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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아만 / 왕하 5:1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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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열왕기하 5장 1절 - 14절
제  목 : “나아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동쪽,
작은 섬에 중범자들을 가둔 교도소가 있답니다.
이 섬에서 육지까지는 육안으로 뻔히 보이는 정도니까 먼 거리는 아니랍니다.
그래서 많은 죄수들이 탈출을 시도하여 바다로 뛰어 들지만,
지금까지 단 한명도 탈출을 한 적이 없답니다.
섬 주변의 급류가 무섭기 때문이랍니다.

그 해변에 이런 푯말이 있답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가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의 공룡은 변화할 줄 몰라서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
믿으면 믿을수록
믿으면 믿는 만큼 달라지고 나아져야 됩니다.

본문의 나아만 장군이 그 비결을 제공합니다.
문둥병자였던 그가 어린아이의 살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 나아만 장군

나아만 장군의 불행은 문둥병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불행을 사실적으로 지적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 크고 존귀하면 무엇 합니까?

썩어가고 있는 것을...

◎ 성공했으면 무엇 합니까?

곧 죽을 것을...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이란 시입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이와 반대로,
아가서에는 작아도 큰 여인인 술람미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아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나아만과 술람미여인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이 나아만은 누구인가요?

◎ 군중 속에서 고독한 현대인을 가리킵니다.
◎ 성공과 출세지향주의인 모든 사람을 웅변합니다.
◎ 더러는 꽤 괜찮은 듯 위세를 부리지만 실상은 가련한 나의 초상인 것입니다.


2) 복음을 들었다.

이러한 나아만은 어찌 달라졌을까요?
다른 치료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들었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비록 포로된 여자아이의 입술에서 나온 말이지만,
복음다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항간의 사람들은 로또복권을 맞추면 큰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한 조사 발표에 의하면 일확천금을 얻어서 종전보다 더욱 불행해지고 외국의 경우는 자살까지 갔습니다.

그러므로 큰 복은 주 예수의 복음을 듣는 일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함을 얻으리라」

이러한 복음은 이미 듣고, 믿어 구원함을 얻은 성도들에게도 계속 필요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치료와 구원은,
이 작은 계집아이가 전한 복음을 들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계집아이의 포로됨은 나아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전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고
듣지 않고는 구원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했다고 다 듣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국내나 국외에서 얼마나 많은 전도자나 선교사가 외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가 적은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못한 이유가 크지만,
그 주변에 복음을 말살하는 허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바보섬에서 총독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섬의 박수무당이 총독이 복음 듣는 것을 훼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어느 전도현장이든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도 큰 은혜입니다.

① 어진 아내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복음일지라도 아내가 불신하고 훼방한다면 나아만은 별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상 3대 악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욥의 부인, 소크라테스의 부인, 웨슬레의 부인 등...
「욥의 부인」은 병중에 있는 남편을 향해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부추 켰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남편을 군박하고 애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웨슬레의 부인」은 남편에게 온 편지까지 뜯어보는 등 많이 괴롭혔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 나아만의 부인은 어진 부인입니다.
◎ 나아만은 장가 잘 간 남자입니다.

불치병인 남편과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 작은 계집 아이의 복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남편들이 이런 부인과 있다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 부인 덕에 예수 믿는 이들이 꼭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잠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남편들께 묻습니다.

혹, 예수 믿으라고 성화인 부인을 두었습니다.
혹, 주일이면 늦잠자고 싶은데, 교회가자는 부인이 있습니까?
혹, 살기 어려운데도 헌금 드리는데 인색치 않는 부인이 있습니까?

복 받을 남편인줄 믿으십시오.


② 좋은 상전을 두었다.

나아만의 상전은 아람 왕입니다.
그 왕은 나아만의 치료를 위해서 휴가와 편지를 주었습니다.


③ 좋은 종을 두었다.

◎ 일전의 뉴스를 보니

어느 식당 여종업원은 3년 동안 수억을 챙겼습니다.
주인은 믿고 계산대를 맡겼건만, 그 종업원은 한 여름에도 긴 팔 옷과 토시를 착용하여 음식 값에서 횡령했던 것입니다.


◎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입니다.

그 역시 주인이 시키지도 않는 사례를 나아만에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종들은 좋았습니다.
치료받으러 온 주인이 치료를 거부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할 때,
주인을 이해 시켰으며, 마침내 그 치료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믿음은 혼자 생활 같지만,
실상은 동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도회, 구역 등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 연약할 때 동지가 힘 되어 주고
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플 때
전도회원이나 구역원들이 붙잡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소속됨이 매여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으면 마음에 상처 입고, 혹은 시험에 든다고 거부도 합니다만,
잘못된 일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변을 보십시오.

사람이든 사업이든 신앙이든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잠 21: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유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에게 이렇듯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 그래서 결혼 앞둔 처녀 총각은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이런 자녀 주옵소서 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사할 때는 좋은 이웃 만나게 하옵소서 하며 인도하심을 구해야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좋은 이웃을 만났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좋은 이웃입니까?

4) 계속 담구었다.

나아만 장군의 직접적인 치료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몸을 7번이나 잠근 것입니다.

◎ 영광의 자리에서 비천의 자리로 내려온 것입니다.
◎ 자기 방식에서 주의 방식으로 맞춘 것입니다.
◎ 의인의 자격에서 죄인의 자격으로 죽은 것입니다.

왜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은혜가 없습니까?
문둥병자 나아만이 아니라
군대 장관 나아만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울에 비추인 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봐주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
심판대 앞에서의 나! 는 누구인가? 입니다.

변화되길 원하신다면
말 탄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위용과 영광으로 무장된 자아를 벗어야 합니다.

사탄은 역사하기를,
허물을 그대로 들추어내면,
너의 약점이 드러나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 앞에 그 허물을 드러내면 하나님의 허다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덮고도 오히려 넉넉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온천탕, 황토탕입니까?
한번입니까?
두 번입니까?
의심 옵니까?
멈추었습니까?

우리 신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새살이 나올 때까지 반복 반복되어야 합니다.

  결  론)

나아만은 나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은 죄 된 나이고,
요단강에 몸을 씻는 나아만은 주를 의지하는 나입니다.
새살을 얻은 나아만은 주님 안에서 심령의 변화를 받아
지식까지 새로워진 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나아만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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