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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도록 따를만한 분이 있나요? / 룻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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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죽도록 따를만한 분이 있나요?
본문 : 룻기 1:6-18


험한 삶을 산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남편은 일찍이 명예퇴직을 해야 했습니다. 취직할 곳도 없었고 사업을 하기도 겁났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이민을 결심했습니다.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낯선 땅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정착할 새도 없이 그만 풍토병으로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허리를 졸라매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하루 품을 받는 막노동인지라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그날 벌어 그날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장성해서 그곳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색싯감이라고 데리고 온 두 며느리 모두 내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혈통이 다른 국제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 보았지만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한 지붕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 그렇게 다섯 식구가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이 교통사고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민 생활 십년 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이렇게 험하게 얽혔습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옮겼었는데,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길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처음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두 며느리가 동행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세 과부가 더벅더벅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갈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는 나이가 많아 재혼은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들은 아직 젊었습니다. 더구나 이방 여자라 유다에 가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을 향해 이별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 가서 각각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라.” 그러나 며느리들은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설득했습니다. 유대 풍습에 남편이 죽으면 그 형제 중에서 후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늙고 남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가 봐야 소망이 없습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이 치셔서 복 받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따라 오겠다는 며느리가 고마웠지만 그 뜻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큰 며느리 오르바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떨어지지 않는 룻을 다시 설득합니다.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질 않느냐?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은 세 번이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룻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고집을 부렸을까요? 나오미에게 뭔가가 남은 것이 있었을까요? 숨겨둔 재산이라도 본 것일까요?

나오미는 룻을 어떤 며느리로 생각했을까요? 21 절을 보면 나오미가 본국에 도착해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나오미는 물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지만, 룻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쉬운 관계가 아닙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진정한 마음으로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가 알아주든 말든 한결같이 따랐습니다. 충성을 다했습니다.

세 번이나 집에 가라는 매몰찬 말이 서운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단호하게 자기 결심을 나타냈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는 16 절과 17 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6-17>

룻의 결의에 찬 이 말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그 다음 18 절을 보니 나오미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의 대답 속에는 자기 인생길을 포기하겠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룻은 민족과 신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자신의 결심을 확고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장사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죽어서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과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보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무덤이 가족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족이 한 무덤에 묻혔습니다. 무덤은 연한 암석에 굴을 뚫거나 자연 동굴을 이용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안에 사람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렇게 시신이 썩을 때까지 놓았다가, 뼈만 추려서 그 아래 파놓은 석실에 보관했습니다. 결국 식구들의 뼈는 석실에서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이런 장례 풍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가 죽으면 나란히 합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을 따로 해서 묻는 것입니다. 실제로 뼈와 뼈가 만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뼈와 뼈가 만납니다.

룻은 죽음과 무덤까지 이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더욱 룻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약속을 어길 때는 신의 저주가 있을 것으로 맹세했습니다. 동물을 시범으로 두 쪽으로 쪼개면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여기서 룻은 동물을 가지고 의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했을 것입니다.

룻은 죽도록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로 나오면 막을 수 없습니다. 사실 나오미 입장에서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요즘 세상에 이런 며느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시어머니를 따라 먼 타국으로 갈 수 있습니까? 집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의지할 남편도 없습니다. 딸린 자식도 없습니다. 떨어진다 해도 누가 뭐라 하지 못합니다. 한두 번 인사 치례 정도로 효성스런 말을 했습니다. 못이기는 듯 팔자를 고쳐서 더 나은 보장된 인생을 새 출발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오미를 따라 가봐야 소망이 없습니다. 노인 뒷바라지로 평생 지내야 합니다. 과부가 생업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도 아닙니다. 그저 하루 품을 팔거나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합니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길입니다.

룻은 왜 이런 고생스런 길을 자청했을까요?

순전히 심성이 착하고 인정에 끌려서 그랬을까요? 나오미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그리 측은했을까요? 나오미는 별로 자기를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룻이 그토록 끝까지 충성을 보인 까닭이 궁금합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 풍조 속에서는 이런 며느리의 행동을 더욱 이해하기 힘듭니다. 자기 일생을 희생하고 사실 남과 다름없는 시어머니에게 무덤까지 충성을 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특별한 무엇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충성입니다.

