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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와 성도 (마 16: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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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 13-25                                     
“교회와 성도(The Church and the Followers)” 

오늘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대강절이라 함은 2000년 전에 이미 오셔서 우리 인류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기를 희망하며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강절을 통해서는 이러한 기다림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강절 첫째, 둘째 주일에는 이 기다림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고, 지난 주일에는 교회란 바로 “공동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과 비교도 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들을 간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간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참다운 교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이러한 원칙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아무리 주장한다 해도 그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렇게 교인으로서의 모습을 잘 간직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도 간직하는 모습일 뿐만 아니라, 성도님들 각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모습을 늘 염두에 두고 자기 자신을 늘 점검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 전서 9:24-27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권고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본질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확실해지고, 나아가서는 교회도 교회다워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다.

저 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서 구원을 받는 목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은 성경말씀에서 이에 대한 도전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에스겔 3:17-21의 말씀입니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을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악인을 깨우쳐 주었는데도, 그 악인이 그의 악한 행실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또 만약 의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올바른 길에서 떠나서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 의인 역시 죽게 할 것이다. 네가 그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의인이 범죄하지 않도록 네가 깨우쳐 주어서, 그 의인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그는 경고를 달게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살게 되고, 너도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저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목사라는 입장에서 버림받지 않아야 되겠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늘 도전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모두 교회생활을 바르게 잘 감당함으로 우리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모습 속에 교회도 교회다워질 수 있는 비결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른 교인이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교회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언급이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성도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같이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얼마 안 되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상심도 하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 아니라,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좀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베드로가 받은 칭찬과 책망을 거울삼아 교회생활을 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교회도 교회다워지리라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베드로와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날 교회에서의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언제인지를 알면, 우리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할 때 칭찬 듣는 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수 있을 것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소리를 왜 듣게 되었는지를 알면, 우리 역시도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게 되리라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하시려고 했는지를 발견한다면, 우리 역시 어떠한 자세로 교회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칭찬 듣는 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델을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베드로의 대답은 왜 나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었을 때,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더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다시 물었을 때 베드로가 한 대답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대답을 듣자 곧 이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려면 이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하면 되리라고 믿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의 원형이라고까지 알려진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보내 주시는 가장 귀중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의미입니다. 그만큼 귀하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나타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면서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도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지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곧 “하나님 그 자체”를 의미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나라의 왕들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신(神)의 아들”로 여기고 섬김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고대 국가에 있어서는 그들의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을 지칭하는 칭호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의 그리스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메시야로서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시하시고자 하신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므로 이 고백은 귀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백은 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무한한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이 “베드로”라는 말은 곧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기초로 세울 수 있는 커다란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듣기 위해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주라는 사실을 같이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우리의 입장으로 바꾸어 해석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은 우리 주님이라고만 소유하려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늘 간직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교회 생활을 바로 잘 감당할 때 우리 자신의 구원을 받는 것이고,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귀한 모습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는 모습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역시 베드로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은 베드로는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돌)라는 이름은 교회의 기초로서의 반석이지만, 잘못되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나름대로의 결심을 말하십니다. 이제는 이러한 결심을 말해도 될 때가 되었다고 믿으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여러분들 잘 보세요. 이 21절 말씀을 마태가 쓰면서 예수님을 뭐라고 지칭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다른 구절과 비교해 보세요. 13절, 17절, 22절, 23절, 24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냥 “예수께서”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21절에서의 모습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자격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는 이렇게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베드로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베드로의 말은 아주 다양한 표현들로 섞여 있습니다. 어떤 것들 입니까? 첫째는 주님을 꾸짖는 자세가 있습니다(“간하여” / rebuke).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어려움에 대해 자기가 희생하겠다는 자세도 있습니다(“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는 이 일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배어 있습니다. 다섯째로는 순간적 기도의 형태도 있습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순간적 기도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표현을 “주여, 당신에게 은총이 있기를!”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는 짤막하지만 베드로의 생생한 육성 기도의 한 토막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이 반응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애정과 확신과 꾸짖음과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도하는 모든 자세가 예수님에게는 어떻게 각인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23절 하반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예수님은 해석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메시아로서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베드로는 고난당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조금 전에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예수님은 사탄의 작용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의 이 모습은 예수님이 받은 네 번째 시험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모습을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이 모습의 궁극적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무엇입니까? 24-25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렇게 주님을 생명을 다 해 따르고자 하는 각오와 헌신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그 메시아의 뒤를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작용에 빠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이렇게 사탄의 작용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하면 바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역할을 한 베드로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이기도 한 동시에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기관과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와 정치는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앞장서서 일하게 이끄는 지도력이나, 국민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서 수고할 수 있게 하는 지도력이나 비슷한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정치적인 수단과 기술을 교회에 도입하여 쓰기도 합니다. 또 어떤 정치가들은 교회 목회자의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의 정치적 역량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와 정치의 모습은 비슷한 데도 많고 추구하는 모습도 같은 모습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는 반대하는 사람을 내쳐야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지만, 교회는 이렇게 내치는 방법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바르게 잘 이끌고자 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2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여기서 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예수님의 표현 역시 다양한 모습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마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에게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내 뒤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냥 “물러가라”하면 “없어져 버려라”고 하는 내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는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것은 “내 뒤”라는 서야 할 장소를 제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가 설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뒤인 것입니다. 즉, “내 뒤로 가서 다시 나를 따르라”라는 것입니다. 한 편으론 쫓아 보내신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뒤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모습(Followers)이 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뒤에 서서 그를 따라 간다는 것은 주체성을 상실한 용기 없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에까지 동참하게 되는 바로 그 모습임을 있지 마십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신앙 고백에 잘 들어맞는 예수님이 칭찬하신 바로 그 모습인 것을 간직하고 감당해야 될 줄 압니다.

이제 대강절을 통하여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바로 그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들이나 우리 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신 모습을 간직하고, 또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들을 조심하고,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자리에 서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구원을 간직할 수 있게 되고, 우리 교회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신 교회의 모습을 지니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면 매이게 되고, 풀면 풀리게 되는” 그 귀한 영적 권세를 넉넉히 지닐 수 있게 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던 제자를 사탄으로까지 표현하면서 엄격히 간직하려고 한 예수님의 이 교회에 대한 시작점을 잊지 마십시다. 시작부터 인간적인 것으로 타협이 되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자존심과 모습을 지켰기에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은 받았지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이 예수님의 쓴 충고를 받아 들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이러한 교회와 베드로의 뒤를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귀한 모습들이 다 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신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가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르고 온전한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주장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교인들이 되게 하시고,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의 경고를 늘 염두에 두는 교인들이 되게 하시고, 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가는 교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러한 교회 생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고, 우리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바로 그 교회가 되게 하시며, 그리하여 이 세상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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