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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회복(人間回復)의 기적 (눅 8:2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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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회복(人間回復)의 기적 (누가복음 8:26∼39 )


친인척이 없는 15세 중학생이 숨진 어머니의 시신을 6개월 동안 집에 보관해 온 것을 최근 학교 교사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발견 당시 시신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잠자는 듯한 모습이었으며 피부는 대부분 부식돼 뼈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방이 2개인 13평짜리 셋방에서 혼자 생활하던 송군은 어머니의 시신을 안방에 보관하고 자신은 난방이 안 되는 작은방에서 생활해 왔으며 집 주인이 가끔씩 김치 등 밑반찬을 갖다 줘 식사를 해결해 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친인척이 없는 중학생이 숨진 어머니의 시신을 6개월 동안 집에 보관해 온 것을 최근 학교 교사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정모 교사(42·여)가 이 학교 학생인 송군의 집을 방문했다가 안방에서 송군의 어머니인 심모씨(45)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정 교사는 경찰에서 "송군이 '엄마가 몇 달 전 가출했다'고 해 송군의 생활을 살펴보고 집안 청소도 해주기 위해 송군의 집에 갔다"며 "안방 문이 잠겨 있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 시신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발견 당시 시신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잠자는 듯한 모습이었으며 피부는 대부분 부식돼 뼈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송군은 경찰에서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있었다"며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다보니 시신이 집에 있는 걸 알리지 않은 사실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숨기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이루지고 있습니다. 이 실화는 이 시대의 깨어진 상실된 인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교도 이웃도 친척도 이 상실된 인간을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실한 한 인간을  회복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버려진 인간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뭉개진 한 인격을 소개합니다. 

어떻게 상실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롬1:24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욱 경배하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롬1:26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여인들로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게 되었습니다. 스와핑이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이것은 인간 상실의 노골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롬1:28에서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합당치 못한 일을 하면서 비뚤어진 인격으로 깨어진 자화상으로 살아가는 상실된 인간의 실상을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한 사람은 인간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1.깨어진 상실된 인간의 실상   

첫 번째 인간 아담에게 사단은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않는다고 속여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마귀의 통제소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영적인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인간의 영안에서 떠나고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 상실한 마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에 나타난 광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시 사람으로 귀신이 들린 자라 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죄와 허물로 죽은 육신 속에 귀신들이 집을 짓고 생각과 감정과 위지를 사로잡혀 귀신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실된 한 인격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7절에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1)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 옷을 입어도 누더기 같은 더러운 옷을 걸치고 다니고 옷은 날개와 같아서 품위를 내는 것인데 옷을 갈기갈기 찢어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수치를 다 드러내 놓고 다닙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기를 단장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귀함과 품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물의 영장으로서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옷을 벗어 버렸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팽개쳐 버렸다는 뜻입니다. 또한 옷을 벗고 다닌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현상중 하나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빌3:19).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3:18). 여기서 "흰 옷"은 세마포를 뜻하는 것이며 이는 곧 "성도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계19:8).

그는 옷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그의 옷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옷을 입음으로 사람들은 자기 신분을 표현합니다. 왕은 왕복이란 옷을 입음으로 자신이 왕임을 표현합니다. 사람들에게 왕임을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왕복을 벗습니다. 귀족은 귀족 신분에 어울리는 옷을 입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학생은 교복을 입습니다. 의복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옷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까, 악한 영이 그 옷을 벗겨 버렸습니다. 그의 정체성을 벗겨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치욕적인 사건입니다. 왕조시대에 왕의 옷을 벗겨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왕복이 벗겨진 순간 그들의 삶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랑스런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일어나 옷을 벗으라 할 때, 그 수치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사탄이 거라사인을 찾아와서 바로 이런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람의 아름다운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기업을 누릴 자의 신분 모든 권리를 다 벗어 던지고 죄악으로 허물로 추악한 것들로 인간을 상실한 모습니다.


(2) 집에 떠나 방황하면서 살았습니다.

27절에 "…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나갔다는 말은 가족과 모든 관계를 깨고 산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인격입니다.

