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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제하는 삶을 살자 / 딛 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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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살자

본문: 딛1:7-8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

새해 벽두에 파산을 한 사람과 크게 성공한 기업가가 함께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파산한 사람에게 기자가 "실패의 요인이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낭비였습니다. 사업이 한창 잘 될 때 돈을 종이처럼 썼죠."
이번엔 성공한 재벌에게 기자가 "기업이 일어선 요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절제였습니다. 사업이 한창 잘 될 때 종이를 금처럼 썼죠."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항상 편안한 집에서 재미있는 음악이나 감상하고 맛좋은 음식이나 즐기고 살겠다고 하면 사람으로 똑바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신의 욕망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루소는 "절제와 노동은 가장 훌륭한 두 의사들이다. 노동은 식욕을 돋구고 절제는 지나친 탐닉을 막는다"라고 했고, 에드워드는 "절제와 육신과의 관계는 종교와 영혼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절제는 건강과 힘과 평안의 기초요, 근원이다."라고 했으며, 중국격언에 "절제는 최선의 양약이다."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솟아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절제를 강조했고 절제 생활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욕망을 절제하기보다는 될수록 많이 표현하고, 많이 충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엇이나 지나치면 폐단과 비극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변함 없는 리듬이 있습니다. 밤이 가고 낮이 오고 춘하추동 네 계절이 어김없이 바뀝니다. 이것은 자연의 리듬입니다. 생명과 생활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의 돈을 벌어서 얼마의 돈을 쓰면서 삽니다. 이것은 경제생활의 리듬입니다. 이 리듬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전한 생활이요 행복한 생활입니다. 이 리듬이 깨어질 때 심신의 병이 생기고 생활의 타락이 옵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절도가 있어야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만해야 된다. 이 이상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가 있습니다. 그 올바른 정도를 지키는 것이 절도요, 절도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하지 않고 과용할 때 방탕이니 낭비니 무리니, 탐욕이니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악이 생깁니다. 이 악이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정신을 병들게 하고, 생활을 가난하게 하고, 도덕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분수를 지키고, 분수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낭비하면 가난뱅이가 되고, 건강을 낭비하면 병자가 되고, 정신을 낭비하면 폐인이 되고, 시간을 낭비하면 패자가 되고, 정력을 낭비하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절제하는 사람이 되어 절제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절제에는 극기와 용기의 덕이 필요합니다. 극기와 용기와 덕이 없이는 절제의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과소비입니다. 과소비의 부작용이 지금 이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외국 언론들이 일하기 싫어하고 향락을 추구하는 우리의 풍토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절제와 건전한 생활과 사회의 건설, 이것은 우리 누구나가 꼭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부터 절제와 절약운동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지나친 낭비와 소비로 인해 환경까지 오염시키는 일이 성행하고 있는 이때 그리스도인은 절제와 절약을 통해 자녀들에게 낭비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주고 전등하나, 휴지 한 조각도 아끼는 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는 어려운 곳만을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일체의 생활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작물에 의한 수입에만 의존했습니다. 여유 돈은 모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진수성찬을 대해도 토스트 두 조각, 뜨거운 홍차, 계란과 과일을 조금 먹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검소함으로 천국에 이를 사람"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스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몸소 검소함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항상 흐트러진 풍요로움을 압도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절제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어떤 죄악이나 잘못된 습관의 지배 아래 있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절제는 먹는 일, 마시는 일, 성생활, 감정 표현, 혀를 사용하는 일, 시간 사용, 등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절제와 반대되는 것들은 성적 부도덕, 불순종, 게으름, 방탕함, 우상숭배, 증오, 질투, 시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당 짓는 것, 변덕스러운 감정, 술취함과 방탕함 등입니다. "절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사리 사단의 희생물이 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까지 심한 피해를 입힙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깨끗한 목표를 두고, 올바른 방향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딤전3:2,11)
북미에서 유적을 탐사하던 답사단이 한 오지에서 광부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두막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두 개의 해골과 많은 금을 발견했습니다. 왜 두 광부는 많은 금을 모으고 죽었을까? 한 단원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금을 계속 캐는 욕심에 북쪽은 일찍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적당량의 금을 갖고 빨리 이곳을 떠났어야 했습니다. 엄청난 눈보라를 맞았을 땐 이미 식량도 바닥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금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겠죠"
욕심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친 욕심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깊은 산 속에 사는 멧돼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거리다가 뜻밖에 많은 도토리들이 땅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멧돼지는 정신 없이 다 주워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멧돼지는 낙엽을 파헤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여러 알의 도토리들이 또 나왔습니다 미련한 멧돼지는 맛있는 도토리가 땅속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먹고 나면 계속해서 땅을 깊이 파헤치기만 했습니다. 