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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절제 생활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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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리스도인의 절제 생활
성 경 : 고린도전서 9장 24~27절

기독교 신앙은 묵상하고 명상하는 사색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생명 종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했습니다(약2:26).

예수님께서는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기본 룰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했습니다(잠25:28). 베드로후서 1장 5절에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절제는 기독교 윤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눈은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귀는 듣고 싶은 것 다 듣고, 손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입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자합니다. 만약 이 정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이는 마치 급 발진한 자동차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고, 신의 성품에 도달하고자 하며,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성도라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의 삶에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정상을 정복한 모든 사람들은 극기와 수련, 인내와 절제라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김으로, 인생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승리할 수 있는 삶은 어떤 삶인가?

Ⅰ. 물질생활에 절제가 있어야합니다.
잠언 16장 8절 말씀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 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경제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생활에는 철저한 절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관련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명망있는 학자, 이름 있는 정치가가, 돈 많은 재벌이, 장관이, 장군이 물질의 덫에 걸려서 초라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고, 또 오늘 보고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 물질관은 할 수 있는 대로 벌어라(Gain all you can)! 할 수 있는 대로 아껴라(Save all you can)! 할 수 있는 대로 주라(Give all you can)! 입니다. 신앙인의 물질생활에는 철학과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데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치부하는 것은 귀한 물질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돈을 쓰는데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내가 수고하여 내가 번 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덕이 되도록 바로 사용해야합니다.

오늘날 가구당 부채가 3천만원이 되고, 신용불량자가 360만이나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있지만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쾌락은 살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운동기구는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친구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우정은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불란서에서 20년 동안 위조화폐로 살아온 노인이 붙잡혔습니다.
그 사람이 20년 동안 위조지폐로 살면서도 붙잡히지 않은 것은, 그는 꼭 필요할 때에만 최소한의 위조지폐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폐범도, 절제를 하는데 오늘날 이 사회는 물질의 사용에 절제가 부족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Ⅱ. 공동생활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 교회, 직장,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이면서도 공인입니다. 그러므로 내 취향이나, 내 뜻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공중질서라는 것이 있고, 공중도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공동생활에 있어서 내가 다소 불편해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여러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 는 데는,

1.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으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니라”고 했습니다.

2. 보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눈은 죄악이 들어오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보면 안 될 것을 봄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먹고 범죄 했습니다(창3:6).

다윗은 보면 안 될 남의 아내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삼하11:2). 오늘날도 허영과 사치와 음란과 방탕과 도적질과 살인은 눈으로 보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3.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잠언 23장 29절에서 32절에 “재앙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내 자신을 절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레일을 전속력으로 질주합니다. 욕망이라는 항아리는 밑이 없습니다. 부어도 부어도 족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에는 안전 속도가 있습니다. 이 제한 속도를 넘으면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의 속도를 최고로 내는 것이 행복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힘을 안배하고 속도를 조절하는데 실패하면 경주에서 실패하는 것처럼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결코 신앙생활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실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롬8:26).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내 속에 임하실 때,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고,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했습니다(행1:8).

성령의 충만을 받고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서 자신을 다스리고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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