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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신앙 / 행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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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17 : 1 - 15절
제 목 :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신앙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자기 규례대로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들을 만나서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보여준 바울의 사역 모습을 통해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말씀에 붙들리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린다면
사도 바울의 일행은 유럽 전도의 첫 번째 도시였던 빌립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몸은 감옥에 갇히고 손은 수갑에 발은 착고에 메여 있었지마는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찬송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착고가 풀리어 지고 감옥 문이 열리며
간수장이 회개하고 온 집안이 예수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꼭 새겨야 할 것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할 수 없는 일도 풀리어 지는 것입니다.
전도 -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만
바울과 실라가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마는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기도하고 찬송하니 전도의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러니 관원들이 특히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빌립보 성에서 떠나기를 원하니 암비볼리와 아볼리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마게도냐의 첫성 빌립보를 거쳐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크고 번성한 도시로서
당시 내륙과 해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키케로>는
데살로니가를 <우리 영토의 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전도가 유럽의 관문이라면
데살로니가 전도는 유럽 전도의 본격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니 회당에 들어가
[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며 ]
여기서 <자기규례>대로 라는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기법칙>대로 라고 할 수 있는데
근간에 <자기원칙>이란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이란 책에서 자기원칙이란 말을 사용하여 이 말이 굉장히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로 말하면 사명선언문,
교회로 말하면 공동체 고백이니 아니면 우리 교회 같이 목적진술
개인적으로 말하면 자기원칙인데

스티븐 코비는 자기 원칙을 설명하기 위하여
책 속에서 코크의 <등대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원칙중심의 삶을 살아야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원칙이란 말은 벌써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고 있으며
사실은 이 말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먼저 사용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눅4:16절에 예수님도
[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시니라 ]
자기원칙의 원조는 바로 예수님이요 누가요 사도바울인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의 자기 원칙이 무엇인냐?
어떤 경우에도 바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공부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 원칙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자기원칙도
먼저 성경공부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매년 12월 둘째 주일을 성서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성경이 어떤 책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믿을 수 있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서적으로도 신빙성을 가진 책입니다.
약 1600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40여명의 다른 저자들에 의해
시대에 따라 12곳의 다른 나라에서 쓰여졌습니다.
비록 그것이 3개 언어로 쓰여진 66권의 다른 책들로 구성되었지마는
메세지가 놀랄만한 일치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고고학에 비추어 사본들과 성경 기록을 관찰해 보았지마는 그 결과는 성경의 신빙성을 더욱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39권의 낱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년 동안 현존하는 사본 중에
가장 오래 되었다고 알려진 것이 기원 후 900년이라고 측정되었습니다.
이 사본들은
마소렛이라고 알려진 유대인 서기관들의 모임에서 발간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소렛 사본이 정말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와 여러 전달 과정에 있어서
잘못 혼용되었을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고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 사해 부근에 있는 동굴에서 수천 개의 낱본이지만
사38-66장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고대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해 두루마리는 기원전 150-70년으로 축정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구약의 어떤 사본보다 오래된 사본인 것입니다.
이 사해 두루마리와 마소렛 사본을 비교했을 때 철자나 단어 선택 등 미세한 부분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성경학자 <R.L 헤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사본가들이 구약에 대해 크나큰
주의와 정확성에 심혈을 기울여 일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정말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이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것과 형태에 있어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아주 경솔한 회의주의자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성경의 허구성을 파헤칠려고 시도했지만 그들이 깨어지고 변화되었지 성경의 허구성은 드러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벤허라는 작품입니다.
소설 『벤허』가 세상에 나온 데에는 숨은 사연이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장군이요, 문인이었던 루 월레스(Lew Wallace)는 유명한 장군이었고 문학의 천재였다 고 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요 회의주의자인 친구와 함께
기독교를 영원히 없애 버릴 수 있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벗어나 살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월레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허위라는 것을 주장하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논박하기 위한 책의 ‘제1장’을 쓰고
‘제2장’의 첫 페이지를 쓰던 중 펜을 꺾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공박하려던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고 2주 후, 작가 월레스는 <벤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 이 소설은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 『벤허』도 바로 이 월레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냐?
이 말은 바울의 성경공부의 핵심이 무엇인냐?
3절에 보니 3주 동안 아주 짦은 기간에 바울이 전해 준 메시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하여 요5:39절에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핵심은 바로 예수 십자가의 구원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3주 동안 성경을 가르쳤는데
4절에 보니 [ 경건한 헬라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을 성경강론 했습니다.
세 안식일이 몇일입니까? 21일 이지요.
단지 21일 성경공부 했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
그것도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까지 에수를 믿게 되었고
예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살전1:6-8절에 보면
「많은 환난 가운데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나는 아무 말할 것도 없노라 ]