결국 도토리 나무가 견디지 못하고 멧돼지 위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멧돼지는 도토리 나무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인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지 못할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다가는 미련한 멧돼지처럼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중의 하나가 바로 절제라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삶의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일지라도 불의한 것이라면 단호하게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한 사람은 성벽이 없는 성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25:28) 그리고 절제하는 생활은 우리 삶을 승리하게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이 말씀은 인생 승리는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도 절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새겨두고 절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물질에 대한 절제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은 삶의 도구이지,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물질에 대해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탐관오리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물질에 대하여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범죄가 물질로 인해서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은 물질에 대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에 어진 신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나라가 잘살게 되었는데 왜 식탁에 상아젓가락이 오르지 않고 아직도 나무젓가락이 오르는가."라고 불평했습니다. 이 때부터 어진 신하는 몹시 근심하며 두문불출했습니다. 동료들이 근심의 연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상아젓가락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게 아니네. 상아 젓가락을 장만하면 그 다음은 금그릇이요, 그 다음은 산해진미요, 그 다음은 금상이요, 그 다음은 아방궁을 장만하려 할 것인데 그러면 백성들이 고통당할 것 아닌가."
둘째, 이성관계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관계가 잘못되어서 패가망신한 경우와 가정 파탄이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음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는 언제 에이즈 병에 걸리고 암 병에 걸릴지 모릅니다. 앞으로는 절제하는 사람만이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
셋째, 자기 감정을 절제해야 됩니다.
영국에 유명한 성악가 헤비 라우더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영국의 큰 극장에서 독창을 하는데 노래하는 도중, "당신의 아들이 전선에서 싸우다가 전사를 당했습니다."라는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웬만한 사람이면 이 독창회를 그만두고 집에 달려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라우더 경은 자식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대 뒤에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래를 불렀는데 전보다 더욱 영감 있는 독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창회를 다 끝내고 스코틀랜드의 자기 집에 돌아가 기다리던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눈물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때가 있고, 남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마음 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동물은 감정과 본능에 의해서 생존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때로는 감정과 본능을 이겨갈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때로는 화내고 싶을 때도 계셨고, 배신감을 되씹을 때도 계셨고, 자기를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도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자기 감정을 이겨 가신 분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아셨습니다.
넷째, 말에 대해 절제해야 합니다. 터어키 남쪽에 있는 타우러스 산맥에는 두루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꽥꽥거리는 울음소리는 유난히 크고 시끄럽다고 합니다. 특히 이 두루미들은 하늘을 날 때 더 큰소리를 내는데, 이로 인해 많은 두루미들이 독수리에게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때문에 경험이 많아 노련해진 두루미들은 날기 전에 자갈을 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노련해진 두루미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하는 입에 대해 절제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다섯째, 명예욕에 대해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명예욕이 지나치면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고, 사람에게 칭찬 듣고, 잘 보이려고 힘쓰면 자연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
여섯째, 먹는 것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잠28:7)
음식은 골고루 잘 먹어야 하지만 과식은 금물입니다. 과식하면 암이 잘 걸린다는 것이 현대의학에서 입증돼 있습니다. 과식하는 사람의 혈액에는 프리 래디컬(free-radical)이 급증합니다. 프리 래디컬은 활성산소라고 하며 이 활성산소가 동맥경화를 유발하고 노화를 촉진시키며 특히 암을 일으킨다는 것이 일찍이 밝혀졌습니다. 노화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UCLA(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 월포드 박사는 실험을 통해 적게 먹은 쥐가 30% 정도 수명이 연장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화창한 어느 가을날, 한 농부가 토실토실하게 여문 옥수수를 엮어 나뭇가지에 매달았습니다. 한 다람쥐가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농부의 눈을 피해 옥수수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에 올라가 배가 터지도록 옥수수를 먹어댔습니다. 며칠 후 농부는 나무 밑에 떨어져 죽어 있는 다람쥐를 발견했습니다. 너무 먹어 둔해진 몸을 이끌고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다람쥐처럼 절제를 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23:21)
일곱째, 몸을 더럽히는 것에 대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 마약, 도박 등 몸을 더럽히는 일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 75%의 사람들이 술 담배를 하고 청소년들의 70%가 흡연하며 여대생들도 독실한 신앙인이 아니고는 거의 다 맥주를 마시고 못 마시면 도리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술 취함이 모든 악덕의 근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미국에서 거지가 되어 얻어먹는 사람을 만나 얘기하다보니, 판사요, 법학 박사였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어느 날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한 번 해보라고 마약을 주 길래 장난삼아 한 번 한 것이, 차츰차츰 중독이 되어 가정이 파탄되고, 변호사업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가 자기 멸망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육신의 쾌락으로 인간들을 타락시키며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덟째, 과소비, 사치, 향락, 즐길 거리에 대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과소비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때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안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소비는 생활을 망치는 독소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허영이 가득하고 돈을 마구 쓰는 제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사실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라며 건방진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제논은 엄한 목소리로 야단쳤습니다. "그러면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에 소금을 마구 집어넣어도 된다는 말인가?"
