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것 (엡 1:5)

  • 잡초 잡초
  • 1597
  • 0

첨부 1



  본문  에베소서 1:5 
  제목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것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울산교회 11월은 전교인 출석의 달이요 오늘은 전교인 출석주일이요 전 교인이 택시 타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협조를 잘 해주셔서 주차장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400명 정도 협력이 될 건가 생각을 했더니 1,2부에 벌써 400명 협력이 되어서 오늘 새로운 시작을 한 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배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살폈습니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존재 이유인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인 출석의 달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란 무엇인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 시작하면서 사도신경을 외웠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우리가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믿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 삼위 하나님을 우리가 인격적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우리가 알고 믿고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전교인 출석의 달 마지막 예배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의 의미를 살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첫 번째 목적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중요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첫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뇨?” 라고 묻고 그 답으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해볼까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생의 첫 번째 목적인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두 번째 목적을 살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 두신 두 번째 이유는 여러분을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많은 자녀들을 이끌어 들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히 2:10 표준새번역)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을 갖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산 이후로 요즈음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식구들을 당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는데 요새는 적게 낳는 것이 더 축복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착각을 한 대가를 여러분이 나이 많고 일할 수 없고 병  들게 되면 다 보응 받을 것입니다. 힘들지요? 자녀 낳아서 키우려고 하면 힘듭니다.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많은 자녀들이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만드시고 여러분이 그 구성원 되게 지으셨습니다. 영원히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만드셨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의 아들들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1:5)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되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 서로 사이에 촌수가 어떻게 되지요? 서로 형제간 아닙니까? 복음이 처음 전해질때 우리 한국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지 압니까? “너희 예수믿는 사람들은 촌수가 왜 그러냐? 할아버지도 하나님보고 아버지 그러고 아버지도 아버지 그러고 너도 아버지라 그러니 도대체 너희 촌수는 왜 그러냐”고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이해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될 때 우리는 서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함께 보낼 신앙의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의 형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왜 우리는 믿음의 식구들을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 때문에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갈 수가 있습니다. 닮아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그 심정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잘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영원을 보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도착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요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땅위에서 우리가 그 연습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신앙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을 일컬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교제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자기 딸뻘밖에 안되는 여자를 사귀는 것을 보고 교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죄악입니다.  우리의 삶의 두 번째 목적은 교제하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데 있습니다. 교제라는 단어는 예배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자주 오해를 합니다.

교제란 하나님의 권속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주께로 받은 계명입니다.

