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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을 위한 비망록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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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을 위한 비망록(행7:54-60) 

추운 겨울 위풍이 세던 방에 화로를 들여놓고 한기를 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이 화로입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군불을 때면 벌건 숯불이 남는데 그걸 긁어모아 화로에 담아 안방 중앙에 둡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그 화로 주위로 모여들어 가래떡이며 고구마며 밤을 구워먹던 추억이 있습니다. 기억컨대 밖이 추우면 추울수록 화로가 있는 방은 더욱 아늑했고 따스했습니다. 그 불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었고 피곤한 삶의 아늑한 안식처 같은 몫을 해주었던 그런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런가 하면 무더운 여름철에도 불의 추억이 있습니다. 바로 캠프파이어의 추억입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 캠프파이어는 이상한 힘으로 사람을 묶었습니다. 아무리 무더운 날씨라 하더라도 캠프파이어의 느낌은 따뜻하고 아련합니다. 참 묘하게도 겨울철의 화롯불이건 여름철의 캠프파이어건 그 불의 빛과 열은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이 늘 우리에게 희망만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마(火魔)라는 말처럼 불은 우리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고 우리가 애써 이룬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빨간 불자동차의 앵앵거리는 사이렌 소리는 어린 마음에 잿더미가 된 우리 집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던 화롯불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원흉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과 폭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불이 함께 하고 북한도 걸핏하면 '불바다'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라는 이중성을 띠고 우리와 함께 합니다. 이게 불의 속성입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환하게 해주던 불이 어느 때는 우리를 태우고 눈멀게도 합니다. 바로 여기에 불과 생명의 역설이 있습니다. 불이 따스하게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혼돈의 화염이 되어 우리를 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서는 불에 대한 비망록이 있어야 되기에 '자나깨나 불조심'이라든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경구들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불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불에서 너무 멀면 불의 애정을 충분히 받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불에 너무 가까이 가면 시커먼 숯덩이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리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멀면 생명의 에너지를 받을 수 없고 너무 가까우면 생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켜 '가까이 할 수 없는 불'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런 적당한 거리를 체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온갖 생명체들은 이 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태양과의 거리가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체의 존재 여부가 판가름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구는 태양계의 행성 가운데 생명체가 살고 있는 유일한 별인데 그것은 지구가 태양에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큰불과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생명체로서의 지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거리의 균형이 계속 지속될는지 어떨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태양계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태양 에너지가 다 소진될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태양이 결국은 자신의 마지막 에너지원을 한꺼번에 불사르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인데 이때 지구는 엄청난 태양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 표면의 모든 물은 증발하게 되고 지구는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불과의 알맞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생명체가 자신을 태우지도 않고 얼어붙게도 않으면서 불의 에너지를 자기 삶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생명체들은 태양이란 큰불의 에너지를 자기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태양의 에너지를 조금 떼어서 자기 몸 안에 간직하는 삶의 비결을 터득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 속에 불이 있는 것인데 그 불은 보이지 않는 불인 것입니다.
이 불 또한 밖의 불과 같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생명를 지탱하는 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생명을 파괴해 버리려는 힘이기도 합니다. 한쪽은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어두운 불이요 다른 한쪽은 생명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고양시키는 밝은 불입니다. 한쪽은 우리 몸 안에 끈적끈적한 욕망의 기운이 솟아나게 하고 한쪽은 보다 밝고 깨끗하고 개운한 기운을 솟아나게 합니다. 이러한 내적 현상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 속에 두 가지 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영이 다 같은 영이 아니라 선한 영이 있고 악한 영이 있는 겁니다. 은혜받는다고 기도원에 갔다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의 성격을 잘 알고 그 불에 자신을 맞출 줄 알아야 불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은 오히려 우리에게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이 다 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 역시 요1서 4:1절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면합니다.

불이 그러하듯이 영도 두 가지가 있어 성령이 있고 악령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지만 악령은 우리를 죽이는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복되게 하는 영이지만 악령은 우리를 저주의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영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고 악령을 성령으로 여겨 자신을 거기에 맡겨버리는 이들이 없지 않다는 거, 이거 우리 주위의 실제 경험 아닙니까? '아무개가 교회 다니더니 이상해졌다...' '기도원엘 다니더니 좀 정상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실제상황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지나고 한 주간을 살아온 오늘 이 아침에 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똑바로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는답시고 악령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위한 영적 매뉴얼, 성령을 가득히 받아 사는 비결을 담은 영적 비망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위한 중요한 비망록을 생생하게 남겨준 인물입니다. 행6:5절에 보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스데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이 스데반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의 삶 속에 믿음 충만, 성령 충만을 위한 비망록이 새겨져 있다는 겁니다.

