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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 사 62:10~12 (히 1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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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본문 : 이사야 62:10~12 (히브리서 11:27~32 참조) 

 
  대림절, 즉 기다림의 절기가 점점 깊어 가고 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12월은 우리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다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보면 하루를 표현함에 있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이 약간 어색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침을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하고 저녁을 그 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 아니고 그 아침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저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녁과 밤이 아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다림은 그냥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좋은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기다림이란 이미 새 날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새 날을 기다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 기다림의 시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잠시 한 그루의 잘 자란 나무를 마음 속에 그려 봅시다.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해 봅시다. 그 나무의 뿌리가 다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나무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나무는 위로 높이 자라는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무는 위로 자라기 전에 먼저 밑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만약에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위로만 자란다면 그 나무는 매우 위험합니다. 준비가 없는 횡재는 오히려 재앙이 되기 쉽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초가 튼튼치 못한 성장은 도리어 화가 됩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태풍이 오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뿌리가 우선입니다. 콩나물도 뿌리부터 먼저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생명의 순서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그 광야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넣은 언약궤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카시아 나무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그토록 잘 자라는 비결은 어디 있을까요? 바로 뿌리입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뿌리를 깊이 그리고 멀리까지 뻗습니다. 위로 자란 것보다 몇 배 멀리까지 뿌리를 뻗습니다. 과연 거룩한 십계명을 보관하는 언약궤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나무의 생명과 성장의 비결이 뿌리에 있다면 성숙한 신앙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올바른 기다림이 아닐까요?

  특별히 고난의 역사를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기다림의 예언자, 혹은 소망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종종 나무를 소재로 기다림과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야를 ‘여호와의 싹’(사 4:2),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사 11:1)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싹이 어디로부터 난다고 했습니까? 나무를 자르면 그 윗부분은 사라지고 그러터기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루터기는 뿌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것은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뿌리가 그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참으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첫째,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약속을 신뢰할 수 없으면 결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벨부터 시작해서 에녹, 그리고 노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 오직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믿음으로 아들을 얻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어디 그들뿐입니까?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 기드온, 삼손, 사무엘 그 밖의 예언자들도 오직 약속만을 믿고 온갖 수치와 모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계보를 따라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믿음의 계보에서 특히 모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고난을 애굽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부와 명성과 권세를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까? 그는 그 모든 것이 일시적이요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과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약속을 믿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향해서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모세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오직 약속만을 믿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외치지 않습니까?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시온의 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어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다림은 그냥 앉아서 저절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요행수를 꿈꾸는 것과도 다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성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성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심부름을 보낸 종이 돌아올 때를 앉아서 기다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자, 우리의 주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는 백성들을 이끌고 오시는 그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걸림돌을 치우고 깃발을 높이 올려서 누구라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그 길을 준비하라고 그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문 밖으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외쳤던 그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고 그는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 안에 있는 사람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절규와도 같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애써 듣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주하고 있는 체제와 제도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소리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과연 합법적인 예언자인가 하는 것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입니다. “넌 누구냐?” “어디 출신이냐?” “어느 계파에 속했느냐?” 다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습니까? 그가 무슨 자격으로 떠들고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 1:22) 그 때 비로소 세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었으면 자신의 정체를 밝혔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나 그 직함에 관심을 갖지 말고 지금 그가 온 몸으로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좀 들어보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광야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체제 안에 머무는 한 바깥의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제사장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서 네가 왜 세례를 베푸느냐?” 그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은 체제와 제도라는 담장 안에 갇혀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밤이 지나면 새벽이 밝아오게 마련입니다. 극히 절망적인 이 상황이 결코 끝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 날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슴 설레이는 기다림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주님이 이미 문 앞에 오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올바르게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기다립시다! 행여나 세상과 타협하지 맙시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의 길을 준비합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갑시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여러분에게 그 주님은 곧 오셔서 썩지 않고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으로 상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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