교회란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란 단체도 아니고 사교모임도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가족입니다. 건물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고 바로 여러분이 속한 가족을 일컬어서 교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있는 이 건물은 교회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저쪽 큰 건물은 거기서 주로 교육을 하니까 교육관이라고 부릅니다. 울산교회라고 하면 이 건물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 자신이고 여러분이 함께 모였을 때 거기를 일컬어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기 때문에 함께 속한 가족관계를 일컬어서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데도 몇 가지 단계는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혼자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듯이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배우자가 꼭 필요합니다. 특별히 빼어나게 잘 생겼던지 능력이 있든지를 떠나서 배우자가 있어야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그런 농담을 하지요? 자기는 결혼할 날짜도 정해놓고 주례 봐줄 사람도 정하고 장소도 다 정해놓았는데 사소한 것이 하나 없어서 못한다고. 그래요 사소한 것 하나 빠지면 못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있어야 됩니다. 같이 결혼 해줄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결혼하기 위해서 배우자가 꼭 필요하듯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동료신자가 필요합니다. 옆 사람과 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좀더 크게 한번 해봅시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기가 속할 교회를 정해서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단계입니다. 떠돌이는 어느 가정의 식구가 될 수도 없고 어느 교회의 교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한 주일은 이 교회에, 다른 주일은 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주님이 바라시는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이라도 자기가 속할 교회를 정하셔야 합니다. 꼭 울산교회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어느 교회에든지 속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교회를 선택해서 등록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어느 교회든지 여러분이 선택해서 소속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9 표준새번역). 신자라고 하면서 어느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고아와 같습니다. 제발 이제는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롬 12:5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를 가족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부된 교회를 험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몸된 교회를 위해서, 신부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속하고 그 일원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울산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새 가족 과정을 이수해야 됩니다. 교회를 처음으로 나오시는 분은 5주간 동안 이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그동안 잘 해 오신 분은 몇 시간의 집중 과정을 통해서 교인 서약서를 쓰고 울산교회 교인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의식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의식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음으로 주께 헌신하는 삶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세례를 통해서 여러분 각 사람은 “나는 신자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세상을 향해 밝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공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포한 새로운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례와 함께 옛사람은 물아 잠가버리고 거기서 올라 올 때 새롭게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져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을 떨어뜨려서 하는 세례보다도 침례가 더 상징성이 분명할 것 같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두 번째 단계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서로 나누는 것을 배우길 원합니다. 앞 단계를 교인되기라고 부른다면 두 번째 단계는 우정나누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친구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삼위 하나님이 함께 공존하듯이 시간 전부터 영원한 세월에 이르기까지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서로 교제하면서 살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 받은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방식이 관계적입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마지막 가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아담을 보시고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통한 교제만을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하든 안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 모두가 교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중시하십시오. 사람 사이에 살아야 사람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도록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인생길을 홀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친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가끔 신앙의 교제 권에서부터 떨어져서 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넘어뜨리려는 원수의 꾀임 입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행 2:44 표준새번역)

함께 지내는 것과 함께 나누는 것은 교제에 있어 중요합니다. 함께 만나는 것과 서로 나누는 것은 깊은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만나지 않고 우정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눔이 없이 우정을 다져갈 수가 없습니다. 자주 만나야 관계가 깊어집니다. 우정을 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8년 전에 울산교회에 부임해서 제가 아주 힘들었던게 하나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긴 했지만 가끔 조용한 시간이 오면 누군가 친구가 필요한데 선뜻 찾아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천명의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사입니다. 목사도 친구가 필요하잖아요? 그렇다고 어떤 교인들을 계속해서 매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한번 더 만나려고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마치 줄을 서 있는 것처럼 나한테 마음의 부담이 됩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 또 만나는 것 보다는 안 만난 사람 만나야 되니까 산다는 것이 마치 뷔페 음식점에 가서 음식 먹는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만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그러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또 젓가락질 하고 또 된장국도 또 떠먹고 그러지요? 같이 자주 만나야 교제가 깊어져 나가는데 조금씩만 만나고 말면 얼마나 그것이 피플형 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일인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유치원 때부터 경노대학까지 친구로 지낸다면 대단한 행운처럼 말하지만 결코 행운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선택한 것입니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친구로 남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로워하는 이유는 관계를 만드는 데에 시간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우정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현대인은 일하기에 바빠서 사람사귈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업적 만들기에 바빠서 관계 만들기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되면 떠날 인사를 나눌 친구들이 다 어디 있는지를 두리번거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관계를 만드는 것은 선택사항이지 우연지사가 아닙니다. 바쁘지만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꼭 가지십시오. 인생살이에 일이 손에서 떨어지는 날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인생이 끝날 뿐입니다. 시간을 들여서 관계 만들기를 하십시오.

또한 무언가를 나누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동생들과 아니면 친구들과 나누는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근본적인 자녀교육 항목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어릴 때부터 배웠는데도 어른이 되어도 다 못 배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신자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나누는 것이 서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서로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믿지 않은 이웃들과도 나누어야 합니다. 움켜쥐고 외톨이로서 신앙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우리는 나눌 수 있을까요? 세 가지만 집어봅시다.

