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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젖땐 아이와 같이 (시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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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1-3
설교자 : 주승중


  1. 들어가는 말

미국의 유명한 예일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스스로 강단을 떠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회의 사제이며 심리학자였던 헨리 나우엔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스스로 버리고, 페루의 빈민가와 캐나다의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에서 장애자들을 돌보며 살다가, 주님 곁으로 떠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책 가운데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예수님은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셨고, 또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붙들어 주셨고, 또한 더 나아가 그들을 소망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들과 함께 하며,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사람들을 치유하고, 함께하며, 인도해 줄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헨리 나우엔처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명예를 스스로 포기하고 낮고 낮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돌보았던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겸손하셔서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신 주님,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주님, 그리고 마침내 그 죄인들을 위하여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주님, 대림절은 이렇게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감사하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까요?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대답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시편 131편은 흔히 “겸손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즉 다윗이 부른 이 노래는 “겸손한 인생의 노래”로 불리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겸손의 시편을 묵상하는 가운데, 겸손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상이 그런 우리를 보면서 겸손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는 복된 대림절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2. 몸 말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지녀야 할 진정한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다윗은 대답하기를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 앞에 나아갈 때에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도 자기를 의뢰함을 버리고, 젖 뗀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게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의뢰하는 교만을 버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올바로 맞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의뢰하는 교만을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를 의뢰하는 이 교만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서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교만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네,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1절) 교만은 우리의 심히 부패한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얼마나 쉽게 교만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연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키가 크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보다 얼굴이 조금 더 예쁘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배웠다고 교만합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기도한다고 해서 교만하고,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좀 더 많이 읽었다고 교만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가 십일조도 더 많이 하고, 좀 더 오래 교회에 출석했다고 교만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나는 방언도 하고, 이런 저런 은사도 받았다고 교만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은 남보다 조금 더 겸손하다고 교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들이 다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그 다음에 반드시 그 교만한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1절)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 한곳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눈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교만은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 정체를 드러내고야 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눈에 나타납니다. 즉 교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눈빛의 높음에 있습니다. 일단 내가 남보다 높다고 그 마음에 교만을 품은 사람은, 그 다음에 곧 바로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보기 시작합니다. 쉽게 표현해서 깔보기 시작합니다. 눈이 높은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는 늘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눈높이를 재며 피곤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함부로 무시하고, 높은 사람을 향해서는 시기합니다. 눈꼴이 사나워서 보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교만한 사람이 남의 교만을 제일 못 참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들 가운데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못마땅한 생각이 들고, “어, 저 녀석 봐라. 건방져”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습니까? 조심하셔야 됩니다. 당신은 이미 교만의 문턱에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교만한 눈을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들 가운데 제일 강조한 것이 바로 이 교만한 눈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6:16-19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목록 제 일호가 바로 “교만한 눈”입니다. 또 잠언 22:4절에 의하면 “마음이 교만한 것과 눈이 높은 것”은 다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05:5절에는 그렇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에 의하면 “교만한 마음”과 “교만한 눈”은 항상 쌍둥이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높은 눈으로 상대방을 내려다보며 함부로 판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하는 일은 다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교만한 눈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일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자, 이렇게 교만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눈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교만한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그의 눈에 나타날 뿐만이 아니라, 결국은 행동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즉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1절)을 무모하게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교만한 마음은 교묘하게 숨길 수 있습니다. 또한 교만한 눈도 겸손을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숨길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도, 높은 눈도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행동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은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 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내 역할이 아닌 것,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한마디로 나의 소명이 아닌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지 않은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고 싶고, 갖고 싶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지 말고 갖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나에게 주어진 일이 아닌 것, 즉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지 않은 일을, 욕심을 내어 하겠다고, 무리를 해서 갖겠다고 달려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순간에 우리가 내게 주어지지 않은 일을 욕심으로 하겠다고 덤벼들 때, 그 동기는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고백하기를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소명이 아닌 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지 않은 일, 즉 자신의 능력에 미치지 못할 일들에 힘쓰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정말로 주께서 주시지 않은 것, 주께서 확실히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바라보지도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 교만해 졌을 때에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가져서는 안 될 남의 여인을 취하는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그의 생애동안 주께서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실례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이전에, 그는 사울왕의 공격을 받아 여러 번에 걸쳐서 죽음을 당할 뻔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는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엔게디 동굴(삼상 24:1-7)이었고, 또 한번은 하길라 산 길가(삼상 26:1-12)에서 였습니다.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죽이려 추격해 왔을 때,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따르던 충신들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라”는 간곡한 청을 “나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을 내 손으로 헤칠 수 없다. 그것은 여호와께 악이니라”고 물리쳤습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그 당시에 확실히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지위를 높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남들보다 크게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들에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늘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능력에 미치지 않는 일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오늘 우리의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소홀히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가 남들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불평과 원망이 가득 차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나를 남보다 더 높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 내 눈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두는 것,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지 않은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지 않은 일을 무리를 해서 하려고 하는 행동,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평안치 못하게 만듭니다.
 
