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세계 (눅 15:25-32)

  • 잡초 잡초
  • 227
  • 0

첨부 1



성경: 눅15:25-32
제목: 하나님의 세계
2003. 12. 21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번 꼭 가보는 곳 가운데 ‘디즈니랜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명소 중에 하나가 바로 ‘스몰 월드(small world)’라는 곳입니다. 가족끼리 조그만 배를 타고 출발하면 인형들이 움직이면서 세계 각국의 문화와 특징을 아름답고,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게 나타내 줍니다. 물론 한국도 있습니다. 이곳을 보고 나면 세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교육적으로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우리 나라의 어떤 재벌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현대는 국제화, 세계화시대입니다. 이젠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얼마나 넓은 지, 어떤 곳인지, 우리와 다른 나라는 어떤 특징이 있는 지, 세계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세계를 알아야 세계에서 살고, 일하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만드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세계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있는 것이 많지만, 사실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세계에 없는 것, 없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월의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보통 세 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탕자의 관점이 전반부의 내용이고, 아버지의 관점이 중반부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의 관점이 후반부의 중심입니다. 본문은 바로 맏아들의 관점에서 후반부의 내용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탕자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집을 나간 탕자에게 많은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놓치지 말 것이 맏아들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본문에서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맏아들이 탕자와 견주어 자기는 다르다, 떳떳하다, 잘못이 없다, 우월하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30절에 맏아들이 한 말에서 그것을 대표적으로 찾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말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맏아들은 동생 탕자를 큰 죄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는 탕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교만과 우월감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것을 밖으로 터트린 불만입니다.

  여기 맏아들은 당시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께 시비를 걸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고,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던 바리새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마디로 우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다르다는 교만함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우월의식은 이방인과 비교해서 다른 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종의 구분은 유대인이 아니면 이방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구원에서 제외되고, 동물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이 편견으로 복음의 많은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 것을 바울이 깨트립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해 세워진 사도임을 말하고,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들의 우월의식은 여자와도 다른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기도문에는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 여자는 사람의 숫자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우월의식은 당시 죄인과도 다른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서 그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서 3가지의 비유를 말씀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바로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것이 비유의 배경입니다.

  당시 죄인은 창기와 세리, 병자입니다. 모두가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나타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는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속이 중요합니다. 드러나지 않아도 잠재해 있는 인간의 내면의 죄성이 더욱 무섭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남자의 우월함이 무엇입니까? 누가 정말 죄인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 죄인이나 바리새인이나 같습니다. 우월 의식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결코 우월 의식이 없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도토리 키 재기’ 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토리는 작은 것인데, 크다고 하니 큰들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는 조금 나아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로지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우월 의식이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천국이 그런 곳입니다. 많다고 대우하고, 없다고 멸시하지 않습니다. 우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늘 겸손히 하나님의 세계에 머물러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비교의식이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맏아들은 일관적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아주 강하게 따집니다. 그리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를 탕자와 비교하면서부터 입니다. 탕자가 나가있을 때, 아버지가 기다릴 때, 그때 맏아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화를 낼 일도 없었고, 따질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화를 내게 된 것은 탕자가 돌아오면서부터입니다.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어떤 사랑을 받고, 어떤 은혜를 누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탕자와 비교하면서부터 거친 사람이 됩니다. 자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탕자와 자기를 같이 대우하거나, 아니면 더 낫게 해주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입니다. 바로 이것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나라의 특징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이것을 내세웁니다. 이것을 통해 이득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 어떤 것보다 비교의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세상나라에서 비교 당하여 곤욕을 치루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하나님의 세계까지 이어진다면 신앙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비교하지 않으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나바’이고,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갈렙’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당시 바나바는 바울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고, 먼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바울이 바나바 보다 앞서갑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역사를 주도하는 큰 사람이 됩니다. 그런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사역은 가리워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바울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바울과 비교하며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는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를 살던 갈렙도 이런 면에서 뛰어납니다. 출애굽시대에 두 사람은 모세의 뒤를 잇는 후계자의 쌍두마차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렙이 훨씬 더 지도력에서 인정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됩니다. 만약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비교의식을 갖고 살았다면, 그는 사사건건 여호수아의 뒤에서 그의 발목을 잡고, 가시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갈렙은 누구보다도 여호수아를 존중하고, 따랐습니다. 그에게는 비교의식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바나바나 갈렙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교의식’은 없었지만 ‘목표의식’은 가졌습니다. 목표의식을 갖는 사람은 위를 봅니다. 위를 보면 옆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위를 못 보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옆을 보면서 열등감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말하여 듣기가 싫었습니다. 어느 날 또 아버지가 말합니다. ‘링컨은 너 만할 때 집안 살림 도맡아 하고, 똑똑하고, 공부 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런데 네 그 꼴이 무엇이냐’ 이 말을 듣던 아들이 화가 나서, 한마디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 나이 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도 사용하시고, 갈렙도 쓰셨습니다. 바울도 소중했지만, 바나바도 귀한 존재입니다.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여 상대방에게 상처는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비교의식이 없습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비교의식을 갖지 마십시오. 나대로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섭니다. 이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위를 바라보시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공로의식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따지는 말 가운데 가장 듣기 거북한 것이 29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맏아들은 지금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가정을 위해, 뭔가 큰 일을 감당한 것으로 말합니다. 마치 자기가 다 하는 것처럼 핏대를 올립니다. 물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맏아들은 탕자와는 그런 면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입으로 말하면, 그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 알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정말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수고한 것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3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것이 맏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입에서 이 말이 터지는 순간,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오래 전부터 이런 공로의식을 가지고 일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의식적인 수고를 했습니다.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우월의식, 비교의식을 갖던 아들이라면 그것도 가능합니다. 공로의식을 갖는 순간부터 인간은 교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이 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의 고백 속에서 정말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바울 만큼 일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만큼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청춘과 정열과 온 마음을 다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했습니다. 명성도 얻고, 인기도 가졌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지금까지 살아오고 일한 것에 대해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의 나 된 것,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쓰신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삶이요, 신앙입니다. 그에게는 공로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사용하셨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공로의식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면 일등공신들이 득세하고 자리를 잡아 휘두릅니다. 요즘 정치세계와 대통령 측근이 문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것이 미국과 다릅니다. 미국은 대통령을 만든 사람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일등공신이기에 빠지면 안됩니다. 일등공신은 반드시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우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잘못됩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예가 많습니다. 조선시대 반정이 일어나면 임금은 공신을 세우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공신들이 결국 나라의 주도권을 잡습니다. 정말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다른 면의 쿠테타 입니다. 임금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반정을 일으켰으면, 성공한 뒤 자기들은 빠지고 참신한 사람을 밀어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돈의 팔촌까지, 3대 4대까지 자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제도화시켰습니다. 그러니 정권만 바뀌었지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 슬픈 역사가 오늘도 계속됩니다. 일등공신이 자리를 버리지 못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실세로 힘을 과시합니다. 이것이 세상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일등공신 일수록 자기를 감추어야 합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자기는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어떤 일을 하고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몰라주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작은 일을 하고도 마치 큰 일을 한 것처럼 떠벌리지는 않습니까? 사람에게 협박하고,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기 상을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는 상을 의식하고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다 받으면, 하늘에서 무엇이 남겠습니까? 공로의식은 애초부터 버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나는 빠져야 합니다. 날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백성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세계를 분명히 아십시오. 거기에는 우월 의식이 없고, 비교의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로의식도 없습니다. 나는 종이요, 하나님만이 주인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며 한해를 결산하는 뜻깊은 계절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날마다 나의 나된 것은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겸손히, 그러나 자신감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