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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 창조의 시작 / 렘 23:5-8, 계 5:11~14, 눅 1:6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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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창조의 시작 / 렘 23:5-8, 계 5:11~14, 눅 1:67-79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서 23:5 ~ 8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 5:11 ~ 14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그들은 큰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마땅히 받으실 만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67 ~ 79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권능의 구원자를 당신의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아기야,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먼저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분은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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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의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보라색으로 장식하고서 회개하고 마음을 비우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회개하는 심정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부터 회개하는 심정으로 아기 예수로 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다.

예수께서 구세주로 오시는 것, 이것을 성서는 제2의 창조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창조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창세기 1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를 거닐고 있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혼돈과 공허란 말은 아무런 형체도 없고 황량할 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의 말로 얘기하면 땅은 카오스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무가치했습니다.

그 혼돈 속에서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물과 뭍의 경계를 세우시며 만물을 만드셔서, 천지에 질서와 생명이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그 만물 중에 가장 고귀한 것, 하나님을 형상을 닮게 만드신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닌 피조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만물과 인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참 좋다.” 하나님은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또다시 새롭게 창조되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후 인간은 너무나 많은 죄를 저질러서 타락하고 부패했고,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온 천지 만물의 조화도 깨어져 퇴락의 행로를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말씀하셨던 ‘참 좋다’는 자기 고백을 갱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다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구약본문인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겠는데, 먼저 사람을 새롭게 만들겠다.” 처음 창조 때는 모든 것이 혼돈과 공허 속에 있었지만, 두 번째 창조 때에는 세계도 있고 천지만물도 있고 인간도 있고 역사도 있으니, 그것들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창조를 위해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메시아가 태어나는데 어디서 태어나는가 하면, 다윗 왕의 가문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리는 다윗 왕가의 한 가지에서 한 사람이 태어날 텐데, 그 사람의 이름은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처음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만물을 만드셨지만, 두 번째 창조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세상 속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분이 오시면 타락한 이스라엘을, 타락한 이 세계를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만방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만민의 구세주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지금까지의 괴로운 삶은 청산되고 모든 백성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과 역사적 약속을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십니다.

예언대로 예수라는 분은 다윗 왕가에서 태어났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를 보내실 때, 하나님은 그냥 구세주만 홀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시기 전에 구세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을 미리 보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사가랴의 이야기입니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데, 그의 직업은 제사장이었고, 아내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와서 이런 예언을 합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아들을 낳게 하겠다.” 그런데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사가랴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제와 제 아내가 이미 임신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했다가 벙어리가 됩니다. 온전히 믿지 않은 탓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소위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그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제사장이 벙어리가 되었으므로 성전 예배를 집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인간이 거부하면 제사장의 입까지도 봉해진다는 말씀에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분의 일을 의심하면 인간은 벙어리가 됩니다. 인간의 벙어리 됨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사가랴의 입은 세례 요한이 태어나고서야 비로소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도 이렇게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준비하십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탄 절기에도 우리 가운데 구세주가 태어나게 하실 텐데, 그 구세주의 길을 예비할 예언자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세례 요한과 같은 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을 세례 요한처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나이와 상관없이, 신분과 상관없이, 국적이나 모든 것과 상관없이, 메시아를 예비하는 예비자로 우리를 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겠냐고 하나님께 저항한다면, 오늘부터 여러분은 벙어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때까지 벙어리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성탄 전에 그걸 각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 마음껏 소리쳐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약속을 주시고, 원수의 손에서 건져서 두려움 없이 살게 해주실 것입니다. 평생 동안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런 복을 받고 싶으시면,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십시오.

세례 요한이 태어나자 그 아버지 사가랴가 입이 열려 축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한 자식을 주셔서 만민의 구세주를 예비할 자로 세우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의 아들 요한아, 복을 받을지어다. 네가 예비할 네 뒤에 오시는 메시아에게는 더 큰 복이 있을지어다.” 일종의 축복송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사가랴의 예언의 시를 축복의 노래, 축복의 기도, 베네딕투스(benedictus)라고 합니다. 베네딕투스, 축복의 노래!