1.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나눌 때에 우리는 성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이웃과 부딪쳐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 27:17 표준새번역) 개혁성경은 이렇게 말하지요? “철이 철을 단련하는 것처럼 친구가 그 사람을 연단시킨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 들어보셨죠?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럽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은 더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훨씬 덜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수를 자신이 다 해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도록 그냥 하십시오. 

자기 자신이 시련을 겪고 잘못을 경험해서 배우려고 드는 것은 인생을 아주 고달프게 살기로 작심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개인경험을 통해서 배우려들면 다 배우고 나면 어쩌면 임종 시간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성숙에 이르는 지름길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간접 경험을 넓혀가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함께 어울려서 경험을 서로 나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저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신앙이 여러분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하기엔 인생이란 너무 짧습니다.

사람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에 따라서 사람마다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알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른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어울린다면 서로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경험을 나눌 때에 서로 자라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정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9절을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서로서로 가정을 여십시오.” 나눌 수 있는 두 번째의 것 가정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모임에서는 교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그룹이어야 교제가 쉽게 됩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기에 좋습니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예배의 열기가 더 뜨거워 질 수 있습니다. 축제의 분위기가 납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의 자리에서는 서로 교제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100명 모아서 구역장 모임을 하면 어떤 문제는 ‘서로 나눕시다 ’그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세 사람씩 앉은 대로 구역장끼리 나누도록 하면 잘 나눕니다. 3분씩만 나누도록 해도 5분가도록 까지도 나누는데 많은 물소리와 같이 열심히 나눕니다. 그러다가 이제 나눈 것 가지고 누군가 발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때부터는 조용해져요. 조용해질 뿐만 아니라 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나하고 시선이 부딪히면 앞에 나와 시킬까봐서요. 왜? 100명 앞에, 몇 십명 앞에 서면 나눈다고 하는 게 쉽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한 대 여섯명이 함께 만나면 약간 숫기가 없는 사람들도 같이 어울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하기에는 이렇게 대가족으로 모여야 됩니다. 그러나 교제를 나누기에는 소그룹에 속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구역 모임이 있는  입니다. 서로 친구가 되는 두 번째 차원의 교제를 위해서 성경은 “서로서로의 가정을 여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 예배가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깁니다.

기독교 역사 첫 300년 동안에는 교회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예배고 모임이고 모두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교회가 가장 빠르게 확산된 시기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수한 장소에서 친교를 나누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건 불길과 같이 온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편의에 의해서 건물을 짓고 투자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교회의 성장 속도가 저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을 열어서 참된 우정을 나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친교를 위해서 무엇을 나눌 수 있습니까?


3. 우리의 문제를 나누어야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표준새번역)

혼자서 인생길을 걷도록 의도하시지 않았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을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소그룹에서 큰 소리로 웃고 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을 전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 모인데서 혼자서 크게 웃으면 사람들이 전체다 무슨 일이 났는가 하고 안 쳐다보겠어요. 그렇죠? 허나 몇 사람 모인 자리에는 그렇게 웃어도 아무도 이상할 것이 없어요. 다 웃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웃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그룹에서는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우리 문제조차, 우리의 고통조차도 나눌 때 우리는 도움을 주고  받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문제를 여러분이 다 지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들어주기만 해도 됩니다. 동정심을 가지고 들어주기만 해도 됩니다. 모든 문제를 여러분이 다 해결해 줄 수도 없고 하라고도 않습니다.

