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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를 주시는 분 (요 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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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4:14~15 
제목 / 생수를 주시는 분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구주대망 2003년 마지막 달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달을 맞이해서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누가 가장 잘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 자신보다 더 나은 입장에서 말해 주실 분이 누가 있을까요? 성경에는 군데군데 매우 분명하게 예수께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요한복음 18장입니다. 예수께서 체포 되시고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 받는 과정에서 “당신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합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 왔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지어낸 이야기와 사실을 구분하고 거짓말과 참말을, 잘못과 바른 것을 구별해서 말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도둑놈을 향해서 도둑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인권 유린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이런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색지대가 삶의 터전을 거의 다 점령한 것처럼 보입니다. 네 말도 일리가 있고 내 주장도 맞다고 사람들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라고 선언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내가 곧 진리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주님의 뒤를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 졌습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요한복음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건입니다. 소위 우물가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네므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녀가 누구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진리를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그녀도 생명의 물에 목말라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시간상  4절부터 42절까지의 긴 이야기를 다 읽지 못했지만 줄거리를 중간 중간 나누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이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오셨는지가 또 한번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 지방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이제 갈릴리로 다시 가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그 독특한 표현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적인 배경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무엇을 함께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사흘 길이라도 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까지 가면 하루면 충분한 길입니다. 사흘 걸었으면 걸었지 사마리아 땅은 밟지 않겠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왜 모든 사람이 피하는 사마리아를 꼭 통과하시려 했을까요? 이 여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변화는 것을 보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우물가에 도착했습니다. 정오였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길가시던 주님도 지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려 마을로 간 사이에 우물곁에 앉아서 쉬고 계셨습니다.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동네에서 한 여인이 우물로 나옵니다. “물 한 그릇 마실 수 있겠소?”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 남자는 웬만해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 건네는 법이 없습니다. 말 걸칠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째서 유대 사람으로서 제게 말을 거십니까?” “글쎄요 당신이  물을 좀 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텐데요 그리고 내가 생수를 주었을 것입니다”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선 이 여인의 처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보통 물을 긷는 시간은 시원한 아침이나 서늘한 저녁때입니다. 한낮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왕따 당한 여인에게는 차라리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동네사람들의 백안시하는 눈길보다는 편안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한낮에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동네에 아무도 말벗이 없었기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말벗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면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 길을 택한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을 때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마실 물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차원 높은 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깊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을 주시겠다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계속 마실 물 이야기라고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물길을 그릇조차 없으면서 나한테 물을 주겠다니요?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크신 분입니까?” “잘 들어보세요, 댁이 긷는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안에서 솟아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 하는데도 여자는 아직도 마실 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런 물 있으면 나도 좀 주십시오. 내가 마시고 다시 물 기러 오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지금 이야기를 합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때로는 전도자는 서로 나눌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삶의 핵심 문제를 찌르고 있습니다. “댁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지요, 그리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 여인이 갑자기 표정이 난감해졌습니다.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여인입니다.

“전 남편이 없거든요,” “맞는 말이지요,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동거하는 남자는 남의 남편이니까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 전도자는 이렇게 접근하고 대화를 이어가야 됩니다. 맞다고 해야지 “내가 다 아는데 소문 들었는데” 이렇게 사람을 다그치는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게 접근해야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는 순발력 있게 화제를 바꾸려고 듭니다. “예배에 대해서 말씀해보지요, 당신 생각에는 우리가 여기 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피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핵심적인 문제로 사람을 이끌고 갔습니다.  대화가 끝날 때쯤에는 자기와 대화하는 분이 약속된 구원자요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동네에 돌아가서 자기가 만난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 모든 과거를 말해준 사람을 만나보시지요. 그 분은 틀림없는 약속된 구원자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증언으로 인해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그날 한낮에 물 길러 우물로 갈 때에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찾게 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 복된 대화를 나누리라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여인이 만난 분은 사람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과 이 여인의 만남에는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네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진리: 나는 나의 과거를 하나님께 감출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감추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혹 밀수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과거를 전지하신 하나님의 눈에서부터 숨기도록 합니까? 모든 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가 있습니다.

