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로운 가지 / 렘 23:5~8 (요일 4:14~18)

  • 잡초 잡초
  • 1113
  • 0

첨부 1



제목: "의로운 가지" 
본문: 예레미야 23:5~8 (요한일서 4:14~18 참조) 
2003년12월21일 설교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같은 인물들은 단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유능한 족장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은 남의 나라인 애굽에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 출애굽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름대로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은 경우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그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였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 말씀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이 왜 없었습니까? 다만 왕이신 하나님을 애써 외면했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늙자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백성을 다스릴 왕을 세워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것이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타일렀습니다. 아니 엄청난 폐해가 있을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사무엘상 8장 말씀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며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떼를 썼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참신한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경제도 다시 일으킬 뿐 아니라 얽히고 설킨 난제들을 슬기롭게 풀어갈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진짜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세우려고 하는 지도자는 진짜 그런 지도자입니까? 혹시 우리가 찾고 기다리는 지도자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했던 왕과 같이 다만 강력한 영도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닙니까?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렘 23: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가 말하는 한 의로운 가지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로운 지도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지도자가 왜 오는 것입니까? 새 지도자가 오는 까닭, 즉 다시 말해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진짜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지도자들은 모두 다 썩었습니다. 물론 왕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악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부패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들조차 송두리째 썩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났습니다. 진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목자 없는 양 떼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죽어갔습니다.

  때문에 진짜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진짜 새로운 지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새 왕은 낡은 왕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는 무능한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이여 또한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렘 23:1) 양 떼를 바로 이끌어야 할 목자가 도리어 그 양 떼를 멸하고 흩어지게 했으니 어떻게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제대로 이끌어야 할 목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왕과 선지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레미야 22장의 말씀을 보면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23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들과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무서운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인 왕들은 도대체 어떤 왕들입니까? 그들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먼저 그 낡은 지도자들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 새 지도자를 맞을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크게 볼 때 유다 왕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실을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권력이란 본래 유다 왕실의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때문에 지도자는 그 권력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마땅합니다. 그 언약을 깨뜨릴 때 그 권력은 정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언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 왕실과 더불어 맺은 언약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도자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권력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그 권력의 존재 이유는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백성들을 섬기지 않는 권력은 모두 원인 무효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통 당하는 약자를 지키는 신성한 의무를 지도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의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히브리 노예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던 것처럼 지도자는 그 권력을 가지고 고통 당하는 약자를 구하고 또 지켜야 마땅합니다. 그 신성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 같으면 유다 왕실은 계속 유지되고 더욱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지도자가 스스로 그 권력의 존립 근거를 파괴한다면 그 권력은 존재할 수도 없고 또한 존재해서도 아니 됩니다. 때문에 그 언약을 깨뜨린 지도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2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야김 왕의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권력을 그릇되게 사용했습니다. 사치와 향락만을 추구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짓고 그 집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이 마치 권위의 척도인 것처럼 거기에만 몰두했습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법과 정의도 무시했습니다. 생각은 온통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는 것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런 왕이 망할 때 누가 과연 슬퍼하겠습니까? 그런 권력자의 죽음을 도대체 누가 애석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불의한 권력자 때문에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이 흩어질 때 과연 누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항상 그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사악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렘 23:11 참고) 선지자들도 썩었고 제사장들도 썩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 시대의 불행이었습니다. 아니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법과 불의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법과 정의를 세워야 할 종교 지도자들마저 썩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 중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볼 때 특히 심각한 문제는 선지자들이 죄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가슴을 치면서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부르짖었다면, 예레미야는 심판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잘 되고 있다고 하는 무감각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치를 떨면서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차라리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말입니까?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을 떠들어댔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예언은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잘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니야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즐겨 쓰는 말입니다. “만사형통할 것이다.” “너희에게 어떤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하는 선지자를 싫어하겠습니까? 그들은 한 술 더 뜹니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확신에 찬 이런 말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쉽게 배신하도록 합니다. 때문에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귀를 막고 듣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예레미야는 불의한 권력자들과 거짓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그리고 온몸으로 절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기다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소망의 예언자라고도 합니다. 그의 피눈물 나는 절규와 몸부림은 진짜 새 지도자를 찾고 기다리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와 함께 의로운 가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온 땅과 만민을 공의로 다스리실 그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기다림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불의와 불법, 그리고 거짓된 것들을 모두 청산하는 참된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의로운 가지로 다시 오시는 그 주님을 맞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제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게 주님만을 따르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