돈을 낭비하면 가난뱅이가 되고, 건강을 낭비하면 병자가 되고, 시간을 낭비하면 패자가 되고, 정력을 낭비하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됩니다. 절제하지 않을 때 사치와 방탕과 탐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악이 생깁니다. 우리는 사치하지 말고 과소비를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중요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과 책임이 있는 생활을 할 의무>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 좋다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오늘이 좋다고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훗날 내 이름의 아름다운 평가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사치를 부려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사용하고 좋은 일을 위해서는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회갑 잔치를 위해서 천만 원을 사용하는 것을 줄여서 뜻 있고 소중한 일을 위해 그 일부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사용할 줄 아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과 가치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력 있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적인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한 반에 두 명의 아이만 국산품 운동화를 신고 있다고 합니다. 운동화는 국산품이 어느 나라 제품에 못지 않은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기를 살려 준다고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은 아이들을 붙잡고 이렇게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얘야, 국산품 하나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치 때문에 외제를 사는 것은 오히려 안 좋은 것이란다." 그렇게 이해를 구하면 아이는 더 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성실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과장하는 자세! 이것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성실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과장이 심하면 내실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내실이 있는 사람은 구태여 과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부자는 오히려 검소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헨리 4세 때 백성들이 너무 사치를 하니까 왕이 마지막으로 이런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삽시다." 그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그래서 담화문 밑에 한 줄 더 집어넣었습니다. "단, 창녀와 사기꾼은 예외입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사치 풍조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절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품을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경건성을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절제는 육체적 경건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명령을 육신에 보전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치와 허영, 낭비는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검소하고 깨끗한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도록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절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소망을 가지므로 절제할 수 있습니다.(고전9:25)
제가 잘 아는 홀어머니 한 분이 부산에 계십니다. 그분은 행랑을 하시고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공하고 장성했는데도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으시고 혼자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사셨습니다. 자식들이 “어머니, 이제는 아파트로 이사 가시지요. 아니면 단독 주택으로 옮겨가시게 해 드릴게요”하며 졸라대자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나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라. 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을 반드시 유리로 지어야 하느니라. 유리뿐만 아니라 기둥을 꼭 12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의 밑바닥은 반드시 보석을 박아야 하는데, 그 보석의 색깔이 다 달라야 하고 문은 12개 만들어야 한다.” 자식들은 “어머니, 농담하지 마세요.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하자, “없으면 그만둬라. 나는 그 집을 하늘 나라에 갖고 있으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또한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사셨던 이 어머니의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빛나고 영광스러운 상속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낙망하게 한다 할지라도 위축될 필요가 없으며, 절제하고 검소한 삶을 살게 합니다.
2. 성령을 힘입어야 절제할 수 있습니다.(갈5:22-23)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 욕심을 버리고 절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무화과나무와 개암나무 열매가 잔뜩 들어 있는 주전자 속에 그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소년을 그 주먹에 쥘 수 있을 만큼 한껏 쥐었는데, 주먹을 끄집어내려 하니 주전자의 모가지가 가늘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열매는 조금도 잃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그 손을 끄집어 낼 수도 없고,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그 불운을 몹시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충실하고 정직한 사나이가 소년에게, 이런 현명한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얘야, 지금의 그 반만 쥐어 보렴, 그렇게 하면 당장 잘 될거다."
3. 바른 교훈을 받음으로 절제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라"(딛2:1-2)
4. 인내하여야 절제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인생은 정말 짧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어진 것을 가지고 절제와 검소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길이고, 우리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참다운 기독교 정신일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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