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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눅 7: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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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눅 7:25,26)


(눅 7: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눅 7:25)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눅 7:26)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화장실 낙서 ; 신은 죽었다. - 니체,  너는 죽었다. - 신,  너희 둘다 죽었다. -청소부 아줌마

오늘은 송년 주일입니다. 2003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 2003년도의 주일 예배는 또 다시 없습니다. 동시에 지금은 연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쁩니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며 각종 모임도 많고 회식자리 술자리도 많습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때는 송년 분위기에 들떠서 흥청망청 보내기 보다는 한 해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뉘우치며 새 출발의 결의를 다짐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가서 볼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돌멩이와 잡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볼 수도 있습니다. 몰려 온 많은 사람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은 옷을 보며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먼길을 걸어서 삭막한 광야까지 사람들이 몰려간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언자인 요한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걌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을 사람이냐?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선지자를 보려고 나가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미래를 달라집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있었어도 보는 눈에 따라 보는 대상도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왓츠는 물끓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증기기관차를 보았습니다. 프랭클린은 번개속에서 전기를 보았습니다. 로댕은 바위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쥐를 보며 만민에게 사랑받는 만화 주인공 미키 마우스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에 묶인채 올려진 제물 이삭을 보면서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즉 여호와 이레를 보았으며 동시에 만민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위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야곱은 들판에서 외롭게 누워 밤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하늘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며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보았습니다.  호세아는 방탕하여 스스로 음부에게 팔려다니는 부정한 아내를 보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모스는 온갖 불법과 부정 부패로 얼룩진 채 멸망해가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바라보았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이 동일한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데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도전하신 말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나가서 엘리야를 상징하는 인물 요한 즉 광야의 소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겉 모습만 보았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소리를 고래 고래 질러대는 괴상한 사람만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중요한 본질은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여지는 것만 보았을 뿐 영적 안목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냐? 하신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라면 궂이 요한이 외치는 그 광야로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도시에 그리고 궁궐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까지 멀리 나간 것은 요한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특별한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왜 나오셨습니까? 우아한 건물과 건물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서입니까?  잘 생긴 사람, 맵시있고 세련되게 꾸민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번짓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을 보고 돌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고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나주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2003년을 보내시면서 무엇을 보십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보여주시는 특별한 것을 2003년을 보내면서 우리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회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3:3)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3장 3절에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8절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방향 전화입니다. 잘못된 길로 나아가다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심판이 임박했으니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부도덕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죄악된 생활습관을 버리고 의로우신 예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헛된 욕심을 버리고 은혜를 깨닫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으로 돌아설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부흥사 무디는 "회개란 꽃 병속에 넣은 주먹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꽃병 아가리는 좁습니다.  그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습니다. 돈, 명예, 지위, 권력 등을 고집한 채 진실한 회개는 어렵습니다. 주먹을 펴고 열린 손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자 세리들도 나아와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정한 세금 외에 더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관례를 들먹이며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군인들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자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하지 말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뉘우침에서 머물지 않고, 고백으로 끝나지 말고 죄의 생활을 끊고 죄의 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회개의 선포를 벌써 잊었느냐는 말슴입니다. 왜 또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갔느냐? 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욕심에 눈이 어둡고, 남의 것을 가로채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주어진 힘을 지나치게 휘두르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느냐는 말슴입니다.

한 해를 보내며 그냥 지나가면 안됩니다.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잘못하였는지를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회개하고서 다시 되돌아간 옛 생활의 습관은 없는가?  옳은 일을 위하여 주어진 힘을 헛된 욕심으로 인해 남용한 것은 없는가?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외딸 레오폴딘의 시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술 행각에 비참하게 사는 엄마도 볼 수 없고 자신도 살 의욕이 없다는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외치며 여러 날을 울다가 회개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사회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교육부 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문학 작품이 깊이를 더하여 가기 시작하여 그는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위고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회개는 그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2003년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가 됩니까? 죄악과 허물로 인해 부끄럽고 기억하기 조차 싫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잘못된 삶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끊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죄된 삶의 연속을 원하시지 않고 여기서 단절시키고 축복된 새로운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회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깨끗이 돌아서는 사랑스런 주의 자녀가 되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3:4)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요한의 사명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분임을 믿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메시야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요한을 보며 예수님을 함께 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요한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탄없이 책망하자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여기고 의논하였습니다. 요한은 실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리나 군인들 뿐 아니라 막강한 권세로 사람들을 파리목숨 죽이듯하는 폭군 헤롯왕을 향하여서도 직접 불륜을 지적하며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얼마나 용감하고 멋있어 보이며 인기가 짱이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를 향하여 직접 공격하기 어려워 풍자적으로 비웃는 말들이 많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꼬집는 풍자를 아십니까?  개구리입니다.  개구리와 노무현 대통령의 공통점이 네가지가 있답니다.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댄다. 생긴것이 서로 비슷하다. 이렇게 풍자해도 발끈했답니다.

그런데 면전에서 목이 달아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이 지금 데리고 사는 여자는 동생의 아내이니 그 여자를 취한 것은 죄요. 회개하시오" 하였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통쾌하였겠습니까?  그래서 민중들이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신가 한 때나마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신끈도 만질 자격이 없다고 하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만 보고 요한이 전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달을 가리키며 '저것이 달이다.' 하는데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요한이 이땅에 온 목적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요한은 사명 다했다고 사라졌는데  광야에 나가 요한을 만나고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도 요한만 알고 예수님을 모르면 요한이 얼마나 억울해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2003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역사적인 순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때와 시간만 알고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2003년이라는 시간도 바로 예수님이 역사의 한 복판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구원의 사건을 완성하셨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서기 2003년이라는 년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수많은 사람이 금년이 2003년이라는 것은 잘 알면서도 그 2003년을 존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2003년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2004년의 주인도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모든 현상이 존재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봄으로 시대를 더 정확하게 바라보고 읽으며 시간에 떠밀려 가지 않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2003년이 저무는 이때 무엇이 보입니까? 요란하게 웃고 떠들며 질펀하게 노는 술판이 보입니까?  고함을 지르며 온몸을 흔들어가며 즐기는 춤판이 보입니까?  온갖 근심과 염려 그리고 불안으로 얼룩진 무거운 사회분위기가 보입니까?  아니면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죄를 지적하며 준엄하게 책망하며 회개를 요구하는 선지자의 외침이 보입니까?  여러분이 모두 토끼 꼬리만큼 짦게 남은 2003년을 보내면서 정결케하는 회개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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