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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갈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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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몇 년 전에 철원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6.25때 공산당 당사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관광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6.25의 흔적이었습니다. 보훈병원에 가면 아직도 6.25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굴도 남북이 갈라진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적비 남기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 구석구석에 유적비가 널려 있습니다. 열녀비, 치적비, 순교비, 생가...등등, 심지어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유적비를 남기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만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대통령 생가 복원한다고 얼마나 떠듭니까?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디에 자기 이름이 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명예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권력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긴 흔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흔적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절기는 하나님과 관계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칠칠절은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거둔 곡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광야에 묻어 있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흔적입니다.
알프렛 테니슨 경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모자를 제 집에 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의 부탁대로 집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그 답장 중에 문장 하나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자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은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곳에 어떤 흔적이 남습니까? 우리는 기쁨의 흔적을 남깁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깁니까? 사랑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미움의 흔적을 남깁니까? 화평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불화의 흔적을 남깁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함과 소망과 희락을 기대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을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겨둡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해독을 남겨둡니까? 우리가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에 우리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가 가는 것이 귀찮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이사야 52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우리의 발자국은 어떻습니까? 지난밤에 눈이 내렸는데, 밖에 무엇이 지나갔나 하는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합니까? 발자국을 보면 압니다. 소가 지나갔으면 소 발자국이 났을 것이고, 개가 자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갔으면 사람의 발자국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내 발자국에는 용서가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원한이 남아 있습니까? 만족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불만과 불평을 남겨 둡니까? 희망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절망과 좌절을 남겨 둡니까? 성결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불결을 남겨 두어 우리의 발자국을 차라리 가리고 싶어합니까? 우리의 발자국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을 느끼면서 그의 제자 한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께서 당신이 정말 우리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여기 왔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이 사람아,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인가? 자네 선생인 세례 요한이 이미 나를 소개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새삼스럽게 또 물을 것이 뭐 있는가?"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조금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발자국은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아무리 선전해도 다른 사람이 내 발자국을 보고 나를 판단할 것입니다.
저 아프리카에는 데이빗 리빙스톤과 알버트 슈바이처가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대륙인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국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를 한평생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미지근한 기관으로 전락시킨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러 와서 우리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실망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주면 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복이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창세기 39장 5절에 보면 "그(보디발)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어 어디 가든지 그곳에 여러분을 통해 복이 임하게 되고, 좋은 흔적과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했습니다. 소유권을 표시하는 각인(刻印)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예수의 낙인(烙印)으로 번역했습니다.
낙인은 쇠도장으로 화인(火印)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노예나 짐승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를 표시했습니다. ‘스티그마’는 불명예스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스티그마’를 영광스럽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곧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소유’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소유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신앙고백,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서두에 반드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즉,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세례문답할 때 반드시 식사기도를 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점심때는 기도를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세례 받은 학생들에게 이제는 부끄러워 말고 점심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이런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둘째는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보면 “옥에 갇히기를 여러 번 하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상처가 바울의 몸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릎에 기도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발에는 전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 생전에 내 몸과 내 영혼에 될 수 있는 대로 주님이 친히 맛보신 그 수난의 고통을 맛보게 하소서. 그리고 주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불타는 끝없는 사랑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지평선을 덮고 있는 듯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측은함과 비탄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찢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손에 못에 박힌 자국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 받은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주를 위해 일하다가 받은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예수의 그리스도의 종’이라 자랑할 수 있는 흔적을 많이 소유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우리를 위해 가시관 쓰신 흔적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박힌 흔적이, 예수님의 가슴에는 일곱 번 넘어진 십자가의 흔적이, 예수님의 등허리에는 채찍에 맞은 흔적이, 예수님의 이마에는 땀흘린 흔적이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이, 예수님의 무릎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한 주님의 흔적이 있어요. 이건 모두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지신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이 몸을 가지고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므로 흔적을 가져야 됩니다.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그 어머니가 팔이 불구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그 친구네 집을 놀러 갔는데 그 불편한 손을 가지고 점심을 차려서 아들 친구들이 왔다고 상을 차려 주시는데 보니까 불구 정도가 아니고 그 손이 녹아 가지고 손 한쪽이 아예 뭉글어졌어요 얼굴서부터 밥을 먹고 나서 그 친구가 어머니 손을 쓰다듬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 어머니의 이 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거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다 나를 뉘어놓고 어머니가 들판에서 일을 하는데 우리 집에 불이 나니까 들판에서 동네로 달려오는데 자기 집에 불이 나고 아기는 방에 있으니까 번개처럼 집으로 와서 자기를 앉고 나오다가 이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주 녹았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그 흔적을 쓰다듬으면서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를 사랑했기에, 못 박힌 흔적 가시관 쓰신 흔적들이 있어요.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위해 가시관 쓰시고, 손으로 지은 죄를 위해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를 위해 창을 받고 주님은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말하기를 내 몸에도 예수의 흔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바울은 생각해보면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죽을 뻔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들판에 내 버렸는데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또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도 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고, 위험을 당하고, 굶주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로마에 가보았습니다. 바울의 순교기념 교회당 옛날 바울이 복음전하다가 사형을 당하는데 돌기둥에다 목을 내면 위에서 내려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떨어지면서 때굴 때굴 3번 튀어서 굴렀대요 굴른 데마다 샘이 솟았다 해서 거기다 표시를 해 놨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이겁니다.”라고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보답하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몸에 나타난 흔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떠한 일을 열심히 했는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겨 있습니. 그것을 보면 압니다. 열심히 연필을 잡고 공부한 사람은 그 손가락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사람은 근육이 튼튼하고 좋지요. 부끄러운 흔적도 많지요 여러분, 아직도 담배 못 끊은 분 많이 계시죠? 담배를 많이 핀 분을 보면 이가 누렇고 손가락도 누래요. 술도 자꾸 먹으면 덜덜 떨고 흔적이 나타나지요. 늙으셔서 곤란해집니다.
