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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를 이루어내는 삶 (롬 1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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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어내는 삶
롬12;17-18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어느 초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하루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굶주린 하이에나가 사자의 새끼 가운데에 한 마리를 잡아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멀리 달아났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는 그 사실을 알고서 노발대발했습니다.
사자는 즉시 초원의 모든 동물을 한 자리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을 발표를 말하면서 하이에나를 전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또한 사자는 그 일에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협조를 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을 듣고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번 일로 인해서 초원의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코끼리가 조용히 사자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사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왕이시여, 물론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마땅히 응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이번 일로 인해서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 일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사자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이런 굴욕스러운 일을 그냥 참고만 있으라고? 그렇게 비겁해서야 내 어찌 동물의 왕이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코끼리는 다시금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힘을 휘두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절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왕께서 극심한 아픔을 당하셨지만 그래도 분별력을 잃지 아니하시고,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위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초원의 모든 동물들은 왕을 더욱 존경하고 잘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역시 사자는 동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자기의 분노를 참고 코끼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초원의 평화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멀리 달아났던 하이에나는 그 소식을 듣고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자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동물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사자는 겁이 많은 동물이야. 나하고 싸우기가 싫으니까 나를 피하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나이 많은 코끼리가 하이에나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자기의 큰 발로 하이에나를 사정없이 짓밟은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똑바로 들어 두어라. 사자가 너 같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짐승을 정말 두려워해서 참고 있는 줄 아느냐? 사자는 모든 동물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의 아픔을 억누르면서  참고 있는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평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툼이 있습니다. 싸움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으로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일의 평화를 위해서 오늘은 싸우고, 다투고,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힘으로서는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평화를 이루어내는 올바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는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악을 버려야 합니다. 17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17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힘써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시34:14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고후5:18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평화를 이루어내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 17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악을 버리는 일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면 어떻게 해 주고 싶습니까? 성질대로라면 우리가 당한 이상으로 앙갚음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금 건드렸는데, 더 크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루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은 언제나 더 큰 악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사자에게 화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살인범이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마치 자기가 억울하게 그런 일을 당하는 것처럼, 분노 속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인범의 형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래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은 자기의 절친한 친구인 주지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상의를 했습니다. 형은 주지사 친구와 함께 대통령에게 그의 동생을 사면을 해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대통령은 살인범의 형이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를 참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을 사면해 주기로 했습니다.
이제 살인범의 형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 대통령의 사면장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감옥에서 동생을 만난 형은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야, 네가 만일 죽지 않고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자 동생은 뜻밖에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형님, 나는 복수심에 불타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나가는 길로 내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와 법정에서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총으로 쏘아 죽이든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복수를 해야지 내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형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잠시 뒤 형은 동생과 작별인사를 하고서 그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형의 양복 안쪽 주머니에는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했습니까? 그럴지라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마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해 주십시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의 천사가 하나님의 사면장, 하나님의 축복장을 받아 쥐고서 우리에게 왔지만 그것을 전달할 길이 없어 그대로 떠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악을 대응 무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누가 우리를 저주합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원수로 대하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돌로 쳐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어떠한 기도를 드렸습니까?
"주여, 이 원수를 꼭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셔서 저들 자손 대대로 망하게 해 주시옵소서."
만일 스데반이 이러한 기도를 드렸더라면 그는 위대한 순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진솔한 모습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에게 돌로 치는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에 힘입어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본시 예수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평화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던 스데반의 모습,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어낸 스데반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17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누가 우리를 핍박할 때 우리가 그를 저주하지 아니하는 것은 소극적인 일입니다.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위해서 축복해 주는 것은 적극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내는 두 번째 단계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구쟁이들이 괜스레 지나가는 기차를 향하여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차의 유리창이 깨어지기도 하고, 타고 있던 승객들의 머리가 깨지는 등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은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좋은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철로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가 지나갈 때 이렇게 아이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저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더불어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돌멩이를 던지지 말아라"는 말로는 장난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을 흔들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해 보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화를 이루어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 여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의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 시누이가 사사건건 저를 간섭하면서 괴롭히는데 못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하시다가 마5:44의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난 후에 목사님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집사님, 그럴수록 시누이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집사님은 다시금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또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괴로워 못살겠습니다. 시누이를 위해서 많이 기도했는데 시누이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목사님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집사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그러자 집사님은 사실대로 답변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누이의 못된 마음을 좀 고쳐달라고 부지런히 기도했지요. 그런데도 시누이의 못된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사님은 그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하신 기도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시누이가 잘 되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그 집사님은 그때부터 시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시누이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시누이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마지못해서 드리는 기도였지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그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정말로 그의 마음속에 시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진정으로 시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누이와의 관계가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화가 사라지고 그 가운데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임하기를 원합니까? 너를 축복하는 나의 모습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너에게 선을 행하는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불화는 사라지고 그 가운데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또한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힘써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모든 사람 앞에서." 이와 같이 무조건적입니다. 그런데 셋째 단계에서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불어 평화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까닭 없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믿음을 포기하면서까지 핍박자들과 평화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평화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 오늘날은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만 힘써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평화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어느 날 한 아리따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얼굴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살림은 엉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눈이 삐었구나! 여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닌데, 왜 내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까?'
결국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지런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딱 맞는 매우 부지런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지런한 것까지는 좋은데 입마저 부지런한 것이었습니다. 잠시도 쉴새없이 혼자서만 지껄였습니다. 질려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좀 더 신중해야 했었는데…'
결국 그 여자와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조용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있습니다. 조용한 것은 좋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장점을 보고 결혼했다가 단점이 생기면 이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두손 들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은 가위 바위 보와 같구나.'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위 바위 보는 언제나 이기는 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위는 바위에게 집니다. 그러나 보자기는 이깁니다. 보자기는 바위에게는 이깁니다. 그러나 가위에게는 집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에게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또한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나쁜 점, 단점만 바라보지 말고 좋은 점 장점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평화하십시다. 아울러서 언제 어디서나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다툼, 분열, 싸움을 종식시키고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곳곳에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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