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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뜻) / 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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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뜻)

본문: 요한복음 1:1- 18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에 실린 글입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가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역을 맡았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하고 들어가 버리는 역입니다.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빌려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데서도 안 받아 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순간, 관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깊은 성탄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안방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립시다.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의 방을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말구유에 오심은 무능해서가 아니고 천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생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오늘 이 성탄일에 주님을 마음 가득히 영접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제사장이나 혹은 권력 있는 유대총독에게 먼저 전하여지지 않고 구태여 목자에게 전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의 탄생소식이 전달될 때에 목자들은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양 틈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목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진실로 우리의 참 목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여 저주를 받아 마귀에게 찢기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강림이 목자들에게 전해진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때로부터 영원토록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2-4)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통째로 양무리를 불러 인도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억하시고 부르시며 그 처지에 따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목자가 양을 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라고 하였습니다. 목자가 양과 함께 있거나 인도하며 다녀도 소용없습니다. 반드시 양을 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탄의 소식이 목자에게 먼저 전해진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 성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과, 둘째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러 그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 즉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리라는 것이고, 셋째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천사들의 캐럴 내용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가져온 역사의 선물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바꾸어진 역사 속에서 그의 선물을 받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탄은 인간의 역사를 옛 것과 새 것으로 구별하는 분수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변화된 역사 속에서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성탄의 역사적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여 죄와 구별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의 탄생을 해마다 반복되는 축제로만 여긴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을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실 구세주로 이 땅에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되신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허락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 대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들의 생활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는 외식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욕심과 생각에 이끌려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졌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바른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찾아야 합니다. 카드나 선물교환을 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밤을 지새우며 노래하고 좋은 음식으로 즐기던 것을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리 신앙을 반성하고 주님을 향한 마음자세를 어떻게 가질 것인지 삶의 태도를 결단해 봅시다.
크리스마스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날입니다. 즉, 태초부터 계셨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성육신이 필요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 대신 죽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이며 복음입니다.
또한 성탄의 의미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찾아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신처럼 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신에게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십니다. 범죄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심판 받을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가셨습니다. 동생을 살인한 가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다윗을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은혜, 더 큰사랑, 더 큰복이 없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빌2:6).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엄청난 포기와 헌신을 말합니다. 존귀와 영광 그리고 명예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다 포기하고 다 버리고 우리와 같이 되신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자원하여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영접할 때에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에“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잠시 함께 하다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거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병들고 실패했어도 함께 하십니다. 내가 고독한 중에 있어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함께 하십니다. 어디 있든지 거기 계십니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러한 하나님의 성육신, 즉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성경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은 “예수는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이 말은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예수는 주”라고 신앙고백 하였던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아도나이”의 번역인 헬라어 “퀴리오스”로 예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좀더 분명히 말하면, 구약의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하며, 이 사도들의 제자를 속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속사도들의 제자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초대 교부들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교부들만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 진리를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을 보겠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훨씬 오래 전, 그것도 수천 년 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 기록하였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모세보다도 이전의 사람인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알았으며 보고 심지어 기뻐하기까지 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 예수님에게 반문합니다. 57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에 예수님이 58절에서 놀라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섬기던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에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요한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말씀으로 비유하여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비유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계시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의 시대적 배경과 헬라인들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그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 속에 그 생명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은 헬라어의 “로고스”를 의미합니다. 주전 6세기 경 헬라시대에는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 철학의 골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로고스”였습니다. 이 로고스라는 말은 단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통재하는 하나의 능력,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 그것이 로고스였습니다. 당시 헬라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신과 인간 사리를 중재하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구원의 수단이요 신이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님은 “로고스”라고 표현하여 헬라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은 더 나아가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부 하나님만이 창조주가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창조주이심을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장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육체를 입고 죄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플라톤도,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 그림자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 그분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18절의 내용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셨기에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려고 참빛으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데, 그러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영접치 아니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어두움 가운데 빛이 왔는데, 왜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소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빛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빛인 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렇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참 빛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수이지만 참 빛을 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말에서 “본다.”는 말에 대한 의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다고 할 때 요한이 말하는 본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본다고 할 때 “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을 우리가 영적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주님의 영광을 보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와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은혜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나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이 진리는 세상의 지식과 달라서 끝이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오묘하고 신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진리를 알수록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끝없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날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은 예수님이 바로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이며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서 난자들로 예수님의 영광을 자신의 몸에 담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반사된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주님의 영광을 본 자들은 그 삶이 변화되고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증인으로써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본 우리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몸에 담아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좁은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알아도 부족합니다. 알면 알수록 우리는 진리에 대해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한번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실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 위에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그 날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날마다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보아도 다 알 수 없으며 날마다 새롭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단은 화려한 세상의 영광을 보여 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에게까지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며 시험하였던 자가 사단입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의 영광에 취하여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마십시오.
부디 이번 크리스마스는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영광에 취해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마음껏 보는 풍성한 날이 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 볼 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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