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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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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성경말씀 : 누가복음 12:13-21

한번은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상속 재산을 나와 나누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시간 저는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이 사람은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했으므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던 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메시야 곧 구세주께서 오셔서 활동하시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 요한에 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400년 만에 출현한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 세례 요한이 목청을 돋우어 외친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고 했습니다.

고대에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왕의 사자가 미리 나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맞이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 앞서 와서 그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사명을 띠고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수천 년 동안 고대하던 메시야가 오셨으니 그 시대가 보통 시대와 같을 리가 만무합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셨건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시는데도 이 사람의 마음은 아버지가 물려준 상속재산을 나누어 갖는 일로 가득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이 그에게 아무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께서 페리보트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던 중에 배가 조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객선과 함께 수장되지 않기 위해 선원의 안내를 받아서 차례로 구명정에 올라탈 것입니다. 구명정은 사람들만 타기도 비좁기 때문에 물건을 가지고 탈 수 없고, 오직 몸만 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상황을 알기에 순순히 빈손으로 구명정에 오릅니다. 그런데 구명정에 탈 생각은 하지 않고 선실을 돌아다니면서 선객들이 두고 간 가방을 뒤져서 귀금속을 거두느라고 마지막 구명정을 탈 기회를 놓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두고 참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은 때를 분간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때에는 오직 생명을 건지는 일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귀중품이 있다할지라도 흔쾌히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건지는 일보다 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때를 분별할 줄 모르면 하찮은 것을 위해 큰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고 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54)…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눅 12:54-56)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일기는 잘 분별합니다. 요즘은 기상청이 있어서 첨단 과학기재로 기상 변화를 매우 정확하게 예고합니다. 또 사람들은 국내외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주가 동향을 예측합니다. 사업가들은 관련국가의 경제 상황을 분석해서 수출입을 조절하고 투자 여부를 결정합니다. 내일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예측을 잘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많은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정치나 경제와 관련해서는 민심의 동향을 수집하고 경제지표를 파악하는 등 미래 예측에 힘을 쓰면서도 인류 역사의 종말이 얼마나 가까운가를 분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이 역사의 시계로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런 것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분간하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밤이 깊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은 잠이 들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자,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향락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곳곳에서 흥겹게 노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들은 향락의 밤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법입니다. 머지않아 동녘에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동녘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곧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추고 즐기던 사람들은 새벽이 되면 다 잠에 골아 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분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밤이 깊어도 잠자지 아니하고, 자다가도 깨어 일어나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안일과 타성을 벗어던지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심히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번영을 이룩하였고, 그것은 향락위주의 생활을 부추겼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무려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마 노아는 방주만 짓지 아니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경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사람 정도로 여겼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각이 없었으면 노아와 그 가족과 짐승과 새들이 다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는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기상 이변이 생겨서 홍수가 났나보다, 곧 비가 그치겠지 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줄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과거보다 더 빈번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국가간의 전쟁뿐 아니라, 민족 분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12월 26일 새벽에는 이란의 밤 시에서 강진이 발생해서 9만 명이 살던 도시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죽은 자만 최소한 2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보면서도 그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니 예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성경의 예언대로 지금은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성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니, 말세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이천 년 전에 기록한 성경이 현대인들의 실상을 이처럼 정확하게 언급하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하면 안 됩니다. 탁월한 석학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참고할 필요가 있지만, 무조건 따라가면 안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영적으로 깨어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느 때인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오해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 호칭 자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보고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정식적인 랍비 교육을 받으신 적은 없지만 다른 랍비들보다 더 권위 있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백성들은 이같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 따랐습니다.

그 당시 랍비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 뿐 아니라, 법적 다툼이나 유산 분쟁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이 보통 랍비와는 다른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는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개인의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합당치가 않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모여 왔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중에는 니고데모처럼 영적인 목마름 때문에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으나, 단지 호기심으로 또는 떡을 얻어먹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역시 많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고소할 빌미를 찾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헤롯 당원들이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적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튿날에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아침, 예수님과 그 사람들 사이에 떡을 주제로 해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지난날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산 일을 거론하면서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줄 표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갖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무속적 기복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자나 깨나 복 받을 생각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고, 또 기독교가 마음에 드니까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아는 사람 따라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교회에 나왔건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 이후에 생명의 주님을 올바로 믿게 되었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이 가고 해를 거듭함에 따라서 바른 신앙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므로 믿는 단계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구원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탁월한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또 그는 헬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 역시 세상 지식으로 치자면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한 때는 그 지식을 믿고 행세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자기가 자랑했던 지식이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도 한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의 그 어떤 보화도 하찮은 쓰레기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고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예수 한 분으로 행복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이 사람은 재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알았기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요구한 사람은 바로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 이 부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한 해 지은 수확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많은 전답을 가진 대 지주였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이 부자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고 부정행위를 한 것도 아닙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농사를 지었으므로 그의 소득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보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부자는 부의 축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로써 영혼의 문제조차 해결할 수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부자는 돈 버는 재주는 탁월했으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어리석은 사람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가 어리석은 까닭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죽어 본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시 104:29).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고 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불러 가시면 그 즉시로 죽습니다. 어느 때에 영혼을 불러 가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건강하다고 오래 살고 병약하다고 빨리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무병 강건하던 젊은이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돈에 달려 있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그는 심중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끝마다 “내가” “내가”를 연발합니다.

욥과 같이 신실한 신앙인은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 이 부자는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제 능력으로 이룩한 줄로 착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원래부터 내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4장 7절에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면서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선한 사업을 위해 쓰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수백억, 수천억을 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하는가 하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제도를 만들어 시행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 같이 모아둔 재산을 다 쓰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부르시면 고스란히 놓고 가야 합니다. 결국, 모아만 두고 한 푼도 가지고 가지 못했으니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인데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힘썼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더라면 하늘에 보화를 쌓은 지혜로운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항상 영적으로 깨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시든지 기쁨으로 영접하는 슬기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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