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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높이 성탄 (마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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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목사 주일설교 
눈높이 성탄(마 1:18-23)                 
                         
눈 높이 공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 눈높이로 내려와서 가르치는 공부를 <눈높이 공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 사람을 이끌어주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눈높이 믿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는 믿음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눈높이를 낮추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집사님 자녀는 공부도 잘 하고 모범생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분이 안 좋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어디서 싸웠나?>
모두가 궁금하여 하다가 한 분이 왜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좋은 기색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대답하였습니다.
<교회 다른 집사님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기에 그 분 기분에 맞추느라고 좋아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같이 하려고 하는 그 집사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세입니까?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같이 하려고 하시는 존경스러운 집사님이십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눈높이를 낮추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눈높이를 낮추셨습니다.

1. 사랑의 눈높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의 눈높이를 낮추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성탄에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도저히 사람이 될 수 없는 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겠다고 찾아 오신 사랑입니다. 만일 미국 대통령이 나를 사랑하겠다고 나를 찾아 오셨다면 나는 얼마나 감격스러울 가요? 만일 내가 알지 도 못 하는 독일 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사랑하고 싶다고 찾아 오셨다면 나는 얼마나 놀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사랑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랍비는 아키바 랍비입니다. 아키바는 칼바 사부에라는 굉장한 부잣집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에는 라헬이라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모든 재산이 그의 것입니다. 재산도 많고 얼굴도 예쁘고, 가문도 훌륭하여 프로포즈하는 총각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자기 집 목동 아키바를 짝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은 사랑의 눈높이를 낮추고 아키바를 사랑하여 그를 데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움막을 짓고 밀짚을 깔고 잤습니다. 아키바는 늘 말했습니다.
<당신같은 고귀한 여자가 이런 곳에서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미안해요>
이런 말을 듣고 라헬이 말했습니다.
<당신없이 부요하게 사는 것보다 당신과 밀짚깔고 사는 것이 행복해요>
이렇게 살면서 라헬이 뒷받침하여 아키바를 이스라엘 최고의 랍비로 만들었습니다. 눈높이를 낮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할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는 불우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여야 하지만 더욱 더 사랑하여야 할 분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중세의 경건한 수도사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생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골몰하며 늘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네가 무엇을 원하기에 그토록 밤낮으로 부르짖느냐?>
그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 무엇을 주시려거든 차라리 주님 자신을 제게 주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목사님 스펄젼(C. H. Spurgeon)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주를 위해 흘리기를 싫어하는 피가 있다면 출혈시켜 주시고 찢기기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도려내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1998년 7월 24일 미국 메사츄세츠 주립대학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메리 게첼이라고 하는 93살 된 할머니가 그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심장 질환으로 쓰러져서 오랜 기간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이 할머니가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몇 시간 이내로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온 가족들이 다 와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 아들들, 자부들, 딸들, 사위들 그리고 손자들이 둘러 서 조용히 할머니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어린 막내 손녀 데이빗 로라인은 할머니가 흠뻑 사랑하면서 길렀습니다. 이 손녀가 할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 일어나! 할머니 사랑해!>
그러면서 할머니에게 키스도 하고 할머니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둘러 서 있는 가족들은 펑펑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혼수상태에 있던 할머니가 몸을 틀면서 일어났습니다.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살아났습니다. 주치의와 의사들이 보는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 뉴스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소리, 사랑하는 손녀의 소리를 할머니가 들으면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눈높이를 낮추시고 우리를 사랑하러 오신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내 주변에 사람들을 더 사랑해야 하는 절기가 성탄절입니다.
너무나 추운 겨울 살을 에는 듯한 추운 바람이 불어 오는 데 한 여인이 아파트 길에 나와 벌벌 떨며 서 있었습니다. 너무나 안쓰럽게 본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왜 길거리에 서 있습니까?>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학원에 간 딸이 시간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날 내가 학교에서 늦게 오면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기다린 생각이 났습니다. 나도 어머니에게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딸에게 그런 사랑을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1요4;7-8)

성탄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눈높이를 낮추신 사랑입니다.

