도 사랑이요, 더 큰 유익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계속 초코렛을 달라고 졸라댑니다. 만일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어떻게 될까요? 머지않아 치아가 엉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심대로 요구하지만 판단력이 있는 부모로서는 무조건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하나님이 들어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종합적 판단으로 보건대 거절해야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날씨의 문제를 생각해 보죠. 우리는 매일 맑으면 좋을 것 같아요. 비가 오면 귀찮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요구대로 하나님이 매일 태양이 내리쪼이는 맑은 날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지구 전체가 온통 사막이 되고 말 겁니다.

그러므로 혹시 기도하다 거절당해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장은 실망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더 큰 유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당장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종합적인 판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종합적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나 자신과 세상, ... 등 모든 것을 고려하여 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인간이 그것도 모르고 섣불리 판단해서 스스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거절된 기도도 결국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도가 거절된다고 괜히 스스로 실망하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만 미운털이 박혀서 그런 게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조차 종종 거절된 바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셔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사형틀로서 고통과 수치의 극치입니다. 그 십자가가 성큼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면서 예수님은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하나님께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정말 잘 된 겁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도 부활 승천하시고 만유의 주로 경배와 찬양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예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가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절된 기도의 축복에 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거절된 기도의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고, 그 축복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의 기도 : 육체의 가시 제거

바울에게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7절)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했는데 그의 고통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허용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cf. 욥기 1장에 나오는 욥의 고난)

여기서 육체의 가시는 바울의 육신에 있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가시’라는 단어의 어원적 뜻을 보면 짐작이 갑니다. 헬라어로 ‘스콜로프스’(σκολοψ)인데 ‘말뚝’ 혹은 ‘뾰족한 창’ ‘쇠꼬챙이’란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여러분, 우리가 하다못해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혀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말뚝이나 쇠꼬챙이가 박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고통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몇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혹자는 간질병, 혹자는 말라리아, 혹자는 안질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게 맞는지 모르나 안질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때 눈이 멀었습니다. 나중에 아나니아가 안수 기도를 해줄 때 다시 보게 됐지만 그 후유증으로 바울은 평생 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답답함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됩니다.(갈4:15, 6:11 참조)

육체의 고통도 컸겠지만 심적인 부담도 엄청났을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완전히 대장간 식칼이 노는 격입니다.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병든 자들을 무수히 고쳐주었습니다. 앉은뱅이 일으켜 세우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행19:11~12 보면 에베소 지역 전도 당시의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정말 대단하죠?

본문에도 보면 보통 사람이 체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이 있었음을 기록합니다. 1절~4절에 3인칭으로 간증했지만 사실은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데, 환상 가운데 천국에 갔다 왔다는 겁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도 바울이 자기 병 하나 고치지 못해서 절절 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편으로 수치스러웠겠는가!

그래서 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울며불며 ... 8절 보면 세 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충 세 번했다는 횟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금식하면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장기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당연히 하나님이 “오냐, 내 들어 주마!” 하고 그대로 응답해 주셔야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이상합니다.

[2] 거절된 기도 : 바울의 평생 약점

주님의 응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9절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한 마디로 말하면 ‘거절’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그냥 지내라는 겁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야속합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바울은 평생 동안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인해 불행했습니까? 혹시 그 이전에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9절(중)의 “ ...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 ” 라는 표현이나 10절(중)의 “ ... 기뻐하노니 ... ”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이 상황에서 기뻐하다니 ... ! 여러분,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도 기가 막혀서 그가 실성을 한 겁니까? 아니죠. 바울은 거절된 기도의 축복을 발견한 겁니다. 그걸 알고 나니까 육체의 가시가 그대로 있어도 마냥 기쁘고 좋았던 것입니다.

[3] 거절된 기도의 축복 : 하나님의 최선

그렇습니다. 거절된 기도도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색다른 표현 방법입니다. 아니, 차원 높은 사랑이요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고통이지만 그로 인하여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풍성한 것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단순합니다. 그래서 당장 좋은 것만 구하고, 육신적으로 좋은 것만 구합니다. 나만 좋은 것만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보다 전 인생에, 더 나아가 영원까지 좋은 것을 주시고자 애쓰십니다. 육신뿐 아니라 영혼에 좋은 것을, 나뿐 아니라 내 가정도, 교회도, 이웃도, 사회에도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종합적으로 좋은 것, 최선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수준이 낮아서 차선 혹은 차차선, 차차차선만 구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사55:8~9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가 뭘 몰라서 그렇지 때로는 우리에게는 적당한 고난과 약점이 있는 게 종합적으로 좋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판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허용하시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기도해도 어떤 때는 거절하십니다. 그럴 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항상 단맛만 있는 것보다 쓴맛도, 매운 맛도 필요하다고 판단하시기에 허락하시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단맛만 요구합니다. 그러나 일류 요리사는 탁월한 맛을 창조하기 위해 각종 재료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맛을 섞습니다.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신맛, ... 그 모든 게 조화를 이루며 가장 좋은 맛을 연출하게 됩니다. 최선의 맛을 위해 쓴맛도 매운 맛도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통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쓴 고난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의 생애 가운데 구체적으로 왜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는 겁니까? 그의 고백을 잘 들어보십시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9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하도 유명하고, 능력이 많다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교만해질 위험성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는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그래도 별수 없는 인간이기에 ... 그래서 하나님이 종합적 판단을 하신 겁니다. 건강해진 후 혹시 교만해짐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러다가 능력이 다 떠나가면 오히려 더 나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고통과 약점이라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종합적으로 따져 보면 유익하다는 겁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약점이 있을 때 떨쳐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 하나님이 거절의 응답을 하시면 그 고난과 약점을 재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인해 내 인생에 어떤 유익들이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내 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환경 조건이 변화되지 않아도 이런 영적 해석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 고난을 당하다가 약점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온 분들이 상당수 있을 겁니다. 내 약점 때문에 주님을 만났다면, 내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반대로 모든 게 형통하고 잘 되기 때문에 아쉬운 게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리 오히려 저주입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도 다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이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모든 게 잘 돼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장미 나무에 꽃도 있고 가시도 있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꽃만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가시도 만드셨습니다. 왜 그럴까? 어쩌면 너무 아름다운 장미꽃이기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장미꽃도 축복이지만 가시도 축복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기차 한 구석에 실험 기구를 놓고 틈틈이 실험에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차장에게 따귀를 맞고 쫓겨납니다. 그때 귀가 먹었습니다. 후일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귀가 안 들리니까 세상 잡음이 들리지 않아 실험에 전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테너 최승원 씨의 간증을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갖고 있죠. 누군가 주기도송 1천 번 부르면 낫는다고 해서 그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낫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1만 번을 불렀습니다. 그런데도 낫지 않았습니다. 보기 좋게 거절당한 거죠.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이제는 장애가 장애로 느껴지지 않게 된 겁니다. 오히려 감사하며 신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고난의 신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사용하셔서 인생을 값지게 복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롬8:28 말씀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비밀을 깨달았기에 바울은 이제부터 자신의 고난과 약점까지도 감사하며 자랑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혹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질병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라나 혹 그 기도가 거절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문제 때문에,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보면 더 좋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절된 기도조차 축복인 것입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꼭 명심하시고 어떤 형편이든지 자족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