이 말씀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10년,20년 예수 믿어도
믿음의 역사는 고사하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데
사랑의 수고는 고사하고 봉사 한번 제대로 못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3주간 성경공부 했는데
살전2:13절에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것 뭔가 좀 이상하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왜 처음부터 모범적이고 소문난 교회로 성장합니까?
교인들이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세 안식일, 다시 말해 21일동안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르쳤더니
좋은 소문의 향기를 날리우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흥과 헌신은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된 것이 아니고 철저한 말씀의 은혜에 집중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말씀에 집중하여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해 반응을 보인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라인 중에서 그것도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좇습니다.
무얼 말하고 있습니까?
누가 성경공부 하고 누가 말씀의 은혜를 잘 받는가?
예수 처음 믿는 사람 그리고 여자들
예수 오래 믿은 남자들 도전 받으시기 바랍니다.
< 은근히 속으로 위로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도 보니 여자들만 성경공부 하지 남자들은 잘 안 하는데...>
그런데 12절에 보니 베뢰아 교회는 달라요
[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이 아니하나 ]
남자들이여~!
성경공부하고 말씀에 은혜 받는데 삶의 우선을 두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몇 년 믿었네...하는 길이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눈이 뜨여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무게로 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통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면
꼭 반대급부적인 방해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5-6절에 보니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온 성을 시끄럽게 하며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바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바울을 내어놓으라고 하니
없으니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어다가 읍장 앞에 끌고 와서는 하는 말이
[ 천하는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이 여기 이르매
야손이 물들였다고 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 황제를 거역하고
예수를 임금이라고 한다고 고소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말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 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은 유대인들 자기들이 더 성을 요란케 하고 어지럽게 하면서도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 이라고 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란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 혹은 <세상을 바꿔 놓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과 실라에게만 한 말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로서 분명 찬사의 말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명백한 조소와 비난의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그런 비난을 받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세상을 뒤집는 원칙들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원칙들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과연 몇 명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저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을려고 하느냐? 가 교회의 생명력인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부터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란 말을 들었는가 하면
바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받은 이후부터 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가 있습니까? 확실한 증인들입니다. 증인들이 누구입니까? 사실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실을 본 사람과 같은 증인이 될 때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렇거니 하고 묻어 두었던 기정 사실들이
증인들에 의해서 뒤집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을
하나님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의 증인들입니다.
이러한 증인의 용기와 담대함은 우리가 성령 받으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렇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유대인의 시기와 방해로 그곳에서 80Km 쯤 떨어진 도시 베뢰아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의 탁월한 신앙자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베뢰아 교인들의 종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한마디로 말해 「신사적」이라 합니다.
11절「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 이어서」합니다.
신사적- 본래 뜻은 가문이 좋은 이란 뜻이나 여기서는 성품이 좋다는 것입니다.
완고하거나 외골적인 성품이 아니라 온화한 성품을 말합니다.
완고한 사람 고집이 센 사람은 성경공부를 통해 은혜 받기 참 힘듭니다. 세상에서는 그 사람 참 고집이 세다고 하면 고상하게 들린런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고집이 세면 망하는 길입니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입니다.
완고한 마음 때문에 망한 사람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들수 있습니다.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할 때 베뢰아 사람들 처럼 신사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가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 신사적이라고 말한 것은 베뢰아 사람들의 복음을 받아드리는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교인들의 말씀 받는 자세가 어떠합니까?

1. 11절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간절한 마음 -영어성경 Opened Mind (열린마음)
요사이 열린교육 열린정치 열린예배란 말 자주 듣습는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의미가 강한 말인데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간절한 마음 <Opened mind>는
바로 마13: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하는 옥토같은 마음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겔36:26절에 성령의 역사로 변화된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 꼭 간절한 마음으로 들고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신사적인 것은
2. [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바울이 말하는 바가 성경에 그러한가 확인하고 받아드렸다는 말입니다.
본래 상고하다란 말 - <아나크리노>라 해서
자세하게 살펴서 티를 골라낸다 란 뜻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잘 관찰하여 그 삶에 적용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나의 삶에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사실 공부라는 것은 제대로 하려고 하면 매일 해야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 해 가지고 뭐가 되는 공부 있습니까?
그것도 준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때운다면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꼭 매일 성경을 상고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면 반드시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5, 13절에 나타나는 사탄의 방해공작입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80Kmsk 떨어진 베뢰아 까지 따라와
소동을 부리며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공동체가 되고 말씀공동체가 되는데
가장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사람들을 충동하고 동원하여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만듭니다.
말씀의 은혜 받는데 방해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받고 사단의 방해에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베뢰아 전도를 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성경공부를 자기 원칙으로 삼으면 삶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도
베뢰아 교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날마다 자신의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성경 말씀을 상고하는 신앙생활이 될 때
신사적 교인이 될 줄 믿습니다.
전9:1절 [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
내일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마치 낯선 땅에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도가 손에 들리어져 있으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 그 누구도 내일을 모릅니다.
사랑 받을는지 미움받을는지
복을 받을는지 화를 당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을 때 절대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깊이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119:105절 [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 사는 것은 캄캄한 밤 중에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없는 인생 바로 캄캄한 방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다
감정과 말씀, 상황과 말씀, 이익과 말씀의 갈림길에 있을 때
그럴 때 말씀을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다윗은
106절에서
[ 주의 말씀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
마지막으로
계1:3절에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 가까움이라 ]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복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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