모든 심령을 감찰하시는, 우리의 의도조차 알고 계시는 그 분을 속이도록 합니까? 왜 그런 시도를 합니까? 우리 인생을 태초부터 그런 시도를 해왔습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완벽한 평화와 순진무구함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 때는 벌거벗음조차 부끄러움을 갖다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자마자 즉각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왔습니다. 부끄러움은 모든 것을 감추도록 했습니다. 무언가를 가리도록 했습니다. 날이 서늘할 즈음에 하나님이 동산을 찾아 묻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무얼 입고 어디에 숨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죄를 가리려했지만 하나님이 몰랐겠습니까? 몰라서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까? 아닙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감추려고 온갖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했던 수법입니다. 세 가지 해묵은 수법을 잠깐 살펴봅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무시하려고 듭니다. 부인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발 딛고 살고 있는 세상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동의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죄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악을 보고 입을 벌리지만 다른 이는 우리가 행하는 부도덕한 일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만연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범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합니다. 아무도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길보다 우리 자신의 길을 택해서 살아왔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렇습니다. 죄를 부인하려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다른 시도는 앞으로 잘해보겠다는 것으로 잘못을 덮고 갈려고 합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단을 합니다. 다만 우리의 생각과 의지로는 선을 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심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려는 세 번째 시도는 무엇입니까? 그냥 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되지 뭐”라고 혼자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내비 둬”라고 소리칩니다. 그 결과 공허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외로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우물가의 여인의 삶의 행로였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거듭 시도했지만 마음만 아팠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네로 향하는 그녀는 길은 꼭 같았지만 사람은 달랐습니다. 주님이 다가오셔서 말을 걸어주실 때 그녀의 삶을 변했습니다. 주님의 질문 앞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처음에는 피해가려고 시도했습니다. “나는 남편 없는 여잡니다.” 그 때 주님은 마치 무언가 네게 말할 것이 있다고 하듯이 그녀의 고백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예리한 지적 앞에 그녀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죄악된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과거를 훤히 꿰뚫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을 숨겨보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그 분 앞에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세상은 요즈음과 달리 여자의 그런 삶을 모두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려들지 않았습니다. 사귀면 죄악이 옮겨올 듯이 생각하고 멀리했습니다. 모두들 멀리하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뿐 아니라 반복된 실패조차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죄악은 다만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현재의 상황조차 손바닥 보듯이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으니까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실 거야, 하나님은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실거야,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시고 내 삶의 비밀을 아실 리 만무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만약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무언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른다고 감추려 들면 여러분의 영적 갈증은 해갈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 직면해야 할 첫 번째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십시오. 하나님께 정직하십시오. 정직하지 않으면 종교란 무용지물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목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진리: 예수께서는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고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왜 우린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숨기려 듭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아하시지 아니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쨌든 숨겨야 하나님이 우릴 계속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가 들통이 나면 하나님은 사랑하고 돌보길 멈춘다고 가르칩니까? 성경 아무데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이야기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모두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님의 말씀 앞에 놀란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 나쁜지 추한지 아름다운지 모두 아십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무시하듯 내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이라고 조롱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21절에는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여인이여” 아니면 “부인이여”라는 의미입니다. 부드럽게 “부인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자여”로 번역된 말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부를 때 사용한 칭호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향해서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따뜻함과 관심이 담긴 말로 다가오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언가 가르치시려고 합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무시하는 분이 아니시고 세워주는 분이십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바른 하나님의 모습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자신에게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치 큰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도 우리 모습을 있는 대로 보여주기만 하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거울처럼 우리의 실태를 비춰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진면목을 보고 깨닫길 바랄 뿐입니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라”고 호통 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놀라운 주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행로에 지치시고 더위를 식히려고 목을 축이려고 우물곁에 앉아계십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다가옵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먼저 말을 거십니다. 인종 우월감도 없었고 남자라고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종교적인 난관을 뛰어넘어 다가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십니다.

더운 날 냉수처럼 영생을 주시려 하십니다.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토록 만족시켜주시려 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물가의 여인과 사마리아 동네사람을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내 모든 것을 아시고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 구요?”