제가 미국에서 있을 때에 아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의 일류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 3때에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가신 분이었습니다. 신앙도 있고, 품성도 착하고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민교회의 장로까지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습니다. 그 분은 컴퓨터 공학을 공부를 해서 그가 사는 동네에서 조그마한 컴퓨터 가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커다란 컴퓨터 전문점들이 생겨나면서 경쟁이 되지를 않아서 그만 큰 손해를 보고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이 분이 자존심이 상해서 그 다음부터 다른 어떤 일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그 분은 “내가 그래도 한국의 일류 고등학교를 나왔고, 내 동창들은 한국에서 다 사장이요, 장관이요, 한 가닥들 하는데, 내가 아무 일을 할 수 있나?”하면서 오랜 기간동안 하는 일도 없이, 부인이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겨우 지내었습니다. 그러니 본인도 그 가족들도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눈높이와 내 수준은 이런데, 현실은 내 수준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괴롭지요. 그러니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전립선암에 걸리고야 말았습니다. 암이라는 병이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참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시간 다윗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만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높은 곳에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높은 지위를 추구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일을 해야겠다고 욕심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여호와를 의뢰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평온을 주셨습니다.

2) 젖 뗀 아이와 같이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땐 아이와 같도다” 다윗은 이 말씀 속에서 겸손한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고요함과 평온함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고요함이 있습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온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무엇인가가 늘 불안하고 편치 못하다면, 그것은 내가 겸손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일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즉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불안하고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고 있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는 교만함 가운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겸손함의 축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을까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이” 우리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때에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품에 있을 때에 가장 만족함을 갖습니다. 엄마의 품속에서만 아이들은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그냥 아이라고 하지 않고, “젖 뗀 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젖 뗀 아이 같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깊은 뜻을 가진 표현입니다. 아이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냥 어린아이, 혹은 갓난 아이 그리고 젖 뗀 아이 등 많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젖 뗀 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갓난  아이와 젖 뗀 아이는 다릅니다.
 
대게 갓 난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갓 난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의 젖을 요구합니다. 즉 아직도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은 젖에 대한 강렬한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갓 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젖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면, 이제 젖을 떼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대게 거의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젖을 떼지 못합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강제로 엄마의 젖을 떼게 되지요. 때로는 아이가 젖을 안 떼려고 고집을 부리면, 엄마의 젖에다 쓴 약을 묻히기도 해서 아이로 하여금 젖을 강제로 떼게 만들지요. 자, 그래서 젖을 뗄 때 아이는 최초로 분리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엄마도 젖을 떼면서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분리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아이는 엄마로부터 최초의 분리 내지는 거부를 당하면서 성장을 향한 고통을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나이쯤 되면 아이는 제 발로 걸어 다닙니다. 물론 자주 넘어지지요. 그러니까 젖 뗀 아이는 태어나서 최초로 홀로 서기를 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볼 때에는 별로 크게 여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당하는 젖 뗀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 기간은 힘들고 외롭고 슬픔을 느끼게 되는 참으로 서러운 기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 젖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혼자 걸어 다녀야 합니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때로는 코피도 터집니다. 그런데 엄마는 혼자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울음이 터지고야 말지요. 그러면 그 때서야 비로소 엄마는 그 아이를 안아줍니다.
 
