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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욕을 버리라 / 시 1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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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버리라
본문: 시119: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옛날에 네 사람이 모여 서로의 "희망사항"에 대해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는 황금 만 돈을 가졌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라고 탄식하듯 중얼거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돈만 아는 사람 같으니라구. 나는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돈이고 뭐고 나는 열 고을 정도 다스리는 대감이 되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황금 만 돈을 지니고, 학을 타고 날아 먼 곳에 가서 열 고을을 다스리고 싶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혜택을 받을수록 이상스럽게 사회악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인간은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이나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려는 등 소유욕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성장할수록 물욕이나 명예욕 등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것을 봅니다. 심할 경우 사람들은 불의한 방법을 동원, 자신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잠10:2-3)하였습니다. 즉 불의한 재물의 결국은 무익하고 죄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재물의 특성과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불의한 재물이란 부정하게 획득한 재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경영하는 일 혹은 수입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퇴폐업소를 경영한다거나 형제 자매들을 죽음에 이끄는 악한 일에 동참해 얻는 대가는 불의의 삯에 해당합니다.
둘째, 수고 없이 얻어진 재물입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 뇌물수수, 복권 등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박에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고 없이 순식간에 얻어지는 재물을 불의의 재물로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불의한 재물의 결국은 죄와 사망입니다. 알베르 까뮈가 쓴 희곡 "오해"라는 작품에 보면 유럽 어떤 곳에 모녀가 여인숙을 차리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시달린 두 모녀는 어느 날부터 인가 남모르게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여인숙을 찾아오는 손님 중, 혼자이거나 부유한 인상의 사람만을 골라 독약을 먹이고 보따리를 턴 후 시체는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밤 한 청년이 그 여인숙을 찾아듭니다. 그는 오래전 집을 떠났던 아들이며 오빠인 쟝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쟝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나 행복하게 해주려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와 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 여인숙에 투숙하게 됩니다. 두 모녀는 그를 죽이기 위해 독약을 타면서 딸 "마르타"는 독백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문을 열어줄 바로 그 돈 때문에 살인을 하는 거야" 그러나 보따리 속의 신분증을 보고 나서야 그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쟝임을 확인했을 때, 두 모녀의 절망은 죽음 그것과 같았습니다. 결국 쟝의 모친은 아들의 시체를 버린 그 강에 투신 자살을 하고 그 딸 마르타도 "범죄란 그것을 위해 비록 천명이 함께 협력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불행할 뿐이다"라고 독백하고 죽음을 택합니다. 돈이 불행한 자신들에게 행복과 사랑의 문을 열어 줄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데서, 끔찍한 범죄를 계속했으며 결국 얻은 것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과 성공하여 돌아온 아들의 살인과 자신들의 죽음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재물을 많이 획득하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어떤 방법으로 획득했으며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불의의 재물인지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성도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쌓아놓는 부자가 아니라 나눔을 통해 풍성하게 채움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물들은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사자의 경우 자기의 배가 부른데 사냥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로 앞에 영양이 돌아다녀도 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정당한 욕구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결국엔 탐심이 자신을 죽게 만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탐심으로 인해 올라가는 것 같지만, 결국엔 탐심이 우리를 추락하게 만들 것입니다. 모든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돈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딤전6:10).
탐심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하고 헬라 원어로 '더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탐심은 큰 죄입니다. 이 탐심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악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탐심은 '만 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심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도적질도 합니다. 이 탐심 때문에 남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죄를 짓고, 탐심 때문에 심지어는 살인도 합니다. 성경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하였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골3:5)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눅12:15)
탐욕자의 결과는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자기 생명을 잃게 됩니다.