사가랴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으니, 그 이름을 사가랴 2세라고 짓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천사는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으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지만, 사가랴의 성을 따르지 못합니다.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에 앞서 온 길잡이의 이름은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모 둘은 세례 요한을 낳는 도구로 이미 충분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가랴의 축복 시 속에서 사실은 누가 복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칭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례 요한을 잉태한 어머니,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범하고 있는 중대한 범죄 하나를 제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범죄라고까지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회개해야 할 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1월 12일 신문 보도 그대로입니다. 낮 11시에 어느 신학대학원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800여 명이 참석한 예배인데, 그 교단의 총회장이 설교를 하는 가운데 문제의 발언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교단이 여자 목사, 여자 장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리 교단은 안돼. 그게 진정한 보수고 그게 성경적이고 그게 신학에 맞는 거야. 여자들이 기저귀차고 강단에 올라가면 안돼.” 설교가 끝난 다음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여러 여성단체들도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 목사님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목사님이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냈습니다. “지난번 대학교 채플 시간에 설교한 내용 중에,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는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적절치 않은 표현으로 학생 여러분께 상처를 끼치게 되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과합니다.”

요한을 낳을 수는 있었던 엘리사벳은 하나님께 강단에서 찬양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축복송은 사가랴만 부를 수 있고 엘리사벳은 부를 수 없는 것입니까?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온데간데없고 요셉만 칭송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차별 없이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차별 철폐에 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하나님의 평등한 창조질서를 이렇게 훼방해서야 되겠습니까? 21세기에 이런 얘기 듣는 것이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지만,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구세주가 임하시면 이런 일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는 메시아가 다윗 왕가, 엄청나게 높은 신분의 가계에서 태어날 것이고, 그 메시아의 길을 제사장의 아들이 나와서 맞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읽은 서신서 본문 요한계시록에는 전혀 다른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요한이 본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왕가에서 태어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 제자 요한의 눈에는 메시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올 때는 왕의 모습이었으나, 인간 세상에 와서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그분의 모습은 왕이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이 이렇게 외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분에게 모든 권세와 모든 부와 모든 지혜와 모든 힘과 모든 존귀와 모든 영광과 모든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자 모든 생물들이 화답합니다. “아멘.”

하늘이 땅에 와서 어린양처럼 도살당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사람들이 모욕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다고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메시아의 출신만 언급했고, 요한계시록은 메시아의 마지막 운명을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둘째 창조의 시작과 끝입니다.

저는 이 두 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서 꿈을 품고 비전을 보며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하늘의 희망이 왕처럼 빛나고 높고 힘 있는 분이 우리한테 오십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우리 가운데 와서는 도살장의 어린양 같은 모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희망으로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왕적인 모습일 수 있는가 하면, 도살장의 어린양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당당하고 건강한 모습인가 하면,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아픈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찬란한 출세를 바랐지만 아주 비참한 구덩이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왕에서 어린양의 모습까지, 하늘에서 땅까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모습이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도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알고 여러분은 구세주를 맞이하십시오.

그러나 오늘 사가랴를 통해서 주신 말씀, 요한계시록을 통해 주신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비록 어린양의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갈 운명의 예수이기는 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셔서 모든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여러분 살면서 고통도 많으시지요? 어린양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고통을 견디어 보십시다. 죽을 고비를 넘고 또 넘어 살아야 할 운명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참아보십시다. 왜 견디고, 왜 참아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늘의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두 번째 창조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가 끝나면,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세 번째 창조를 기다립니다.

대림절은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그 나라를, 신앙의 눈으로 미래라고 합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미래이므로 우리가 만든 미래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미래를 “아드벤트”(advent)의 미래라고 합니다. 대림절을 그래서 “아드벤트”라고 부릅니다. 그 미래는 우리가 만든 후트룸(?)이라고 하는 미래와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만드는 미래와 하나님의 미래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드는 내일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통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심은 이 세상을 완전히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인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의와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이 임함으로써 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래는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 속에 하나님의 미래가 임할 수 있어야 인간의 미래는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이 다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오셔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쟁의 공포와 참상으로 세상에 신음소리가 서려 있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평화의 미래가 찾아와야 합니다. 이라크에도, 중동에도, 아프카니스탄에도 이 땅에도. 그리고 고생하며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가 찾아오면, 그들이 위로를 받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제3의 창조주가 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을, 우리는 준비하며 맞이하십시다.

그분을 맞이하는 길은 하나님의 미래는 내가 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임하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도살장의 어린양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서 부활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 하나를 붙잡고 오늘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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