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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 (미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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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 
본문 : 미가 5:2~4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것에 대한 예언이 구약 여러 군데에 있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날 것, 유다 지파에서 태어날 것, 다윗의 위를 상속할 것, 헤롯이 유아들을 학살할 것, 이집트로 피난할 것.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동정녀 탄생이 예언되어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서의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이렇게 여러 군데에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원래 갈릴리에서 태어날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올라갈 이유가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예수의 탄생이 가까울 무렵 로마의 아구스도 황제가 천하에 영을 내려 다 호적을 하게 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다윗의 족속인 요셉은 베들레헴에 올라가 호적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역사를 움직이셨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약 700여년 전에 미가가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오리라.” 예수님은 아주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이 베들레헴은 유다지파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지형상 이 동네는 크게 발전할 수 없었다.

베들레헴은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땅이다. 한 예를 들자면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엿는데”라고 룻기는 시작한다. 그 아내의 이름이 나오미이다. 나오미는 졸지에 모압 지방에서 남편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갖고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 자부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오는 내용이 룻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픔의 역사를 가진 땅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베들레헴에는 총성이 멎지 않았다. 작년 4월 경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예수탄생 교회가 총탄에 맞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바로 이곳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을 미가가 예언한다. 그런데 예언의 내용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베들레헴은 작을지라도 창대해 지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말씀이다.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는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단지 베들레헴의 동네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곧 예수님의 생애 자체이다.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역사를 일으키셨다. 이 말씀을 인용한 마태는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미가는 분명히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라고 시작하였지만, 마태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작지 않다고 이미 창대케 되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다.
이같이 베들레헴은 작을 지라도 창대하여졌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작을 지라도 크게 영향을 얼마든지 미칠 수 있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비효과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표현이다. ‘미국 뉴욕 샌트럴파크에서 나비의 날개를 펄럭이면 태평양 한 가운데서 태풍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한다. 여의도에서 나비가 날개를 펄럭거리면 제주도에 태풍이 만들어 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아주 미약하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역사를 일으키셨다. 복음서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작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지만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베들레헴의 작은 시작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로 일어난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작은 시작이 온 천하로 확산되는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라.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 작은 시작이 온 족속으로 확산된다.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이 더욱 확산된다. 사도행전 1:8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작은 시작이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같이 베들레헴은 눈물이 있는 땅이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눈물이 있는 땅이다. 한이 있는 땅이다. 지금도 총성이 멎지 않는 땅이다. 그러나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이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된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에브라다는 풍성한 열매를 맺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대개 어느 동네를 부를 때에 새로운 이름을 부르지 굳이 옛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미가는 “베들레헴”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고 불렀을까?

베들레헴은 작은 곳이지만 베들레헴이 작은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동네가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리라. 베들레헴아, 너는 작을지라도 창대케 되리라. 베들레헴아 너를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에브라다의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작을 지라도 창대하여 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미가는 예언하고 있다.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에 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 때에 우리에게도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디베랴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그곳에 오천명이 넘은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식사할 시간이 되었는데 어디에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 때에 한 어린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찾아왔다. 아마도 예수님에게 한끼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예수님은 이 떡을 들어 축사하시어 그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먹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러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온다. 예수님 정도면 우리 백성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님은 떡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지도 모른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 에브라다는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브라다의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려면 우리도 생명의 떡을 먹을 때에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베들레헴이다. 즉 교회는 떡집이다. 생명의 떡이 공급되는 생명의 떡 집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여러분의 삶에서도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반드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중심하여 살 때에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어느 작은 마을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다. 목사님은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다. 목사님은 부흥회 기간 동안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한 사람이 겨우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척 실망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람,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온 이 소년만은 달랐다. 그의 눈에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다. 그 소년은 "오! 하나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이 소년이 바로 '리빙스턴'이다. 작은 한 소년의 눈에 일어났던 불꽃이 흑암의 아프리카 대륙에 새벽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의 떡이다. 그곳에서부터 창대케 해 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베들레헴은 떡집이지만 이 떡집에서 에브라다, 즉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역사가 나타난다.

이같이 예수 생명의 역사는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5살 먹은 소년이 지정헌금을 했다. 그 소년은 1페니를 헌금하면서 이것으로 꼭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지정을 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냥 우습게 지나칠 수 있는 이 5살 된 소년의 헌금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소년의 뜻대로 돈을 조금 더 보태어 아주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샀다. 그리고 그 소년의 사인을 넣어 인도로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님과 소년은 그 일을 잊었다. 20년이 지난 후 목사님은 인도의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참으로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까?" 그 마을 사람들은 말하기를 20년 전 어떤 선교사가 찾아와서 작은 신약 성경 한 권을 건네주셨는데, 그 성경이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 떨어지고 남루한 작은 신약 성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허름한 신약 성경의 마지막 표지에는 20년 전 자기 교회의 5살 짜리 소년의 사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예수생명의 역사는 작을지라도 창대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같이 생명의 역사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창대한 역사가 일어난다. 작은 씨앗이지만 그 씨앗으로부터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예수 생명의 역사는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창대케 되는 역사가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인이 해산하기가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이 말씀 속에서 고난의 아픔을 찾아볼 수 있다.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에는 고난의 아픔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수님도 부활의 큰 기쁨이 있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였다.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곧 10개월이 된다.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려면 반드시 고난의 시간을 잘 이길 때에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많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그러나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 결국에는 부인 사라의 몸종에서 아이를 낳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그러다가 백 세가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이를 주셨는데 그 이름이 이삭이다. 계속해서 역사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이 싸우고 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 제목이 “서두르면 이스마엘, 기다리면 이삭”이라고 한다. 내가 작을 지라도 창대해 지는 체험을 하려면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성도여!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작을 지라도 창대케 되리라. 생명의 떡을 먹는 자들에게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 작을 지라도 창대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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