집을 버리고 나간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집은 행복한 삶의 본거지입니다. 사람은 집에서 잠을 자고, 집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가족과 교통하며, 집에서 하루의 일과를 출발하고, 집에서 그날의 일들을 마무리하며, 집에서 아름다운 삶과 희망을 가꾸어 나갑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는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은 그 사람의 부모요, 형제요, 자녀입니다. 악한 영이 거라사인에게서 그 가정을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집에 거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이 그의 가정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에게서 가정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사탄이 아담의 가정에 침투하자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 노래되던 이브가 원망의 대상으로 바꾸어집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가정을 상실한 불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가정을 빼앗겨버린 채 고통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집을 멀리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비극적인 현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눈밖에 나가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를 원했던 탕자문명의 실상이 이런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침내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하고 고독에 찬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집을 떠나면 돼지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돼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눅2:49).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성도가 점점 교회를 멀리하려는 풍조는 탕자 문명의 만연된 현상이며 매우 불행스러운 징조입니다.  교회를 멀리 떠나 사는 사람들은 마귀가 그를 붙들어 끌어낸 것입니다. 

고 장기려 박사는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주치의로 뽑힐 만큼 유능한 의사입니다. 그는 6.25 때, 부상당한 군인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기 위해 자기 가족을 남겨두고 부상자를 싣고 트럭으로 월남했습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치료를 돕는 아들 하나만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4남매는 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40여 명씩 무료진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는 마음속에는 북한 가족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재혼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는 결혼을 사후까지 연결시켜 보면서 살았습니다."내 나이 80이 넘었지만 가능하면 살아생전에 아내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저 본향, 저 천국의 세계까지 영원할 것이다."그에게 있어 신앙이란 가정 회복을 위한 소망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거라사 지방의 광인은 가족을 떠나 집을 떠나 유리방황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영적인 고아가 된 것입니다.  가족들과 철천지 원수 되게 하여 모든 혈육의 정을 다 끊어 놓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성이 깨어진 실상인 것입니다. 

(3) 무덤 사이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과 희망이 있는 집을 멀리하고 오히려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무덤사이에서 거처하였습니다. 무덤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거기는 호흡이 없고 움직이는 동작이 없으며 생명과 담을 쌓아버린 시체들의 도시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기도가 없고 예배가 없고 봉사가 없고 찬송이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무덤입니다. 

오늘날 부유한 사람들 중에는 무덤에 많은 돈을 들여 치장을 하고 공원처럼 꾸며놓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꾸며 놓아도 무덤은 무덤일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무덤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인간의 도시입니다.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단절된 인공문명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아무리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문화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라 하더라도 예수가 없는 곳은 장식된 무덤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자기의 본상을 상실했을 때 무덤 사이를 누비면서도 그곳이 무덤인 줄 모르고 마냥 즐기려하는 자와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누구든지 예수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그 시체를 만지면 부정이 탑니다. 은혜가 새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없는 인격을 만나거나 교제하면 내 영혼이 핍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흥을 즐기기 위하여 유행가를 하루 종일 불러 댔다면 그 영혼은 무덤가에서 하루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풍속을 쫒던 사람들과 며칠을 함께 하였다면 죽은 시체 가운데서 6개월간 함께 살아온 중학생과 같은 상실된 인간인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이 광인은 무덤 사이에서 죽은 흙덩이와 같습니다. 여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의 생명이 필요한 혼인집과 같습니다. 

(4)포악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29절에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5:4-5에는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더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난폭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자입니다. 쇠고랑과 쇠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곧 외부적인 통제력이 먹혀들 수 없는 상태입니다.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자기의 감정과 탐욕을 억제할 제어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막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 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과 재물이 주어지면 사회의 질서와 양식의 줄을 끊어 버린 채 힘으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 버립니다. 순식간에 부패 공화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감정과 생각의 노예가 되어 분내기 잘하며 화통을 삶아 먹은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기 좋아하고 분노 처리를 못하여 되는 대로 부시고 때리고 파괴하는 이상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쇠고랑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몰아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불러냅니다. 외진 곳으로 불러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우리의 감정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고 의지를 귀신이 마음대로 조정합니다. 


2,인간 회복을 위하여 오신 예수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왔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오셨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군대귀신에게 사로잡혀 벌거벗은 채로 죽음의 도시 속에 내던져진 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장면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특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는 분이며 상실된 인간을 원 위치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1) 잃어버린 현장에 친히 오셨습니다.

본문 26절에 예수께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로 찾아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 있는 곳으로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께서 직접 그 버려진 곳 무덤에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버려진 세상, 잃어버린 인간들에게는 비길 데 없는 축복이요 희망입니다. 어두움이 지배하는 세상 속으로 생명의 빛 되신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광명한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사9:1, 요1:9).

