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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하였도다! / 마 25: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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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잘 하였도다!
< 본 문 > 마25:19~30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03년을 시작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송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연말을 맞이하고 보낼 때면 만감이 교차됩니다. 지난 1년 동안 일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 이 생깁니다. 좀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인생도 끝이 있을 텐데 그때 후회 막심하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오히려 연말이 있기에 중간 중간 인생을 반성하고 새롭게 정비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입니다. 연말이 되면 누구나 자기 인생을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데, 정말 유익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주 잘못되지 않게 조심하고 체크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인생을 마칠 수 있을까 본문 말씀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달란트 비유’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본문 앞에 마24:은 예수님이 종말에 관해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리고 마25:은 종말을 의식하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 모두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종말이 있습니다. 개개인 인생에도 종말이 있고, 인류 역사에도 종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면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동시에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시면 개인의 종말이 먼저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을 당하는 ‘정죄 심판’은 없습니다. 여러분, 왜 그런가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대신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다시는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심판도 면제받게 된 것입니다. 요3:18 “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행되는 다른 종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인생에 대한 평가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가 바로 그런 종류의 심판에 관해 설명해 줍니다. 이런 심판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엄벙덤벙 살다가 후회 막심한 가운데 인생을 마치면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감사하며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런 멋진 생애, 아름다운 생애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달란트 비유를 통해 교훈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달란트 비유의 내용

어떤 사람(주인)이 외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깁니다. 예수님 당시에 실제 그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귀족들이 로마의 원로원에 가서 분봉왕(지방 영주에 해당)의 직위를 받아 오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례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 주인이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1 달란트, 2 달란트, 5 달란트를 맡깁니다. 달란트는 본래 금은의 무게 단위인데, 여기서는 화폐 단위입니다. 1달란트는 대략 6,000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1달란트는 아주 큰 액수의 돈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이 거의 20여 년간 꼬박 모아야 겨우 만질 수 있는 큰 돈입니다. 엄청난 액수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종들에게 달란트를 각각 맡긴 후 먼 길을 떠납니다. 그 후 그 종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두 배로 남겼습니다.(16절)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했습니다.(17절) 그런데 유독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 속에다 그냥 파묻어 두었습니다.(18절) 그러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합니다.(19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겨 칭찬을 받습니다.(20절~21절)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겨 칭찬을 받습니다.(22절~23절)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땅 속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꺼내 놓았다가 혼이 납니다.(24절~30절)

여기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은 부활 승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종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달란트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재물이나 재능, 은사 등 인간 조건을 가리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고, 회계하는 것은 심판을 가리킵니다.

[2] 우리가 얻어야 할 평가 : 잘 하였도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 인생입니다. 말은 ‘내 인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가 또 모든 것을 반납하고 떠납니다. 이런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됩니다. 바울의 말이 바로 그겁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우리는 누구나 일생을 살아간 후에 하나님이 맡기셨던 것에 대해 엄정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잘 하였도다!” 이런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누구나,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3] 하나님의 평가 기준 : 최선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상대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줄을 세우고, 비교하고, 순위를 매깁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명의 종들도 세상 기준으로 하면 1등, 2등, 3등 이렇게 평가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평가’를 하십니다. 사람들끼리 비교하지 않습니다. 순위도 매기지 않습니다. 각각을 평가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명을 보십시오. 등수를 매기지 않고 각 사람이 어떻게 했나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충성의 여부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최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최고, 최대, 최다가 아닙니다. 최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가능한 겁니다.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이 세상적으로 평가 받는다면 1등은 한 명만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 기준으로 하면 모두다 1등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대로, 주어진 여건대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4] 최선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

그러면 구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① 자족과 감사 : 최선을 다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자족과 감사입니다. 어떻게 자족과 감사 없는 사람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많이 가졌다고 교만하고 태만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적게 가졌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쯤 되면 결코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적게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가만히 따져 보면 하나님이 충분히 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사실은 받을 만큼 받은 겁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적다 많다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만큼 주신 것도 감사한 일이요, 당연히 자족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대로 감사하고 자족해야 됩니다. 돈만 갖고 생각해서 때로는 섭섭한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사실 돈 외에 시간, 건강, 재능, 지위, 직분,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각 사람에게 주실 만큼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도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조건은 바뀔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수년 전 막노동하다 서울 법대 들어가서 화제가 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했습니다. 이 사람이 출세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출세한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다만 그분의 최선을 다한 삶을 본받자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탓 저 탓을 합니까? 그러다가 세월 다 보내지 않습니까?