첫째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행6:8-7:53절은 스데반의 복음 증거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가장 장문의 메시지가 바로 스데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길고 알차게 복음을 전하는 자는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도 아닌 스데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세밀히 살피면서 메시야 예수를 증거하는데 어지간한 사도들도 따라가질 못할 만큼의 통전적이고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충만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성령은 말씀에 비례해서 임하고 역사함을 증거합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성령도 가득하지만 말씀이 그 마음에 빈곤한 사람은 성령도 빈곤하고 맙니다. 언제나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으로 역사합니다. 행10:44절에 보면 사마리아의 성령강림은 저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에 귀기울일 때에 임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함으로 말씀이 충만하고 말씀이 충만함으로 성령이 충만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면 그건 우리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충만하지 못하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면 그건 말씀을 외면한 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전해 주는 성령 충만을 위한 비망록의 첫 번째 항목은 '성령 충만하려면 말씀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겁니까? 우리의 눈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부릅떠져 있지 않습니까? 마을 서당에서 훈장 선생님이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생 하나가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딴짓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있던 훈장 선생님이 화가 나서 그 아이를 나무랍니다.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글공부는 하지 않고 장난만 치다니... 네 이놈, 오늘 혼 좀 나 봐야겠구나..." 그러자 그 아이가 말합니다. "훈장 선생님, 저는 천자문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뭐라고? 허허... 이 녀석이 갈수록 태산이구만..." "아뇨. 글은 배우고 싶은데 천자문을 읽고 싶지가 않다구요..." "공부하기 싫으면 싫다고 할 말이지 이 무슨 기괴한 핑계인고..." 훈장선생의 나무람에 아이가 말합니다. "선생님, 아니 그렇습니까? 하늘은 암만 봐도 저렇게 푸르기만 한데 하늘을 검다고 가르치시니 저는 이런 천자문은 배우고 싶지가 않사옵니다..." 그 말을 듣고 훈장선생은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천자문은 맨 처음에 이렇게 시작되지 않습니까?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루 황(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꼬마가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천자문은 하늘이 검다고 가르치니 천자문이 엉터리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냥 세상 보기에 익숙하고 말씀보기에 어색한 삶이 우리들의 삶이 아닙니까? 검은 세상을 푸른 세상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속에 행복의 파랑새가 있고 희망의 무지개가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임을 아시고 말씀 안에 내 인생의 지도가 펼쳐짐을 알아 시1편 기자가 제시하는 행복론처럼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성령 충만의 비결입니다.

두 번째, 성령 충만을 위한 비망록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삶'이라고 스데반은 소개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이를 갈며 달려드는 자들 앞에서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그런 저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 눈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성령 충만을 위한 비망록의 두 번째 항목입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살면 우리의 얼굴은 찌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무얼 바라보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네.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지난 20년 동안 소경으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와서 길을 걷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천지 만물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기뻐서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깐 골목길은 여기저기 많기도 하고 대문도 모두 같아 보여서 제가 살던 집을 찾질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서화담이 그 청년을 보고 한 말은 이랬습니다. "내가 네게 집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노라.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더듬거려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무얼 많이 보면서 산다는 게 꼭 좋은 게 아닙니다. 요즈음 세간에 심플 라이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너무 복잡해 지는 세상에 휘몰려 살다보니 단순함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저들의 문제는 '눈의 밝아짐'에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결국은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너무 세상에 눈이 밝아있지는 않습니까? 좀 안볼 건 안보며 살아야 되는데 너무도 많은 것을 보려고 눈을 부라립니다. 그러니 피곤하지요. 눈에는 핏발이 서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에는 안차니 짜증만 더해갑니다. 세상을 보며 인생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같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살고 또 그 하늘의 기운을 받아 천사의 얼굴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내 얼굴이 어떤 얼굴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할까요?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주님을 바라며 사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 충만을 위한 비망록에 적어두어야할 세 번째 항목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스데반은 증거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온전히 담은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스데반을 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병정들과 조롱을 퍼붓는 유대인들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그 기도를 스데반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건 주님의 가상칠언 중의 두 마디와 일치하는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속에 충만하여 따뜻한 성령의 불이 타오를 때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이 되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또 그런 시야를 가졌을 때 자기를 죽이는 원수조차도 용서하고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삶의 방향과 초점을 하늘에 두고 기도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서 그렇게 살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살므로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이 비망록에 비추어 점검해 보십시다. 용서와 원수사랑이 나에게 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살아가며 거기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빛살에 자신을 덥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영의 양식으로 풍요하게 채우며 사십니까?... 이제 자기진단은 끝나셨을 겁니다. 이제 어떻게 사시렵니까?...
스데반처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성공인생, 승리인생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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