해결해 주려고 덤비는 것만큼 어리석고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다만 들어주기만 하십시오. 들으면서 “그래” 그렇게 반응보여도 좋고 눈만 한번 쳐다봐도 좋고 조금 더 할 수 있으면 “정말 한 주간 동안 힘들었겠네요” 그렇게 한마디 해주면 위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몰랐는데 오늘부터 같이 기도 할게요” 그렇게 말해 주기만 해도 기운을 차리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 하다가 10년만에 탈진되어서 전화를 했어요. 보니까 전화로 끝이 날 이야기가 아니더군요. 내가 봐왔는데 십년동안 그분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 없어요. 나는 정말 그런 개척하는 목사들은 돕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가족 돌보지 않고 부부관계 조차도 금이 가는 것 감수하면서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어느날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잘못 합니다”하고 지적하면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많이 상하는 줄 압니까? 그래서 그냥 제가 바람도 쇄고 경주 모처에 나갈 일 있으니까 방하나 더 잡을 거니까 식구들 데리고 오라고 그랬습니다. 쉬는 게 필요합니다. 몇 마디 바빠서 말 못했지만 그냥 듣고 내가 그랬어요. “목사님 잘 한것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 잘못 할 수만 있습니까? 비난하고 떠나가는 사람들 이야기만 귀 기울이면 정말 실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물론 그런 저런 실수와 잘못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어떻게 일했는지 열심히 한 부분도 있잖아요? 그랬더니 한 두 주간 지나더니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이제 회복을 했습니다. 내가 잘한 것도 있다는 그 한마디 말이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오만원 십만원 이십만원 백만원 백오십만원 할 것 없이 어떤 때는 한달에 한번 나갈 때 이억 삼억씩 가지고 개척교회 지금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요새 와서는 조금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돈으로 지원하는 문제는 꼭 필요할 때 말고는 이제는 더 이상 하는 것 재고를 해야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돈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보니까 오만원씩 돕는 일, 각 기관하고 연결하는데 기관들 되면 뭐하기에 그렇게 힘들다고 그러는데 어떤 기관들은 보니까 가을에 놀러가서 선물까지 사서 나눌 여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기관들은 요구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오만원 돕는 것  우리기관만 못하겠으니 다른 기관하고 같이 해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임을 맡은 장로님은 이것을 연결을 시켜 도와주라는 교회는 많고 연결시킬 기관은 적고 이러니까 작년에는 어름어름 하는 사이에 한번도 교회 전체 예산에 그런 것이 들어온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돈 가지고 하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마음을 나누는 일은 우리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것은 돈보다 더 큰 힘을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 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5 표준새번역) 부담스럽다는 것과 게으름 때문에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모임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소그룹이야말로 나눔을 경험하는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세 번째 단계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더불어서 함께 일을 하는 차원입니다. 속해야 하고 우정을 나누어야 하지만 함께 사역을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집안에서 자기 몫을 감당 하는 것입니다. “울산교회 왔더니 내가 할 일이 있네” 그래야 울산교회를 통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할 수 있습니다. 무임승차하라고 여러분을 부리지 아니했습니다. 섬기도록, 그래서 결과로 여러분의 삶이 바뀌도록 하나님은 의도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좋은 점도 많지만 좋지 않은점이 그런거죠? 숨어있으면 얼마든지 숨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얼굴도 튀지 않고 옷입고 오는 것도 튀지 않으면 삼년이 지나도 여러분이 우리교회 신자인지 아닌지 아무도 눈치 못챕니다. 우리 김차순 전도사님이 정말 한때는 인간 컴퓨터로서 성능을 발휘했지만 그분도 이제 오십대 중반에 들어섰는데 옛날처럼 돌아가기가 만무합니다. 옛날처럼 다 돌리기에는 너무나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한 사람한테도 눈에 띄지 않고 적당하게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끔 이런 확인을 해봐야 되겠어요. “당신 몇 지구 몇 구역에 속합니까?” 물어보세요. 자기 구역이 무엇인지 댈 수 없는 사람은 소그룹 교제에 아직 참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니까 우리 김차순 전도사님이 사람들 지나가는데 던지는 질문이 “몇 구역에 속해있습니까?” 이렇게 묻더라고요. 대답을 못하면 그 사람은 여기지금 간첩으로 와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가정과 같습니다. 가족들은 서로 책임을 공유해야 됩니다. 힘들고 귀찮은 일은 서로 도와야 됩니다. 영적 가족인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숨어서 적당하게 왔다갔다 하면 쉽지요. 편하지요 그러나 그래가지고는 본인 자신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소속되어서 다른 사람을 섬길때에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어물쩡하고 지나간분들 몇분 계시지요? 하여튼 제가 우리교회 꼭 등록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속된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교회에 속했는지 안속했는지 모르고 심지어는 이 교회 저 교회 걸쳐놓아서 돌아가셔서 가니까 다른 교회에서 또 와 있어요. 시체 하나를 놓고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될지 애매한 그런 당혹한 처지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기 집은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자기 교회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자기가 사랑할 배우자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건 배타적입니다. 이 교회도 내 교회고 이 남자도 내 남자고 이래서는 어떻게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웃지만 우리 시대가 진짜 포스트모드니즘의 특징입니다. 절대로 옳고 절대로 나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어머니 한분 말고는 세상 모든 할머니들이 내 어머니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생겼고 온화해 보이면 어머니라고 이 할머니 붙들고 부르고 저 할머니 붙들고 부르고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예쁜 여자들 많지만 나는 나하고 결혼한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예요. 소속 교회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서로 서로 함께 하는 삶입니다.