또 많은 것을 받은 사람도 다 된 줄로 착각하지 말고 더욱 겸손히 최선을 다해야 하니다. 그래야 받은 것을 유지할 수 있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다고 우물쭈물하면 다 빼앗기고 맙니다. 책망 받습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며 감사하고, 그러기에 더욱 열심을 내야 됩니다. 이게 최선의 삶입니다.

 ② 작은 일도 성실히 하는 것 : 대개 작다고 생각하면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실책이 바로 그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작다고 생각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도 얼마든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며 스스로 작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포자기하거나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성실하게 일했고 갑절을 남겼습니다. 그랬을 때 주인이 왔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과 똑같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3절 보면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것을 통해 큰 일을 하십니다.오병이어 기적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지만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작지만 정성을 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작은 것을 통해 5천명이 넘는 삶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로를 다니다 보면 차선이 있죠. 그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미국의 한 동네에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서 자동차 사고가 자주 납니다. 자동차도 많이 없던 시절인데도 그 집 앞 길이 구부러져 있어서 반대쪽에서 오는 차들끼리 부딪치는 겁니다. 속상해서 궁리하다가 그 아주머니가 흰 페인트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 결과 사고가 나지 않았고,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선이 그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작은 생각, 작은 정성이 그 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을 다하는 최선이 나은 결과인 것입니다.

 ③ 누가 보든 안 보든 잘 하는 것 :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보면 잘 하고 보지 않으면 대충 합니다. 그러나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잘 하는 게 진짜 충성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이 멀리 갔는데도 두 종은 잘했습니다. 이게 충성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사람은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골3: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습니다. 모든 살림을 다 맡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요셉은 보지 않는 데서도 충성했습니다. 아마 주인이 그것을 검증해 보았기에 모든 걸 맡겼을 겁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이 이겨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보고 있음을 믿었던 요셉은 그 유혹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④ 끝까지 열심을 다하는 것 :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만 하면 됐다는 자만심이 발동해서 그렇고, 때로는 이제는 더 이상 해도 소용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충성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끝까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화가 길해리 리버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는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그림을 70세에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른 일을 하다 은퇴했는데 노인정에 앉아 체스(서양 장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나중에는 시들합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말을 던집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앉아계시지만 말고 그림이라도 그리세요. 재미도 있고 시간이 잘 갈 겁니다.” 그랄 듯하게 들려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잠재력이 발휘됩니다. 그래서 그 후 30년 간 101세까지 무려 22회 전시회도 열면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쳤습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모르는 겁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를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귀한 일들을 허락해 주실 겁니다.

성도 여러분! 한 해가 또 저물어 갑니다. 한 해의 끝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끝이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만일 연말에 후회스러운 것처럼 그때도 그렇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아쉽고 후회스러운 감정을 미래를 위한 발전의 게기로 삼으면 우리는 충분히 칭찬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제 이야기입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인데, 7살에 들어가서 그랬는지 너무 철이 없어서 숙제를 안했습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몇 번은 잘 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일으켜 세우더니 ‘잘 했어요’ 고무인을 코에다 찍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겁니다. 얼마나 창피했던지 ... 그 날 밤에 결심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 그 후 정말 숙제라면 철저하게 하는 습관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공부를 좀 하게 됐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때로는 후회가 약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할 때 부끄럽고 후회가 될지 모르지만 괜찮습니다. 오늘의 후회를 믿음으로 승화시켜서 앞으로 잘 하면 됩니다. 아무쪼록 오늘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디 남은 생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 앞에 설 때 “잘 하였도다!” 칭찬 듣고, 하늘의 면류관 받아 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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