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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대하 2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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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역대하 28장 9-15절

<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축복 >

오늘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4주 중의 2번째 주일입니다. 이 기간 중에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할 것은 기다림과 인내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야고보서 5장 8절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실천덕목 1호가 인내입니다. 참을성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먼저 온 분들이 나중에 온 분들을 앞세워 주려고 하고, 잘 섬겨주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은 "내 것!"하고 취하고, 좋은 일은 "남의 것!" 하고 양보합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겨울이라 춥지만, 영적인 온도는 더욱 추운 때입니다. 이때 자기를 죽이고 남을 앞세우면서 "집사님! 제 앞에 서세요. 저는 열심히 도울께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찾고 계실 것입니다.

왜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헌신했고 서로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고, 그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신앙은 주님을 기다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성공에도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가 무엇입니까? 크리소스톰은 "복수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참는 마음이 인내다!"라고 했습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누가 진 것입니까? 목소리 큰 쪽이 진 것이고, 참지 못한 쪽이 진 것입니다. 누가 이긴 것입니까? 인내한 쪽이 이긴 것입니다. 웃음까지 머금었다면 더욱 이긴 것이고, 마음에 조금도 섭섭함이 없었다면 완전히 이긴 것입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납치되었을 때, 미국 항공모함이 원산만에 집결했습니다. 곧 전쟁이 터질 줄 알았는데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미국이 멋진 말 한마디를 남기고 철수했습니다. "강한 자가 참는다." 그처럼 하나님은 참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인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내는 축복의 싸인입니다. 인내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깁니다. 인내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망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언제까지 인내해야 합니까?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내가 10년 동안 참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0년간 참은 것이 아니라 "두고보자!"고 벼른 것이다. 벼르면서 버틴 것은 진짜 인내가 아닙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기도제목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인내하는 것이 진짜 인내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100년 이내에는 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림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축복은 없습니다. 반대로 축복이 없는 고난도 없습니다. 축복과 고난을 함께 이해할 때 내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넘치게 되고, 우리는 더욱 성숙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는 기꺼이 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 온전히 항복할 때 행복이 주어집니다 >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분단 시절,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 때 이야기입니다. 아하스 왕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1-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우상숭배를 했고, 자녀를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는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준다는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영적인 의미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를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결국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은 아람 군대를 보내 수많은 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북왕국 이스라엘 왕의 신하인 르말랴의 아들 베가의 손에 의해 하루에 유다 군사 12만 명을 죽게 하십니다(6절). 그때 아하스 왕의 아들 마아세야, 궁내대신 아스리감, 그리고 총리대신 엘가나도 죽습니다(7절).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재물을 노략하고, 약 20만 명의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벼랑 끝에서 붙잡아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벼랑 끝으로 가지 않으면 좀처럼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벼랑 끝에서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축복의 줄을 내려주셔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약점이 있었고, 다윗도 약점이 있었고, 엘리야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 항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항복해야 진정으로 축복 받습니다.

그런데 이 항복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직장을 잃고 항복하고, 어떤 분은 돈을 잃고 항복하고, 어떤 분은 친구를 잃고 항복하고, 어떤 분은 자녀를 잃고 항복합니다. 그처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항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먼저 주님께 항복하면 문제에 항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 항복할수록 일찍 행복이 찾아오고, 일찍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 소수의 사람의 희망의 씨앗입니다 >

그처럼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희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어떤 방법을 쓰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깨어 있는 한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오뎃이라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오뎃은 승전을 자축하며 떠들썩하게 사마리아 성으로 입성하는 군대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환영 대신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이 본문 9-11절 말씀에 나오는데 대략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는데 너희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모자라서, 형제 나라인 유다의 백성을 잡아 노예를 삼으려고 하는구나! 만약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다."

이 오뎃의 행위는 참으로 인기 없는 행위입니다. 고독한 행위입니다. 왕따 되기에 딱 좋은 행위입니다. 분위기를 망친다고 "왜 저래!"하는 핀잔도 들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매국노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은 용기 있게 진리를 외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말에 응답하는 동역자를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응답합니까? 본문 12절에 나오는 에브라임의 지도자 네 명이 응답하여 개선하는 군대 앞에 서서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말라! 우리 동족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포기하고 물러섰고, 그때 4명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포로를 맞이하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물을 주고, 상처에 기름을 발라주고,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유다의 여리고 땅까지 데려다 주고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될 때는 약자를 돌보고, 그들의 약점을 덮어줄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큰 축복을 주시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살맛 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서울 삼양동에 한 건설사 현장 소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부산에 있는 2년 걸리는 공사 현장으로 가게 되면서 6개월에 한번 정도 집에 왔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오지 않으니까 아내가 중학교 2학년 된 딸을 아버지에게 보내며 옷과 필요한 물품을 챙겨주었습니다.

딸이 부산의 아버지 집에 갑자기 들렀을 때 딸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빠가 젊은 여자와 밥상 앞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세 사람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그 날 밤 아빠는 딸을 데리고 호텔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딸을 서울로 보내면서 "내일 서울로 가겠다."는 한 마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그분은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어떻게 딸과 아내를 대할지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섰는데 뜻밖에 아내가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잠자리에서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딸이 부산 갔다 와서 말하는데 혼자 사느라고 고생이 심하다면서요. 당신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 그분은 철저히 회개했고, 그 뒤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장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 연약한 사람을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