여러분, 다윗이 말하는 고요함과 평온함은 바로 이 순간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말합니다. 즉 다윗은 지금 엄마의 품에서 최초로 분리를 경험하고, 갓 난 아이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을 처음으로 거절당하고, 이제는  힘들게 홀로 서기를 하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다가, 마침내 다시 엄마 품에 안길 때의 그 평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젖 뗀 아이는 이 순간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갓 난 아이 때에는 엄마의 젖을 빠는 것만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엄마의 젖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의 품안에 안겨있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엄마 자체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2-3살 된 젖 뗀 아이가 울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의 울음을 무엇으로 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탕을 주어 보십시오. 좋은 장난감을 주어 보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아이를 달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아이에게는 엄마의 품이 필요합니다. 엄마의 품 이외에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길 때에 비로소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곧 이어서 그 품안에서 피곤하고 지친 몸이 평안히 잠이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말하는 진실로 하나님만을 바라는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고요함과 평온함입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은사나 직분 그리고 복과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젖 뗀 아이같이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이 덜 성숙한 사람들, 그래서 때로는 교만한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만 매달립니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에만 매달입니다. 오직 복 받는 것과 은혜 받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을 항상 내가 무엇을 받았나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은 무엇을 받았나? 비교합니다. 서로의 눈높이를 잽니다. 그리고는 나는 못 받았다고 생각되면 실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결국 그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젖 뗀 아이와 같이 신앙이 조금 성숙한 사람들은 그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귀한 것은 그 복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 품안에 안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영혼의 쉼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품안에서 조용히 기도의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바쁘지만 모든 일 제쳐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에 거기에 비로소 참 치유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을 때, 피곤하고 지친 우리의 영이 참 안식을 얻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을 때, 우리의 외로움과 슬픔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참 평안이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 등의 세상의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참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백의 중편소설 “진주”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보면 주인공인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크고 값진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가난이 끝나고 행복한 삶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큰 진주를 발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진주를 보기 위해 늘 키노의 오두막집을 기웃거렸습니다. 하루는 키노 부부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그들의 아이가 다쳤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의사가 몇 번씩이고 그의 집에 찾아와 과잉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도회지의 진주 장사들은 그 진주를 헐값에 사기 위해서 폭력배를 동원해 그들 부부를 협박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밤중에는 진주를 노린 강도가 침입하기도 했습니다. 키노 부부는 진주를 지키기 위하여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고민 끝에 그 진주를 깊은 바다 속으로 다시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그들이 모든 불안과 다툼과 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평안함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시기와 다툼과 분쟁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아닌 직분, 내 소명이 아닌 직분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도 평안은 깃들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십니다.
               
3. 나가는 말

그러므로 다윗은 3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렇습니다.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갓 난 아이는 엄마의 젖으로만 만족합니다. 그러나 젖 뗀 아이에게는 엄마의 품이 더 중요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우는데 장난감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예쁜 옷을 주면 좋아하겠습니까?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칠까요?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그것만이 젖 뗀 아이에게 평안이 될 것이며, 참 만족이 될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이사야 55:1-2)
 
우리의 몸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소설 “진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세상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우리의 고통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을 그리워하며, 주만 바라본다면, 우리의 심령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모든 교만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오실 주님을 우리 심령 깊숙이 영접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면, 우리 마음속의 노한 풍랑은 잠잠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피 묻은 오른 손으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상처받은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고치시고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 젖 뗀 아이와 같이 세상에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지쳐 있는 심령들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갖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겸손한 눈,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겸손한 행실로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평화의 주님은 반드시,
그리고 속히 임하실 것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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