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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호 5: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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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시 : 2003.12.28
† 설교제목 :하나님 앞에서
† 성경본문 :호세아 5:15~6:3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또 다시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올해도 일년 열두 달, 오십 이 주일을 변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지켜주셔서 연말 송년 주일에 이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어느 때나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마치 오랜 기간 배를 타고 항해하던 사람이 항구에 귀항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거센 파도와 싸우며 힘든 항해를 하는 동안 어렵고 위험했던 순간들을 회고하면서 우선 무사히 귀환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의 상처 난 부분이나 고장난 부품들을 고치고 바꾸면서 잘 손질하고 다듬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또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항해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과거를 경험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려는 꿈을 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서게 되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고자 애를 씁니다. 더욱이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며 새롭게 다짐하는 자들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하였습니다(창 17:1). 이 말씀을 좇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다짐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어디에 머물든지 성소를 중심으로 장막을 쳤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싸인에 따라 행동을 하였으며, 언약궤를 멘 제사장이 선두에서 행진을 주도하였던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모토(motto)로 하고 교회 운동을 매진하는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에 즈음하여 본문 2절에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한 호세아 선지의 메시지를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역사의 전환점에 서게 되면 먼저 지나온 날을 회고해 보는 것입니다. 특히 실수를 하였거나 과오를 저지르고 어려움을 당했던 일이 있으면 그 원인을 분석하여 고치는 작업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한 말씀으로 보아 그 백성들이 여호와에게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1) 하나님을 멀리한 과오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출발한 걸음이 어쩌다가 하나님과 멀리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길이요 실패한 걸음입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호세아는 B.C 780년 경 이스라엘의 13대 여로보암 왕 때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약 50년 간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 시기에는 여로보암의 치세로 나라가 번영하기도 하였으나 뒤이어 계속되는 혁명의 악순환으로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불안했던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가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 숭배를 일삼고 이방 풍속을 좇아가는 자들이었고 이와 함께 종교지도자들까지 자기의 소임을 못다 하는 암흑시대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어느 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져 버린 상태에서 멸망을 재촉하게 되고 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라고 하였습니다(렘 18:15). 이어서 그는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렘 31:21).

(2) 징벌을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1절에 “…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일로 하나님을 거스리게 될 때 그들은 찢기고 상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시편 73:27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나 많은 혼란과 무질서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도 극심합니다. 세대간에, 계층간에, 지역간에 메우기 힘들만큼 깊은 골이 패여졌고 싸매기 어려울 만큼 찢겨져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이념과 철학 부재도 문제로 드러나지만 각계 각층 모두가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상태가 오래되었습니다. 경제는 침체되고 사회의 기강은 무너졌으며, 도덕과 윤리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버렸습니다. 교육의 경쟁력은 상실된 채 비정상적인 사교육 앞에 학교 교육이 물러나 버렸습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방황하는가 하면 이혼률과 자살률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난맥상은 국가적 위기로 몰아가는데 그 어디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병의 원인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5-6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할 때 징벌하시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아는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30:5).

본문 말씀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주경 학자 퓨세이(Pusey)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으나 삼일 후에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곧 찢으셨으나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Ⅱ. 여호와 앞에서 살자

시편 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 불행인줄 아는 사람이 그것을 후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이후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1)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비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그는 이제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그의 신분과 지위를 보장해 주었습니다(눅 15:22).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찢기고 상처 난 것을 싸매며 고쳐주고 일으켜 세워주며 언제까지나 아버지 앞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무한한 은혜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호세아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음탕한 여인 고멜이 호세아의 아내가 된 후에도 몇 번이나 옛날의 남자를 찾아서 달아났지만 호세아는 그를 다시 받아 들였고 그를 데려오기 위하여 은과 곡식들 주는 등 대가를 지불하기도 하였습니다(호 3:2-3). 세상 정욕을 따라 멸망의 길로 달리던 고멜은 이처럼 끈질긴 호세아의 사랑과 노력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안정되고 행복한 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허물을 덮어놓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됩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행복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4-26).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과 등을 진 채 자기들의 좋은 것을 찾아 즐기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장로 교인의 신앙고백문인 소요리 문답 제 일 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멀리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행복을 뜻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시게 되자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8에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였습니다(9절). 옛날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아비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는 스스로 자기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19에 보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아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고 이를 빼앗아 먼 나라로 달아났던 사람이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난 비극이 어떠한가를 체험한 이후로는 그의 사고 방식이 바뀌어졌습니다. 오히려 저를 받아 주고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하여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다짐한 것을 지킴으로써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시편 116:12-14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Ⅲ. 힘써 여호와를 알자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젼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1) 성도의 본분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하나는 성도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7). 호세아 6: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제사를 격식에 맞추어 드리면서도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가 6:7-8에는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여호와를 알고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하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며 거기 따른 확실한 축복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① 밝은 빛의 보장입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한 시간이 되면 새벽이 옵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깊게 깔리고 죄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어 새벽의 여명이 동트게 되면 세상은 밝은 빛으로 새롭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진리와 생명의 빛이 임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② 풍성한 열매입니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메마른 땅에는 땅을 적시는 늦은 비가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으로 상징됩니다. 곧 자연의 은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고에 상응하는 열매를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 앞에 사는 사람에게 언제나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빛과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고 또한 땅에서 나는 수고의 열매도 보장되는 것입니다(시 127:2).

(3)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아무리 완벽한 제도나 법령이 있어도 그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지도자가 희망찬 메시지를 선포해도 결국은 실망케 하는 일이 더 많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계획은 언제나 허공을 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지난날의 허점과 과오를 거울로 삼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0:6). 이런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정확하게 분별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고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자기의 위치인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참된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입니다(계 22:16).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게 나타나는 그의 조명을 받게 됩니다. 계시록 2:28에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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