레슬링 선수나 유도 선수들을 보면 귀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귀가 안으로 말려들다 못해, 구멍까지 거의 막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시간을 매트에서 뒹굴면서 연습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들은 귀가 문드러지는 것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슬링 선수라고 하면서 예쁜 귀를 가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선수로서 충실하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선수로서 대성했는데도 귀가 여전히 아름답다면, 그는 특별한 관리를 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얼마 전, 어느 등산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 등산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봉우리들을 거의 다 정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집념의 결과, 그는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동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보기에도 흉칙한 몽당 손이었습니다. 그는 그 손을 자랑스럽게 올려 보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장애를 스스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 손은 그 사람이 자신이 선택한 길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눈물겨웠습니다.
이렇듯, 어느 한 가지에 뜻을 두고, 그 일에 전념하게 되면, 그로 인한 영광의 흔적을 몸에 지니게 됩니다. 아니, 어떤 높은 뜻에 마음을 두면,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겨도 괘념치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의 모양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단지 도구이므로, 자신이 세운 고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귀가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떨어지는 아픔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혹자는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목사로서 나는 어떤 흔적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선생으로서 나는 어떤 흔적을 가졌는가?'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 질문은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로서 뜻을 세운 나는 어떤 흔적을 가지게 될까?'라는 질문으로 연장되기도 했습니다. 좋은 레슬링 선수가 되려면 수 없이 매트에서 뒹굴어야 하듯이, 좋은 목사가 되려면 특별히 전념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게 뭘까?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전념하게 될 경우에 남게 될 육체의 흔적은 무엇일까?
낙타 무릎! 그렇습니다. 예전 우리 선배 목사님들의 무릎은 낙타 무릎처럼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그러한 육체의 흔적은 그분들이 얼마나 기도에 몰두했는지를 잘 증명해 줍니다. 목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목사로서의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면, 그의 무릎이 정상이 될 수 없는 이치입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낙타 무릎이 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무릎에 굳은 살이 없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앓고 있는 각종 질병도 사실은 육체의 흔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거나 잘못하여 갈등을 만들고, 그로 인하여 마음 고생을 하고, 그로 인하여 병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함께 고통하고 함께 울다 보면, 목사님의 속은 숫껌뎅이가 되고 맙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지나가다가 속이 시꺼멓게 썩은 고목나무를 보시고, '너는 목회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속이 썩었냐?'하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배짱 좋게 목회하는 분들은 병 없이 살지만, 여린 마음으로 교인들과 함께 울고 웃는 목회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흔적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잘못 빠지면, 일부러 육체의 흔적을 만들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목청을 돋구어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이런 흔적은 하나도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짐짓 자랑하기 위해서 애써 만든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위해서 전념하다보니 자연히 생긴 육체의 흔적이 중요합니다. 이런 흔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흔적을 쓰다듬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진짜 목사가 되게 하셨군요'라고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하철 역 화장실에 가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봅니다.
"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실 것 같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일을 많이 했는가에 흔적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 하면 손, 발에는 없고 입으로만 한 몫 하니까 입에만 흔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현대 그리스도인을 앉은뱅이라 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는 성한 사람이나 똑같지만 일하자 하면 앉은뱅이는 앉아서 뭉개져요. 일어나서 일을 못하잖아요. 현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에 이제 예수의 흔적을 갖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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