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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마 1:18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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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마태복음 1 : 18 - 23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영합해서 소위 한국적 기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흥했지만 서구의 신앙인들과는 전혀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는 한국의 토속종교와 잘 맞는 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무속종교는 장로교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과 비슷하게 이해되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무속종교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운수소관(運數所關)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운수가 대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운수가 대통하려면 복을 가진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붙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교의 은혜(값없이)로 구원받는 것과 같은 원리로 쉽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가 기복신앙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상에 의한 병리현상은 모든 축복을 환경의 변화에 두고 있습니다.
환경보다는 자기변화가 먼저입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은 기독교의 본질이 무시당하고 인본주의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 이원론적인 신앙관입니다. 교회 나오면 무엇인가 될 것 같은데 교회 문을 나서면 그만 마음이 답답해지기 때문에 이중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탄 메시지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Ⅰ.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본문 1장 18절에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은혜를 받은 여자라고 했습니다(눅 1:28,30).
누가복음 1장 31절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놀라고 있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다시 말하기를
누가복음 1장 35절에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마리아를 완전히 덮어 버린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주관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쯤되고보면 마리아는 완전히 성령에 의해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속으로 근심하고 있던,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하나님의 구속의 대사(大事)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마 1:20).
하나님이신 예수가 사람의 몸에 잉태된 사실, 이것이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알려주는 계시종교의 특징입니다.
이 이적은 전 우주를 통하여 전무후무하며 단 한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초자연적인 이적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것입니다.

Ⅱ. 예언이 이 땅에서 현실화되는 사건입니다.

본문 1장 22-23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바빙크(H.Bavink)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모두 456번 나오는데 모세오경에 75번이고 선지서에 243번이고 그 외에서 138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심으로 현실화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기록된 예언이 현실화되어 나타나므로 그 예언이 예언으로서 신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언아닌 예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기준은 그 예언이 성취될 때 비로소 그것이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 예언은 무수한 잡설과 오설로 인간들의 삶을 망쳐 놓을 것입니다..
예수의 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예언이 현실화된 극명한 증거를 보임으로 예언으로서의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Ⅲ. 임마누엘이 실현되는 사건입 니다.

본문 1장 23절에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고 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처녀의 잉태가 믿어졌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가리켜 임마누엘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마리아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임마누엘은 나타났습니다

(1) 모세의 경우입니다.
출애굽기 4장 12절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4장 15절에서도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핑계를 댔습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겠습니까?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임마누엘 하신다고 함으로 모세는 이 신앙의 힘으로 출애굽 운동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2) 기드온의 경우입니다.
사사기 6장 16절에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사 기드온을 부르셨을 때도 기드온이 "제가 어떻게 미디안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약합니다. 게다가 저는 제 집안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미디안을 한 사람을 해치우듯 쳐부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3) 예레미야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예레미야 1장 7절과 8절, 15장 20절, 21장 1절에 계속해서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모두 임마누엘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임마누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신앙은 하나님을 극대화하고, 절대화시키고, 자신을 상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의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결코 자기가 해낸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내가 이 일을 감당해 낸다고 믿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와 경향교회는 소위 big brothers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철저하게 하는 것과 소극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며 또한 임마누엘 믿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이 일어나야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먼저 믿어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신앙생활은 항상 무기력하고 무능력할 뿐인 것입니다.
먼저 드려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여야만 믿으려고 하고 감각적으로 잡혀야만 믿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표준을 자기 자신의 눈이나 감각에 두고 있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이고 아무리 큰 것이라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무시하는 일에 익숙한 자기 자신의 악습을 버려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도마 증후군입니다. 만져보고 믿겠다는 자들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먼저 믿어야만 기적도 있고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마침내 요셉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약혼녀의 잉태를 부정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어서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세계가 열려 자연의 질서 이외에도 즉, 남녀가 서로 결합하지 않아도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의 신앙의 안목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열려 있다는 것은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은 있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 믿음 위에 처녀잉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기적은 믿음의 결과이며 기적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절대로 기적이란 임마누엘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간적 이성의 한계, 지식의 범위, 과학의 논리로만 하나님의 기적이 믿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초논리적 역사를 체험하는 축복을 지니고 있기에 기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임마누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생물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박재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기적을 단순히 어떤 현상이나 환상 정도로 보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기적으로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처녀의 몸을 빌려 오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며 기적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적이며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땅에서 현실화되는 사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백성들에게 임마누엘이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 나 같은 자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어려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내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능치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보다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보다도 오병이어의 기적보다도 모든 질병을 고치는 기적보다도 물 위로 걸으시는 기적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보다도 더 위대한 기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기적입니다. 이 은혜만으로도 우리는 감격할 뿐입니다.
이제 눈에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손에 무엇이 잡히지 않는다고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가슴에 시원함이 없다고 해서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더 행복한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임마누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도, 병든 병실에서도, 슬픔의 자리에도, 피곤의 자리에도, 고독의 자리에도,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7장 23절에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도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는 임마누엘의 날이 성탄절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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