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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삶 (롬 1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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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삶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떤 남자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글을 쓰는 의욕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친구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뒤에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지냈다네. 그래서 나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 듣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네."
친구는 알았다는듯이 잠시 뒤에 그에게 몇 장의 처방전을 써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보게, 이 처방전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라네. 시간을 정해 놓고 약을 먹듯이 이 처방전들도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차례대로 펼쳐보아야 할 것이네. 그리고 이 처방전들은 자네가 어린 시절 에 자랐던 고향 바닷가에 가서 열어보게나."

그는 친구가 일러주는대로 고향 바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첫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이 처방전을 열어볼 때면 자네는 이미 바닷가에 가 있을 것일세. 그곳에 조용히 앉아서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소리, 갈매기소리를 한 두 시간 정도 들어보게나."
그는 조용히 앉아서 친구가 일러주는대로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린 시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마음속에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머리에 떠 올려보게나."

비록 지금의 그의 삶은 깊은 절망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더불어서 바닷가를 뛰어다니면서 장난치던 일, 저녁이 되면 어머니가 찾아와서 자기를 데려다가 깨끗하게 몸을 씻겨주시고 맛있는 밥상을 차려 주셨던 일 등등, 행복했던 순간들을 머리에 떠올리는 가운데 그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제는 자네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게나. 자네가 지금까지 무슨 동기로 일하고 살아왔는지 곰곰이 되씹어보게나."

그는 눈을 감고서 자기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 중심에 계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마음 가장자리에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없이 우는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처방전을 열어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제는 자네의 죄를 자백할 때가 되었네. 모래 사장위에 자네가 자백해야 할 죄들을 낱낱이 기록해 보게나."

그는 울면서 모래 사장위에 자신의 죄들을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충했던 것, 사랑했던 가족들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 이웃에게 잘못 행한 것 등등, 낱낱이 생각나는대로 빠짐없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처방전에서 일러준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한참 뒤에 기도를 다 끝내고 눈을 떠보았습니다. 그는 다시금 깜짝 놀랐습니다. 모래 사장위에 적어 놓았던 무수한 죄들이 파도와 함께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희에 찬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금 용기를 얻고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돌이켜볼 때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잘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인지라 잘못한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물결로 우리의 모든 부족과 허물들을 씻어주시려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맺힌 것, 응어리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물결로 깨끗하게 씻어버리십니다. 깨끗한 마음, 자유한 마음으로 새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삶!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 갚을 자격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19절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0절입니다.

세째로, 진정한 승리의 삶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악으로는 악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길은 선을 행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21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에 맺힌 것, 나와 너 사이에 응어리진 모든 것들을 말씀에 순종해서 깨끗하게 풀어버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유한 마음, 깨끗한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마음으로 새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왜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불의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우리에게는 원수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뒤에서 누군가가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릴수록 겁이 덜컥 났습니다. 때마침 골목 입구에 웬 아주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아가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가서 짐짓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그러면서 일부러 찡긋하면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뒤따라오던 청년이 불쑥 나서면서 그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예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청년이 아주머니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한 피해 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롭지 못합니다. 불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이 명백한 잘못을 우리에게 저질렀다할지라도 우리는 친히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맺힌 것이 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더 엉키기만 할 뿐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재난의 원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던 두 집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는 이쪽집 암탉 한 마리가 담장을 넘어서 저쪽 집으로 건너갔습니다. 잠시 뒤에 "꼬옥∼꼭꼭"하면서 돌아오는데 영락없이 알을 낳고 난 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집 아이가 저쪽집 아이에게 달걀을 좀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쪽집 아이가 찾아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두 아이는 서로간에 있다거니 없다거니 옥신각신하다가 주먹질까지 하면서 싸움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 어머니들이 가세를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서로 잡아당기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들도 합세를 했습니다. 두 집이 아주 크게 싸웠습니다. 힘이 모자른 이쪽집 아버지가 화가 나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저쪽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한 동안 그 집에 불길이 한참 타오르다가 바람이 휙 돌아 불더니 이쪽집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집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수는 그런 것입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우리나라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내면 자기 눈에는 피가 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남의 눈에 피내면 자기 눈에는 고름이 나야 한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신32:35의 말씀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불의한 우리들은 원수를 친히 갚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도주할 때였습니다. 그 때 시므이라는 사울집 족속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당장 그에게 쫓아 올라가서 목을 베어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시므이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이가 솔로몬 왕 때에도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은 시므이를 심판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바로 그 순간에 심판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오래 참아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비록 우리에게 어떤 악행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셔야 공평하시지 않겠습니까?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고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우리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시므이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친히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20절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맺힌 것을 풀어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사사로이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 원수가 주리고 있습니다.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저의 원수를 갚아주시는군요.'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을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의 원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갖다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갖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 잠25:21∼22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옛날 우리나라에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밤중에 잠을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에 키를 뒤집어씌웁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소금을 얻어오게 합니다. 마음속에 수치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두 번 다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비슷한 풍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때 그는 숯불을 그릇에 담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외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뉘우칩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과 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다시는 제가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이 하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손을 들더니 빈정대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 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면, 하나님은 그 순간 스데반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주변에 있는 돌들을 다 치워버린다든지, 하늘에서 천둥을 쳐서 사람들을 흩어버린다든지, 또는 천사를 보내서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켜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때 스펄전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하던 현장에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러하던 그가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처럼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바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다."
강팍한 바울의 마음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미 흔들리면서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 사건 때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 원수 학생을 구명하다못해서  그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겠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딸이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오빠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슬프디 슬픈 얼굴을 하고서 하늘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르짖는 오빠들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딸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아라. 성경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용서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즉 그 학생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그를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의 대를 잇는 목사로 키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어떻게 화목케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랑을 받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본 받아서 원수까지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나와 너 사이 맺힌 모든 것은 절로 풀어질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의지요, 노력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우리의 마음속에 맺힌 것을 다 풀어 버리고 깨끗한 마음, 자유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진정한 승리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1절입니다.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운다고 해서 우리가 원수에게 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보다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참된 승리가 늘 싸우지 않고 이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악에게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에게 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자기가 친히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원수 갚는 것이 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수를 갚으려면 먼저 마음이 강퍅해져야 합니다. 모질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유순해서는 복수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해야 합니다. 말도 거칠어져야 합니다. 행동도 공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나 좋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은 악으로 결코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마을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못된 방법으로 돈을 많이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위해서는 돈을 한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청년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죽여야 해. 내가 그의 돈을 빼앗아서 좋은 일에 써야겠다.'
그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면서 노파를 죽였습니다. 노파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 돈으로 좋은 일에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해도, 아무리 스스로 변명을 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노파를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일평생동안 괴로워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악은 더 큰 악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악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된 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그 모습을 본받아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세계 제 2차대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필리핀의 병사 약 이만 명이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수용소안의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거기에다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하루에도 수 없는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소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날개를 몹시도 다친 비둘기였습니다. 수용소 안에 있는 병사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극진하게 병든 비둘기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약품을 구해다가 다친 날개에 발라주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자기들의 양식을 아껴서 비둘기에게 모이로 주었습니다.

비둘기가 깨끗하게 치료되던 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자기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를 치료하면서 사랑으로 돌봐주는 가운데 그들의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 그들에게 돌봐 주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삶과 희망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누가 예수님보다도 더 억울한 일을 당했겠습니까? 누가 예수님보다도 더 속상한 일을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순전히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003년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 속에 맺힌 것, 특별히 나와 너 사이에 응어리진 모든 것을 남겨두지 말고 깨끗하게 씻어버립시다. 풀어버리십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자유한 마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2004년을 희망찬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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