빈대 네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몸집이 너무 작은 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루는 신(神)이 빈대들에게 새해 소원을 각각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네 소원이 뭐니?”“네, 저는 몸집이 작아 힘이 약해요. 그러니 힘이 센 소가 되고 싶어요.”“그래? 그럼 소가 되어라.” 그러자 빈대는 소원대로 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네, 저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싶어요.”“그럼 너는 새가 되렴.” 세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네, 저는 배고픈 건 견딜 수 없어요. 그러니 굶지 않고 매일 음식을 뒤져 먹을 수 있는 쥐가 되게 해주세요.”“그럼, 너는 쥐가 되거라.” 세 번째 빈대도 소원대로 쥐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네 번째 빈대는 살그머니 욕심이 생겼습니다.‘어차피 원하는 대로 다 받는다면야 실컷 구해봐야지.’ 그는 신께 대답했습니다.“신이여 저는 소처럼 힘도 세고요, 새처럼 하늘도 날고요, 쥐처럼 굶지도 않는 그런 것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신은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그럼 소새쥐가 되어라.” 네 번째 빈대는 즉시 ‘소새쥐’ 아닌 ‘소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욕심은 자기분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위장병이 있는 것은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과식하고 위장병을 덤으로 받습니다. 자기분수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욕심을 과식하면 탈이 납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1:19)
둘째, 신앙 생활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어느 장사꾼이 호수가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 이상한 고기를 낚았습니다. 그 고기는 금빛 색깔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고기가 낚시꾼에게 말을 했습니다. "제발 저를 다시 물 속에 넣어 살려주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소원을 세 가지 들어 드리겠어요. 낚시꾼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기가 다시 애원하기에 대답했습니다. "소원을 셋이 아니라 다섯 가지를 들어주면 너를 살려주마" 그러자 고기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저는 세 가지 소원밖에는 들어줄 수가 없답니다." 그러자 낚시꾼은 흥정하듯 말했습니다. "그럼 네 가지 반만 들어다오." 고기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셋 밖에는..." "좋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타협하면 어떻겠니?" 이렇게 낚시꾼은 제안했습니다. 고기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는 뱃바닥에 숨이 끊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탐심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악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탐심은 '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심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도적질도 합니다. 이 탐심 때문에 남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죄를 짓고, 탐심 때문에 심지어는 살인도 합니다. 성경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 10)
셋째, 저주의 자식이 됩니다.(딤전6:7-8)
목사님이 임종을 앞둔 노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세 번씩이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그 사람은 자기 손을 내밀기를 거절했습니다. 최후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이불을 걷어 내렸을 때에 발견한 것은 결사적으로 금고열쇠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었습니다. 그가 목사에게 손을 내 밀 수가 없었던 이유는 그는 금고열쇠를 움켜쥔 손을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4)
넷째, 다툼을 일으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2)
깊은 산 오솔길 옆 조그마한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붕어들은 서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저 녀석만 없다면 내가 이 연못을 독차지할 수 있을 텐데..."
어느 날 붕어들은 심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며칠 후 상처를 입은 붕어 한 마리가 하얀 배를 물위에 드러냈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붕어는 너무 통쾌했습니다. "이제 내 세상이다. 이 연못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런데 그 날부터 연못은 죽은 붕어가 내뿜는 독으로 오염돼 갔습니다. 죽은 붕어의 몸이 썩으면서 연못의 물도 썩어갔습니다. 썩은 물을 먹은 붕어도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연못에는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다섯째, 자기 집을 해롭게 합니다.
고대 리디아의 마이더스 왕은 황금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신에게 무엇이든지 손에 닿는 것은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일에 미칠 듯이 기뻐하며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녁 식사 때 음식은 황금으로 변하고, 그의 사랑하는 딸도 황금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잠15:27)
여섯째, 여호와를 배반하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 단의 회계 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탐욕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행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 비싸고 순수한 나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 아니하였으냐" 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은 삼십에 바꾼 사람도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불의한 재물에 대한 죄로 괴로워하다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가룟 유다는 탐욕으로 인해 신앙과 양심을 저버린 인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시10:3)
일곱째, 장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는 노획물들을 모두 모와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통치자는 탐심이 가득하여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유용하며,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폭력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므로 민심을 잃고, 항상 암살과 반역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며,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악명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탐욕을 갖지 않고 청렴하게 살며 사심 없이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백성들을 따르므로 장구히 통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28:16 )
여덟째, 도적질하게 되고 패망하게 됩니다.
