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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식사의 규례/ 레 7: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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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식사의 규례(레 7:15-21)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함께 예배하고 성만찬을 떼고 사랑의 교제를 하는 신앙 공동체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함께 성만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식사는 세상에서 여럿이 모여 공동으로 식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령 잔치나 친목계를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 식사를 합니다. 어떤 목적으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모임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이런 식사와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피 공로를 믿으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고백한 성도들이 함께 하는 식사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베푸신 거룩한 만찬입니다. 우리는 이 식사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는 성도답게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 살 때에도 교회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화목 제사를 드린 후에 나누는 거룩한 식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화목제는 제사장과 바친 자가 함께 제물을 나눠 먹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 번제나 소제, 속죄제, 속건제 같은 제사는 제사장만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목제에서도 정결법 상 부정케 된 자는 제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항상 성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더럽고 추한 인간이 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과 화해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제사 제도를 주셨는데, 부정한 몸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나누는 식사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 날에만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5절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당일에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즐기며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이 감사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과거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기대하는 심리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기심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를 드리고 나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이 기쁨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습니다. 곧 은혜를 알고 감사한 사람만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마친 후, 성도간에 서로 안부를 묻고 교제를 할 때에 그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이보다 더 거룩하고 기쁜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예배에 참여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날에만 먹으라고 하는 것은 감사제에 참여한 사람들만 나누라는 뜻입니다. 사실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분위기 파악이 안되므로, 그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언젠가 교우들과 함께 금요 심야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뜨겁게 찬송하고 뜨겁게 기도 할 때,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아 얼굴들이 환하고, 기분들이 좋았습니다. 은혜 가운데 기도회가 마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 끝난 후에 들어오더니만 좋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은혜 받은 분위기는 깨지고 교우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참석하니, 은혜의 자리가 불평의 자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자리에 그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여한다면 그 제사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감사제를 드리고 남은 고기는 그날에만 먹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제사는 은혜의 자리에 참석한 사람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자리보다 은혜의 자리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해도 다 저물어 연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세속적인 자리보다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여 마지막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마지막 정리가 잘 되어야 새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설사 금년 일년을 살면서 부족함이 있었다고 해도 연말을 잘 보내면 크게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여 경건하게 한해를 마무리 하기 바랍니다.
당일에 나오는 제물을 가지고 기뻐하기 위해서 은혜의 자리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감사제에 참석한 사람들만 제물을 먹으라고 규정한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서원제나 자원제는 제사를 드리고 남은 제물을 이튿날에도 먹도록 하였습니다.
본문 16절에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으라'고 했습니다.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으라는 것입니다. 화목제와는 다릅니다. 이렇게 하루의 여유를 더 준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가난한 자나 불쌍한 이웃, 또는 친구 등을 거룩한 식사에 초대하여 함께 나누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서원제나 자원제의 식사는 감사제와 같이 제사를 드린 사람들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식사가 주는 교훈은 모든 사람들을 염두 해 두고 살으라는 것입니다.
감사제의 식사와는 달리 이웃도 관심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평안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배부르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부른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늘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으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교훈을 많이 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봉사하고 충성한다 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를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사랑도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자들은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돌보지 않은 자는 예비 된 지옥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무서운 경고를 주는 말씀입니다. 주변에 있는 불쌍한 이웃들을 관심 하지 않으면 지옥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웃들을 관심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연말에는 불우 이웃들을 관심 해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 먹고 입고 살집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는가 찾아보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고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는다면 언제나 소외된 이웃들을 관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제나 자원제는 제사를 드리고 남은 제물을 이튿날에도 먹도록 하신 의미를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제 3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르라고 했습니다. 본문 17절에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라고 했고, 그리고 19절에도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제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 3일을 넘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웃을 위한 배려도 있지만, 제물이 부패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더운 지방에서 고기는 이틀이 지나게 되면 부패하기 시작하여 제 3일에는 비위에 거슬리게까지 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부패하고 상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일 째까지 남은 제물의 고기는 남김없이 모두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속화되거나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잘못하면 제물이 더러워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거룩한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제물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 거룩한 몸을 친히 십자가에 내놓고 어린양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와서 예배하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잘못하면 거룩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깨끗한 제물인데 어떻게 더러워질 수 있는가' 라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한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주님이 더러워집니다. 한 지체라도 더러워지면 몸 전체가 더러워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식이 잘못하여 부모의 이름을 더럽히듯이, 우리의 잘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더러워져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또 다시 죄를 범하고 더러워진다면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욕을 돌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죄 가운데 빠져 사는 우리들 때문에 골고다 언덕에서 처절하게 피를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죄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희생을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세월이 오래 되어 믿음이 장성했다면 주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신 주님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물의 소중함을 아시기에 제물이 부패하고 상하지 않도록 조치를 하셨습니다. 3일 째까지 남은 제물의 고기는 남김없이 모두 불에 태우라고 말입니다.
부정한 것은 불사르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기간 이후까지 남은 고기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된 고기는 부정하므로 먹지 말고 불사르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된 성도가 더럽혀 지기 때문에 불에 태워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한 번 부정해지는 것이 어렵지, 한번만 부정해 지면 그 다음부터는 빠른 시간에 완전히 부정해지고 맙니다.
부정한 죄는 조금씩 인간을 파고 조금이라도 들어와 거룩한 양심을 내어 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도의 생명은 성결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것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러워지고 부정해지는 것을 엄중히 금하시며, 오직 깨끗한 것만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결한 자만 먹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부정해지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 참여할 자는 항상 자신을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설사 자신이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부정한 것과 접촉되면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정결법 상 부정한 자로 간주된 자, 즉 유출 병자, 생리 중인 여자, 문둥병자, 시체와 접촉한 자 등은 화목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구별하여 성결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 2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성결하지 못하여 죄 가운데 살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거룩한 제물을 먹으려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고전 11:29절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자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일 때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 성결하게 살다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를 짓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절대로 더럽고 추하고 부정한 모습으로는 안됩니다. 21절에 보면 이런 사람이 제물을 먹는데 참여하면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백성의 무리에서 끊쳐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제물은 거룩한 성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더럽고 추하고 부정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동네에서 친구간에 불미스러운 일로 심하게 싸우고 서로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말도 않고 살았습니다. 그 충격으로 한 사람이 시름시름 앓더니만 죽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자 다른 사람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가 죽인 것처럼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나마 용서를 빌기 위하여 문상을 갔는데, 그 집안 식구들이 노발대발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문상을 오느냐며 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초상 자리에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고인을 죽인 원수가 나타납니까? 백배 사죄하고 발이 손이 되도록 빌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부정해서 되겠습니까? 절대로 부정한 몸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꼭 자기를 깨끗케 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와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또 그런 사람만 예배에 참석해서 기쁨을 맛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영육간에 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정결해야 교회가 정결하고, 모든 지체도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식사의 규례가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함께 즐겁게 먹어야 하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거룩한 제물이 속화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나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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