좋은 질문입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과거만 아니라 여러분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신앙인은 과거를 가지고 있고 죄인은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시고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세 번째 진리: 우리가 지은 죄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누군가 죄는 마치 신용카드 같다고 합니다. 지금은 즐겁지만 뒤에 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긁을 때는 재미가 쏠쏠합니다만 뒤에는 갚아야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까지 지불했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죄를 지은다음에야 그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 만지면 무조건 사야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물건값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계산대에 가서야 그 값을 안다고 칩시다. 그런 상점에 들어가면 아이들에게 만지지 않도록 조심을 시킬 것입니다.

“아무 것도 만지면 큰일 나 만지지 않도록 조심해”라고 신신당부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여러분이 사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늘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어 어떤 값을 치루어도 꼭 사야겠다고 마음이 바뀝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맘이 듭니다.

물건을 담아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조금은 염려하면서 묻습니다. “이것 값이 얼마죠?” “그거요, 예, 지금껏 쌓아온 명성을 치루어야 하지요, 결혼생활도 지불해야 합니다. 아이들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물론이지요” 그러므로 죄는 값을 치루고 반드시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 모두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는 가르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갈 6:7,8 표준새번역)#

다른 사람의 필요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을 씨 뿌리면 곡식대신 잡초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그가 뿌린 죄악의 씨를 거두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고 한낮 더위에 물 길러 갑니다. 혼자 우물곁에 앉아 있습니다. 본래 우물이란 온 동네 여인들이 나와서 교제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끼일 곳이 못됩니다. 동네에서 왕따 당한 여인입니다. 비싼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을 해갈하지 못하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텅빈 영혼에 갈증만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의 진리를 살펴봅시다.

#네 번째 진리: 예수님만이 우리의 깊은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한 두 곳을 살펴봅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 4:10 현대인의 성경)#

그 물은 어떤 물입니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성경 곳곳에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인생을 목마른 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기에 구약 시인도 소리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이 점에 있어서는 선지자 이사야도 같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주님께서는 성경 마지막 책 계시록에서 확인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여러분은 해갈하고 싶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목마른 영혼을 추길 수 있습니까? 마지막 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궁핍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허함과 목마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목마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정직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맡아서 책임진 목사에게도 정직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뭐가 잘못 되었지 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루 밤의 고민으로 끝내려 들지 마십시오.

한 해를 다 보내면서 삶의 허무함을, 공허함을 인정하십시오. 예수님께 목마름을 고백하십시오. “당신만이 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실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그 때 비로소 주님 주시는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달리는 길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을 기억하십니까?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마지막 절은 답합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만족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여인이 찾아 헤매던 것입니다. 파스칼이 갈파한대로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은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실 분은 성탄의 주인공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십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 예수님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소리치셨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우리는 목말라 합니다.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갈망합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마지막 든 때가 언제였습니까? 아무런 부끄러움도 후회도 죄책감도 없이 평안히 베개를 베도 잠들던 밤이 언제였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비밀은 이미 하늘에 다 폭로되었고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죄악을 기록한 목록은 이미 다 깨끗이 지워졌습니다. 여러분의 부끄러움과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말끔히 치워졌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불어 새롭게 하루를 출발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물가의 여인처럼 사람과의 관계를 사모하지만 남은 것은 후회와 실망 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어떤 이는 자녀에게 실망하고 어떤 이는 친구에게 실망합니다. 게다가 주식도 실망시키고 복권도 배반합니다.

눈 딱 감고 월급 받아 유흥업소다 오락게임이다 추구해도 월요일이면 다시 공허한 마음으로 직장을 나가는 분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서 속삭입니다. “네 영혼의 목마름을 나만 해결해 줄 수 있단다, 나면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 줄 수 있단다.” 오늘 아침 주님은 바로 이것을 여러분에게 주시고 싶어 합니다.

<기도>

만약 여러분이 목마르다면 깊은 내적 갈증을 느끼신다면 조용히 속삭이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네 모습 그대로 오기만 하라, 이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지 않겠니?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할거야” 자 이제 바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주님, 목마름을 고백합니다. 다른 방법만을 찾아 헤맨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 당신의 공짜 선물을 영생을 받아드립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내 삶 모두를 주께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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