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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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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1] 인생은 나그네길

  흘러간 대중가요 가운데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1960년대 중반 라디오연속극의 주제가였습니다. 당시는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시원찮은 터에다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집도 그리 많지 않아 연속극 방송시간에는 동네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여들어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 '하숙생'이라는 연속극과 그 주제가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연속극이 시작되면 그 거품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마련이었지만,  '하숙생' 주제가는 달랐습니다.

  연속극이 끝난 지 몇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좀처럼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가수 최희준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탓도 있지만 그 노래의 가사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가수나 노래 그 자체를 좋아하지만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라는 그 노랫말에 매료되었습니다. 대부분 대중가요는 좋아하는 층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그 노래는 이른바 지식층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노래는 최희준을 국민가수로 만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구름이 흘러 가듯 떠돌다 가는 하숙생 인생이 되었습니까?
수많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 그 원인을 밝히고 행복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창3장을 통하여 그 원인을 밝히고 그리고 그 해결책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대적하는 죄악을 범하는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족하고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오늘 나는,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이 아침 우리는 창세기 3장의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은 후에 일어난 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함께 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으며,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에 빠져 그 과일을 따먹은 하와와 아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벗은 몸을 가리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저는 이 아침 이 본문이 과학적으로 옳은 것인가? 또 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셔서 아담을 유혹에 빠지게 하셨는가? 이런 물음들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희랍적인 사고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들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진리를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야기를 분석하고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처럼, 히브리 사람들은 이 창조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내고자 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먼 옛날 첫 인간의 이야기지만, 이것은 또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실낙원의 이야기는 태고 역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늘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옛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2]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멧세지에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여십시다.

1.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라는 뜻.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피해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후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징계가 임할는지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 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담을 부르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성경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고집 부릴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안계시느니,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느니 할 때, 하나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한 문학인은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분통이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때문에 그렇게 속 썩으시는데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창3:21에 보면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으시면서도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 주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 입이 있어도 그 입 다가지고 그 사랑, 그 은혜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까? 그 사랑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 인생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고 회복시키고자 가까이 오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십시오.

2. 네 자신을 알라는 뜻 (영적 정체성을 알라) 

둘째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멧세지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바로 너 자신을 좀 보아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라는 이 물음은 location, 위치나 살고있는 주소에 대한 질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질문은 바로 네 인생이 지금 어떤 자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느냐? 라는 삶에 대한 물음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네 자신을 좀 살펴보아라, 네 자신을 좀 알아라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두려워 숨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없습니까? 지금 살고있는 내 모습, 내 인생, 과연 하나님께 부끄럼 없이 보여드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왜 사는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한 채, 떠밀려 인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란 노래의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강물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여러분, 인생은 구름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So what?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인생이요, 예수밖에 사는 자들의 인생입니다.  아무리 하숙생 노래를 수백 번 불러도 그 노래 속에는 인생문제 해결의 해답이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이 무엇인지를 묻게되면 벌써 40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40대에 들어서야 삶을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생각 없이 사는 인생이 있다면, 이런 인생처럼 안타까운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시려고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생각없이 사는 인생은 죽음 다음에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삶이 무한정 계속될 것 같은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죽음의 위협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게 되면, 많은 경우 그 인생이 깨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벨상의 설립자인 알프렛 노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노벨은 1882년 아침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유명해졌고 많은 돈을 번 그는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호텔에 배달된 아침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문에는 큰 활자로 알프렛 노벨이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문사 측의 실수였습니다. 알프렛의 형이 사망한 것을 잘못 알고, 동생의 이름을 신문에 올린 것입니다.
  알프렛 노벨은 이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하루 종일 호텔 방에 틀어박혀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이대로 그가 죽는다면 다이나마이트 발명가의 명예나 재물은 한갓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다이나마이트가 이미 무기로 쓰여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아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을 하고 이를 행동에 옮겼습니다. 노벨상 제도는 바로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노벨상 제정까지 안가도 좋습니다. 꼭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깨어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또 한번 블레이스 파스칼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기하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인생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엔지니어링 공부하는 사람 많습니다. 컴퓨터 공부하는 사람 많습니다. 경제학, 경영학 공부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삶을 공부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모두에게 한사람, 한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 자신을 좀 살펴보아라. 네 자신을 좀 알아라. 네 인생을 살펴보아라.

3.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뜻
 
  세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내가 가야할 길,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어디서 이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길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 우리의 무관심으로 가로막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벽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해답을 찾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볼 때 추상화는 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추상화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왜 그런 그림이 그려졌는지를 알려면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합니까?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에게 물어 보면 그 그림을 그린 목적이 무엇인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로 알려면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야 인생의 목적도, 길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생명의 길, 이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스스로를 살피고,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향해 이 아침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3] 결 론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침도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비록 얼룩지고 뒤죽박죽 된 삶일지라도,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딴 길을 걸어가는 인생일 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르십니다. 지금 네 인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돌아오라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어에서 현재라는 말과 선물이란 말은 똑같이 "Present"라고 합니다. 즉 현재, Present는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Present, 선물이란 뜻입니다. 이 선물로 주시는 현재를 바로 뜻있게 살아야함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Present, 선물로 주시는 Present,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 해의 길목에서 석양을 생각합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때 우리의 감정은 뭉클해집니다. 우리가 석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지는 해 때문이 아닙니다. 석양 속에 새벽에 떠오르는 힘찬 태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석양 속에 담긴 강렬한 새벽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는 해를 붙잡을 수 없듯이,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세월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결코 아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아름답고 고상한 일입니다. 곡식이 무르익고 열매가 무르익듯이 우리 인생이 무르익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무르익은 열매는 보기 좋고 맛이 있습니다. 또한 그 열매 속에 수많은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그 씨앗 속에 수천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고, 그 씨앗 속에 놀라운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젊음을 너무 부러워하거나 나이 드는 것을 너무 서글퍼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을 즐기고 인생의 사계절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매 순간을 감격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하루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고귀한 선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잘못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찬 내일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석양이 아름답지만 석양은 그림자를 남기우고 어두움을 불러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석양에서 눈을 떼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해가 밝아 오고 있습니다.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아침 태양을 상상해 보십시오. 헬렌 켈러는 "태양을 보고 살아라 그리하면 그림자를 보지 않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저무는 해를 아쉬워 말고  밝아오는 희망찬 새해를 바라보십시오.  희망찬 새해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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