탐욕으로 멸망한 사람이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아간입니다. 그는 여리고 성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이 다시 아이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자기의 장막에 감춰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싸움에서 패배케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는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 앞에 바쳐진 물건을 취하여 동족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간은 그 아들들과 딸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치고 불살라 처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홉째, 살인하게 되고 심판을 받습니다.(왕상21:13)
성경에 나타난 탐욕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합 왕입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습니다. 그는 나봇이 조상의 유업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의 원리를 알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근심을 안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충동했습니다. 이세벨은 왕권을 사용하여 거짓 증거를 꾸며서 나봇을 잔인하게 살인하였습니다. 이세벨은 나봇의 죽음을 즉시 아합에게 알렸습니다. 아합은 기뻐하며 즉시 나봇의 포도원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들은 악을 행하는 데 그렇게 신속하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 결국 이세벨은 예후의 손에 처참히 죽어 개에게 먹히 운바 되었고(왕하9:30-37), 또아합의 아들 요람도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가 나봇의 밭에 던지워졌습니다. 아합과 그 가족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심판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아합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지적하며, 동시에 이세벨의 충동이 죄를 짓게 한 동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주 교활하게 성도를 유혹하고 탐욕의 포로가 되어 죄를 범하게 합니다. 성도가 죄를 이기려면 성령으로 육체의 소욕과 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하는 사탄의 세력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사탄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열 번째,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옛날, 전기불도 시계도 귀한 때였습니다. 열심히 마음잡고 새벽기도하기로 다짐한 젊은 여집사님이 장날 읍내에 있는 시장에서 잘 우는 닭 한 마리를 샀습니다. 몇 번이나 시험해본 후라 안심하고 내일 새벽부터 닭이 울면 새벽기도 나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동창이 훤히 밝았는데 닭은 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장날까지 기다렸다 닭 장사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닭 진짜 안 울데예, 우예된 일 입니꺼...?” 여집사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닭 장사는 몇 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닭장은 지어줬습니까?” “예” “닭에게 모이는 배불리 줬습니까?” “아~ 예”
그럼 “닭장에 수탁 한 마리도 같이 넣어 줬습니까?” “예, 전부다 해줬습니다.”그 소리를 듣자 닭장사는 “아, 여보시요. 닭이, 집 있겠다. 배부르겠다 거기에다 남편까지 있는데 뭐가 답답해서 새벽마다 빽빽 울겠소.”
우린 신앙생활 하면서 어렵고 힘들고 병들었을 때 “나는 지금 시험 중”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시험은 약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강할 때 찾아옵니다. 병들었을 때 보다 건강할 때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고 예수님도 40일 금식 기도 후 영발이 최고 강할 때 사탄이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12절 말씀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마음이 부유하고 탐욕이 가득한 자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신7:25)
열한 번째, 고독과 불안과 절망이 찾아옵니다.
사막 한복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밑에선 샘물이 솟았고 그 샘물은 사막에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주인에게 돈을 주고 샘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샘터를 돌아보던 주인은 커다란 나무가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주인은 나무가 머금은 물까지 탐이 나서 나무를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가 머금고 있던 물이 샘물에 고이면 그만큼 장사가 더 잘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샘물은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햇볕을 가려주고 모래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가 사라진 샘에서 물이 솟아날 까닭이 없었습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나무를 베어버린 그 욕심꾸러기 주인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처럼, 될 수 있으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생활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독과 불안과 절망입니다. 탐심과 탐욕을 경계합시다.
중세 어느 수도승이 길을 가다 큰 진주알이 두 개나 든 보따리를 발견하고 강 가에서 묵상 중인 스승에게 달려가 호들갑을 떨며 진주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제자는 "진주라니까요"라며 스승의 손바닥에 이 "횡재"를 올려놓았습니다. 스승은 진주 한 개를 들어 강물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제자는 "어디다 던지셨습니까. 잠수라도 해서 찾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나머지 한 개를 강물에 툭 던지며 말했습니다. "바로 저길세"
성경에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28:16)하였고,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하였습니다. 논밭은 잡초 때문에, 사람은 탐욕 때문에 손해를 봅니다. 황새는 매우 오래삽니다. 그 이유는 황새는 욕심이 없는 새여서 절대로 과식, 과욕이 없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아무리 줘도 양만큼 먹고는 그 이상은 안 먹는다고 합니다. 식사절제는 사람에게도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경건 생활에서도 이렇게 절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을 비롯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러한 절제 속에서 아름답게 살아갔습니다. 오늘도 절제 있는 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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