우리가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돌보며 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실 것입니다. 지금 가정의 패배자들, 경제적 패배자들, 목회의 패배자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승리자의 교만한 모습도 눈에 보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승리자에게 "연약한 사람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오뎃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축복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자와 함께 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유명한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나의 관심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가지 마음 아픈 일을 겪었습니다. 교회 종탑을 세우려고 하는데, 가끔 타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교회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가진 분들 중에 한두 분이 그 일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 교회가 어떻게 주민과 싸울 수 있습니까? 그때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그 반대하는 주민을 잘 설득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종탑 시공하는 장로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어서 새벽기도에 매일 나오는 연세가 70이 넘으신 어렵게 사시는 한 권사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우리가 종탑 세우려고 하는데, 만약 반대하는 분이 있으면 잘 설득해 주세요." 그러자 권사님은 "목사님! 염려 마세요"라고 힘을 주시는 말씀을 해주셔서 안심하고 수요일 저녁에 실행위원회 회의를 열어 종탑을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오해를 하셨습니다. "상가에서 자기들이 종탑을 설치하는데 주민이 무슨 권리가 있어 반대하는가? 그런데 목사님이 그 얘기를 꺼낸 것을 보니까 헌금하라는 소리인 것 같다"라고 오해를 하시고 새벽기도에 발걸음을 딱 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시는 권사님에게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시험 들었다. 다른 교회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 교회 장소를 구입하면서 우리 성도에게조차 한번도 "헌금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 오해를 하시니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비로소 "연로하신 분들이 경제적 약자로서 물질 문제에 민감하시다!"는 세간에 도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의 오해를 푸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대신에 우리 교회가 연로하신 분들을 많이 도와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노인정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TV는 있으세요? 가습기는 있으세요? 공기청정기는 있으세요?" 그렇게 필요한 것을 물으니까 노인회장님이 "천장에 대형 선풍기 달아달라!"고 하셔서 곧 그렇게 해 드리기로 했고, 연시 한 상자와 딸기 한 팩을 사서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이곳에 있게 하셨으니까 이 근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최선을 다해서 계속 그렇게 돌봐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그 아픈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 사랑이 축복의 비결입니다 >

왜 우리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마련해주신 행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은밀하게 몽고의 선교사님을 위해 후원의 손길을 베푸는 분이 있습니다. 저도 그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밀한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그분에게 행복의 탑과 축복의 탑이 많이 쌓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저는 다시 한번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병에 걸리는 선교사님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지난 7월 우리 교회 예배 때 와서 말씀을 전해주셨던 김사무엘 목사님이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바그다드로 선교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혈액암(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 혈소판이 2천 이하로 내려가서 매우 위급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선교사님의 9번째 척추가 암의 영향을 받아 내려앉아서 이번 주 화요일에 워싱턴 조지타운 병원에서 수술을 받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십시오. 이렇게 병에 걸리는 선교사님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은 선교사님들의 마음고생을 현저하게 덜어드리게 될 것입니다.

축복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가장 큰 축복을 받는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 고귀한 인격이 빚어지고, 행복이 창조되고, 그 축복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게 되고, 사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오늘날 왜 사는 것이 힘듭니까? 가장 큰 이유는 내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이 세상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내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더 확실히 말한다면 받으려는 사랑은 있고 주려는 사랑은 없기에 힘듭니다. 사랑을 주어보십시오. 이 세상은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고,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사회적 약자의 할 일 >

그러면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누구의 도움만 기다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일시적으로 패배자의 위치에 있게 되어서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시간에 4가지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구차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떳떳하게 살고, 오만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도 내겠다! 나도 돕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진 자에게 있는 오만은 나쁜 것이지만 가지지 못한 자가 떳떳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오만은 좋은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비겁한 자는 죽기 전에 몇 번 죽고 용감한 자는 단 한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비겁한 모습으로, 구차한 모습으로 살면 죽기 전에 여러 번 죽게 됩니다. 인간성이 죽고, 책임감이 죽고, 가능성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 현실을 냉철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문제가 해결되겠지! 내일은 달라지겠지" 하고 기대만 하면 안됩니다.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고, 무엇인가 달라지도록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내일이라는 이름아래 부도수표를 내면서 뒤로 미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는 자를 결코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두개의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창조의 고뇌를 앓는 '이상 세계의 삶'을 살고 현실 생활에 부응하는 '현실 세계의 삶'을 삽니다. 그때 위대한 예술품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헛된 예술가는 거꾸로 삽니다. 창조의 고뇌를 해야 할 때는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 생활에 부응해야 할 때에는 이상만 내세웁니다. 그러면 삶이 예술품이 되지 않고 새는 바가지가 됩니다. 새는 바가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담길 수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가끔 등록금 백만 원은 내지 않고, 백만 원 드는 단기선교는 갔다오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상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을 바꾸지 말라!"고 가끔 말했습니다. 등록금은 내지 않고 그 돈으로 선교는 가겠다는 것은 학생의 영역과 본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신학생은 학생이지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공부를 해야 하고, 먼저 등록금을 내는 일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처럼 현실 세계에서 내 책임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전에도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3. 최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땀을 흘릴 때 주어집니다. 인생은 자작 드라마입니다. 내가 각본을 쓰고 내가 주연이 되어 내 인생을 연출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소중한 인생을 부여받았거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살기 힘들면 철저히 낮아지고, 팔 걷어 부치고, 처음부터 맨몸으로 시작하겠다고 다짐하고, 이마에 땀을 흘릴 각오를 하고, 붕어빵 장사라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잠도 줄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살 길이 막막한데 땀을 흘릴 각오가 없으면 나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태한 사람이란 그저 일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의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배신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태는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최선을 땀을 흘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4. 항상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가슴에 찔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찔립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찔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은 뜻이 있어 이곳으로 보내셨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선택할 때 완전한 사람만 선택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불러서 힘을 주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무리 연약한 모습이라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미완성은 완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제자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완성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자기의 삶에 대한 놀라운 기대를 가지고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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