상실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이성이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아 주님은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한드라크마을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 오셨습니다.  광풍을 일으켜 이 엄청난 사역을 방해하는 공중에 권세 잡는 모든 세력을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여기 하늘과 땅의 군세를 가지시고 거라사 지방에 드디어 오셨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상실된 깨어진 저와 여러분을 찾아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융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은 귀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말합니다.

(2)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놓았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정신을 빼앗긴 그 불행한 사람에게 접근하시고 그를 지배하고 있는 귀신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행동도 하지 않으셨지만 귀신들린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28절).

29절에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에게 명령을 하고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하나님 다음으로 힘이 있어서 인간 세상을 제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습니다. 귀신의 능력 앞에 재벌도 제왕도 지식인도 기술자도 다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 사로잡히고 마음을 빼앗긴 자는 절대로 거기서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엡2:1-2). 오직 예수님만이 귀신을 억제할 수 있고(계20:1-3), 거기에 속박된 사람을 풀어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행16:8). 주님은 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3)부정한 사업을 쓸어버리십니다..

돼지 치는 일은 오늘날 부정한 방법의 사업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부정한 직업을 쓸어내 버리신 것입니다. 부정한 돼지치기 사업을  마귀들과 함께 깨끗이 쓸어 낸 것입니다. (신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 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주님은 군대 귀신을 몰아내고 부정한 산업인 돼지 치는 일을 치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의 먹이인 죄악의 쓰레기를 치워버리십니다.  귀신들이 쫒겨나고 돼지 치는 일을 일이 청소될 때 세상 사람들은 돼지 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처럼 예수님을 싫어 할 것입입니다.귀신들이 돼지와 함께 물속에 거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더러운 물이 가득한 거대한 호수요 이 물은 귀신들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어디를 가던지 군대 귀신을 접하게 되며 그 귀신들이 쫒겨나 부정한 일이 제거될 것입니다. 


3.온전하게 회복된 인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하고 영으로 접촉하면 거듭나게 되고 새로워지고 변화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와 진정한 교통이 이루어지면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회복된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된 인간의 실상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35절에 "…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라고 하였습니다.

①벗었던 옷을 입었습니다.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자다운 정체성, 하나님 나라의 대사다운 정체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 옷을 벗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정체성을 잃고 삽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자다운 정체성, 하나님 나라의 대사다운 정체성을 잃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옷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 의에 옷을 입혀 주십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의 의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옛사람 안에서 더덕더덕 끼어 입은 원망, 불평, 근심의 누더기들을 벗어버리고 성도의 정결한 의의 옷을 입고 희락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광인은 모든 수치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새롭게 단장한 모습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고상한 품위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16:15에는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람은 거룩한 세마포 곧 경건의 옷을 입는 자입니다(계19:8).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듯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의롭게 하셨습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② 정신이 온전하여졌습니다.

전기 배선에 휴즈가 끊어지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지만 이를 다시 이어놓으면 본래대로 회복됩니다. 이외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된 인간은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관계가 회복될 때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장 합당한 인간이 되며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고상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적 에너지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고전2:13-16). 온유한 인격 고상한 인격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예수의 발아래 앉았습니다.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정위치를 뜻합니다.

더 이상 귀신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주님께 순종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주권이 물러가고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여 하나님 나라가 심령에 임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고 하였습니다(창17:1). 호세아선지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호6:1-2) 

회복된 사람은 가정으로 돌아가 간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39절에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 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큰일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전하는 것입니다. 간증이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대목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집단이요 또한 회복케하는 기관입니다. 처음에는 귀신들렸다가 제 정신이 든 사람을 보려고 모여오는 호기심의 군중들이라도 일단 예수와 접촉하고 그리스도로 연합되고 나면 그가 바로 예수의 지체가 되고 회복된 사람의 사명을 공유하는 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지체 없이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에게 이 신비로운 생명적 도리를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온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상실된 인간회복이 이루어짐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복경복 자매님은 이와 같은 군대 귀신들에게 7년간이나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을 받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인을 영으로 접촉하고 이 모든 흉악의 결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면서 승리하고 있습니다. 이 큰일을 간증하여 전도하면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도하느냐 하고 송사한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거라사 지방의 광인은 치유 받고 즉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오늘 거라사 지방과 같은 군대 귀신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 우리 사회에  주님의 생명의 복음이 선포되어 흉악의 결박을 풀어 상실한 깨어진 이 땅과 인간을 회복하는 일에 저와 여러분을 간증자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화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 안에 상실한 인간 회복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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