신약성경에는 58번이나 “서로 서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섬겨야 하고 서로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서로 문안해야 하고 서로 격려해야 되고 서로 도와줘야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받아주고 참아주기도 해야 됩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것은 두 번째 차원의 교제입니다. 

세 번째 차원의 교제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동업” 또는 “동역”으로도 번역됩니다. 함께 하는 일이 있어야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사역하는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까? 날마다 죽어가는 사람들, 온갖 질병이 설치는 곳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습니까?”했더니 대답이

“내가 목욕을 시키고 붕대를 감아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주님의 얼굴을 떠 올리고 주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표준새번역)

소그룹에 속하셔서 소그룹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가 도움으로서 좀 가볍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도와주십시오. 성경 말씀은 듣고 깨달을 때도 감동이 되지만 들은 말씀을 실천하면 그 감동이 배가 됩니다. 그렇게 도와주게 되면 그 사람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로운 마음을 채워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만 합니다.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마지막 단계는 아주 가까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고로 죽은 사람을 만나면 그와 가까운 사람을 수소문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먼 친척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서 일을 수습하게 합니다.

마지막 단계의 교제는 가족처럼 신앙의 형제를 희생적으로 돌보는 단계입니다.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더 살 깊게 돌보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란 이 세상에 한정되지만 신앙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음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께 연합된 다음 서로서로에게 함께 연합된 교제를 가집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를 위해서 희생합니다. 목숨까지 내어 놓습니다. 고난의 교제를 나눕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과 그런 교제를 나눈 사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살려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롬 16:3-4, 표준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놀랐습니다. “보라 저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그리고 가장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졸업장을 가져오라” “상장과 트로피를 가져오라” “대통령이 준 시계를 가져오라” “모피코트를 가져오라 만져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인생을 끝맺습니다.

성취한 업적이 아니라 소중한 관계를 귀중하게 여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의 형제를 사랑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날 뒤늦게 깨닫지 말고 오늘 바로 깨닫고 바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말합니다. 우리 차에 붙이고 다니는 물고기 그림 때문이 아니라 FM 107.3 극동방송 마크가 아니라 입고 다니는 티셔츠 글귀 때문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주님께 속한 자들임을 알게 될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표준새번역)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한 해가 다 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줄 알도록 처신했습니까? 울산교회 하면 어떤 교회로 알려지기를 원하십니까?

울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 시설과 프로그램이 좋은 교회, 교육과 설교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라고 알려지기를 소원합니다. 그 때 울산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차원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저는 이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이 설계하신 자리로 초청하고 싶습니다. 이제 울산교회 교인으로 소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 사귀는 소그룹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무언가 함께 일하면서 하나님가족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