그러면 그 특별한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요?

룻의 이 충성 속에는 개종이라는 커다란 테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바꾸는 귀화라는 테마가 있습니다. 개종과 귀화 이 두 가지는 모두 결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종교를 바꾸고 국적을 바꾸려면 강한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룻의 눈앞에는 껄끄러운 시어머니뿐입니다. 하나님도 별로 매력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지금 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거기다 재산마저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입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룻이 보기에 나오미는 별로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크게 죄 지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룻이 체험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개종할 수 있습니까?

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타국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편견과 따돌림을 당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까다로운 민족입니다. 율법이 엄하고, 의식이 많습니다. 그 절차와 규례를 모르면 적응하기 힘듭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이거나 부자 나라도 아닙니다. 뭘 보고 귀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룻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이 배경이 뒤에 깔려 있습니다. 또 하나 감춰진 것은 나오미의 깊은 사랑입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귀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룻은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계산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이 본 것은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장 잘 되고 복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삶 속에서 참 진리를 보았습니다. 진실한 신앙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조건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이제부터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합니다. 걸린 병이 낫고, 새로운 질병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집안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업도 잘 풀려야 합니다. 꿔준 돈도 받아내야 합니다. 사고도 비껴가야 합니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애들이 성적도 올라야 합니다. 왜 교회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하나님이 돌보기 시작한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돌보니까 만사형통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재수 없는 일이 터지면 교회고 뭐고 관두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하나님도 별 수 없는가보다 하면서 딴 데 신통하거 없는지 알아봐야죠.

결국 종교는 다 사기 치는 겁니다. 믿을게 하나도 없지요.
여러분 실제로 이런 태도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예수 안 믿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달리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병에 걸립니다. 예수 믿어도 사고 납니다. 예수 믿어도 대학에, 취직시험에 떨어집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는데, 예수 믿으면 안 그런다고 보장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신앙이란 그런 조건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반짝이는 보물이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룻은 온갖 나쁜 일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오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강한 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타국 생활 십 년 동안 모압의 이방 문화에 전혀 물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을 때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오미의 신앙은 더 깊어졌습니다.

신앙이란 존경하는 사람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룻은 신앙이 깊은 나오미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겼습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버림을 받은 것 같이 보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돌보고 계셨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룻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코치에 따라 새 남편을 맞게 됩니다. 보아스는 자상하고 늠름한 새 남편입니다. 그리고 룻은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룻은 영광스럽게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됩니다.

세상 계산법에 의해서 따졌다면 룻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룻은 아주 바보 같은 계산을 했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신앙 계산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보고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룻에게는 하나님이 더 컸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잃는 것은 하나님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시집을 와서 시댁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친정에서 알고 있는 모압의 신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셨습니다.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셨습니다. 다른 신들은 허망한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셨습니다.

그래서 룻은 죽기를 각오하고 나오미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나오미가 부럽습니다. 이토록 죽기를 각오하고 고난을 자청해서 따르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멋지니안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따른 것입니다.

지난주에 친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성전 부지를 새로 매입하고 성전 건축을 하게 되었다고 광고했더니 다음 주일에 20 가정이 다른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계산을 했기에 그랬을까요? 멋진교회도 성전을 이전했습니다. 몇 가정이 다른 교회로 옮기긴 했어도 대부분 기뻐하면서 따라와 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약삭빠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미련한 듯 보이는 그런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충성을 다 하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룻과 같은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영광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나오미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존경할 분이 나의 삶의 주변에 한 분이라도 계십니까? 그 분을 본 받고 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개종이라는 것은 삶의 신념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또 그 분을 본받아 귀화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귀화란 대한민국 국민에서 천국 시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본 받을 분을 찾으셨습니까? 제가 그 분을 소개합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인생만을 귀히 여기며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남을 위해 사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몸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내 삶의 중심을 그 분께 맞추시기 바랍니다. 주님보다 귀한 분은 내게 없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전부라고 입으로 말하십시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죽음도 내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단언하십시오.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 되신다고 선포하십시오.

다같이 이렇게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많은물 260) 나 가진 재물 없으나 (찬미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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