2. 삶의 눈높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눈높이를 낮추신 사건입니다. 높고 귀한 천국을 떠나 낮고 추한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살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에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삶의 눈높이를 낮추시러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에게 골프운동을 하자고 권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게 골프를 하자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교인들의 3분의 2가 골프를 칠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그가 반문합니다.
<강 목사님 생전에 교인들 3분의 2가 골프칠 날이 올 까요?> 나는 즉각 대답합니다.
<안 올 것입니다>
<그러면 강 목사님은 평생 골프 안 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
나는 우리 교인들 3분의 2가 골프칠 때까지 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눈높이를 낮추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삶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를 정의하는 수천 통의 응모 엽서 가운데는 이런 정의가 있었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동정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
많은 정의가 있었지만 친구에 대하여 일등한 정의는 이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와 함께 하는 사람>
그런데 깊이 보면 온 세상이 다 떠나도 끝까지 나와 함께 남아 있을 친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내 친구 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했네
나 주님을 늘 믿으며 그 손을 의지하고 내 몸과 맘을 바쳐서 끝까지 충성하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원한 친구가 되려고 오셨습니다.
뉴욕의 한 공동묘지 관리인이 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인이 일주일에 5달러씩 돈을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같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몸이 아파서 아들 묘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들 묘에 일주일에 한번씩 신선한 꽃을 갈아 꽃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 주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수년이 흘렀습니다. 정말 꾸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공동묘지를 한 부인이 방문하였습니다. 차가 도착하자 차 뒷자리에 앉아있던 부인을 운전기사가 부축하여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쓰러질 듯이 흔들렸습니다. 곧 죽을 것같은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에는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관리인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편지와 5불을 일주일에 한번씩 보냈던 사람입니다. 제 이름은 아담스입니다.  제가 오늘 직접 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담당 의사가 내 생명이 몇 주 못 갈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세상 떠나기 전에 내 사랑하는 아들의 무덤에 내가 손수 꽃다발을 갖다 놓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부인. 그렇군요. 그런데 나는 부인에게 용서 받을 것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부인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꽃을 사서 무덤 앞에 놓을 때마다 부인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해왔습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꽃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다 시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썩어 냄새가 납니다. 그 무덤에 꽃을 꽂아 놓아도 누구 하나 향기를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냄새를 맡습니까? 좋아합니까? 그것은 부인의 생각일 뿐이고 죽은 사람은 보지도 못 하고 즐기지도 못 합니다. 저는 교회 나가는 신자입니다. 교회 옆에 공립병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가족이 없이 혼자 입원하여 있는 환자들에게 꽃을 갖다 주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꽃을 주면 너무 좋아 하였습니다. 환하게 웃었습니다. 냄새도 맡고 기뻐하였습니다.
부인께서도 매주마다 이제는 공동묘지에 꽃을 가져오지 말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꽃을 한번 갖다 줘보십시오. 죽은 사람에게 주어서 무엇합니까? 산 사람에게 주어야지요>
이 말을 듣고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이 직접 운전을 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공동묘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관리인님! 제가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꽃을 갖다 주었습니다. 아들에게 일주일에 5불씩 쓰던 돈을 아픈 이들에게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너무 너무 좋아하더군요. 좋아하는 그들의 얼굴표정을 바라볼 때 내 마음도 기뻤습니다. 내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면서 신경성 질환도 떠나고 몸이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 눈높이로 살지 않고 소외된 사람 속에 들어가 그들 눈높이로 살았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삶의 눈높이를 낮추었더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삶의 눈높이를 낮추시려고 오셨습니다.

3. 구원의 눈높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신 것은 구원의 눈높이를 낮추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려고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노아 때에는 구원의 눈높이를 낮추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죄악에 물들어 있을 때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죄악의 소굴이었습니다. 동성 연애는 음란의 극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동성연애장이었습니다. 롯의 집에 천사가 왔을 때 남자들이 와서 동성 연애하게 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그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잔인하게 그 도시 사람들을 다 땅속에 파묻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에서 구원시키러 오셨습니다. 구원의 눈높이를 노아 때보다, 소돔과 고모라때보다 낮추신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성탄절은 복된 절기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높이를 낮추시지 않으셨다면 그 때처럼 멸망당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의 눈높이를 낮추신 사건입니다. 어떤 죄로 물들어 있고, 어떤 끊지 못 할 죄로 얽혀 있다 할 지라도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겠다는 의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정녀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미국 남침례 신학교 학장을 역임한 시카고라 박사와 그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와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만일 성경에 요나가 물고기를 삼켰다고 기록했을지라도 나는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느냐>
성경은 반자연이 아니라 초자연입니다. 반과학이 아니라 초과학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의 눈높이를 낮추시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성탄 사건은 세 가지 눈높이를 낮추시려는 것입니다.
1. 사랑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오셨습니다.
2. 삶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오셨습니다.
3. 구원의 눈높이를 낮추시고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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