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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교회 (신 33:26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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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신33 : 26 - 29절 2004.1.4(일) 2.3부
제 목 : 행복한 교회

행복은 우리 모두의 이상이요,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 힘쓰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당신은 행복하느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2004년 첫 주일 오늘 이후부터
확실하게 행복하다고 답할 수 있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축복해 주세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합니까?
행복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외부의 조건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찾다보니 자꾸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아니면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서 찾게됩니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찾아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축도의 마지막 결론부분으로
그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 축도입니까?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2004년 교회 표어를 "행복한 교회"로 선포하며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모두가 행복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복한 교회”라는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행복자라고 말씀합니까?

이 한 마디 말에
이스라엘이 받은 복에 대하여 함축성 있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그들은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는 낙관적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들이 그들 앞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종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2>
그가 이 땅에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말,
곧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민족입니다.
그들 나라만큼 침략을 많이 당하고 고난을 많히 겪은 나라가 없습니다.
" 너는 행복자 " 라고 말하는 지금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나그네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무엇을 가리켜 복 받은 민족이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 받은 행복자라고 하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의 행복을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영원하고 신령한 복을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이 진정한 행복의 사람들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내일의 가족들도 이 시각이 열려지시기 바랍니다.

그럼 행복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9절 [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바로 구원에 있다는 것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세상살이가 고난과 역경 뿐이라 해도 우리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뺏을 수 없는
너무나 귀한 복을 받은 자임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엡1:3절에 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모든 복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 보셨습니까?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세상의 금은보화나, 부유함이나 권력이나, 쾌락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116:12-13절 말씀처럼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 하듯이
구원의 잔을 높이 드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 구원받았다고 감격하고 <3>
나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께 속해졌다고 고백하는
구원의 잔을 높이 드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에 대해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운수대통', '복된 운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삶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흐뭇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은 행복을 [운수대통]이니, [복된 운수]라는 말로 행복을 정의합니다.
사전이 요사이 만들어졌다면 뭐라고 했겠어요? 대박이죠?
그런데 이건 뭔가 잘못된 정의입니다.
역대로 복권 당선되어서 행복해진 사람 아무도 없데요.
그런데 [ 삶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흐뭇한 마음 ] 이라고 하는 것은 좀 그럴싸한 정의인 것 같습니다.
행복이 마음에 있다고 하니깐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삶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흐뭇한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지식인들은 불행한 이유를 무식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모순이 있습니다.
무식한자들이 불행하다면 유식한 자들은 행복해야하는데
유식하다고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선진국이라 자처하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네팔이라고 하는 것 보면
반드시 행복지수와 지식지수가 정비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불행을 사회적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환경이 개선되면 될수록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을 부러워합니다.
아픈 자들은 건강한 자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거보다는 너무 좋은 환경을 누리고 있고,
문명이기를 누리고 있는데 과거 사람들 보다 행복합니까?
분명히 '편리한 세상'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만,
'보다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각종 범죄를 보십시오. 이혼율, 자살율을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이혼하고 자살을 합니까?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심리,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인체 속에 <4>
불행이라는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다 불행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도 '아마 저 사람은 불행할거야'라고 생각을 하는데
실지 그들은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실까요?
아마 여러분들은 미국의 헬렌켈러 여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불란서와 자국학위 2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엄마와 여행을 하면서 행복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합니다.
화니 크로스비 여사를 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찬송가에도 그분의 찬송 곡이 여럿 있습니다.
그녀는 무려 8000여 찬송 곡을 썼는데,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주사를 잘 못 맞아 맹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돌팔이 의사를 오늘 만나면 당신은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러자 크로스비 여사는 '감사하다고 하겠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 생각으로는 불행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불행이라는 단어는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심리, 정신의학자들이 말하는 불행론도 모순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온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26절 [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 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은
우리에게 행복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수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
이 호칭은 성도 여러분들께서 자주 들어보지 못한 호칭으로
신33:5절, 26절과 사44:2절에 나옵니다.
이 호칭은 이스라엘을 좀 더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 표현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별명으로 쓰이는 호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실 때 <5> <여수룬>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수룬은 사랑 받는 자, 옳은 자, 의로운 자라는 의미로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나도 여기에 포함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택함 받고
죄사함을 얻고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라
숫자가 많고 강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7:7절에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지만 여수룬이 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백성,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목이 곧고 패역한 족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로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비뚤어져서 원망과 불순종의 생애로 일관해왔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나의 택한 의로운자 라, 곧 여수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이방사람보다 잘 난 것 하나 없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실 때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62:4,5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헵시바 라고 하고 뿔라라고 합니다.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뿔라 - 결혼한 여자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수룬이란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란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꼭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여수룬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6>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마음과 얼굴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이 축복 받은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4. 이스라엘이 축복받은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28절)
28절 [ 이스라엘이 완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의 풍요로움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는 이스라엘이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만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주에서도 구원하셔서 생활적으로, 물질적으로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축복을 받아 행복자가 된 사람은
남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그 행복을 우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어둠에 처해 있는 세상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구원받지 못한 저 백성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들도 우리와 같이 행복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 삼으신 이유요
또한 우리를 행복자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끼치는 자가 되어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노인이 사과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데 손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할아버지가 심으신 나무의 사과도 많이 드셔요."
손자의 말을 들은 노인이 삽질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아니다. 할아버지는 많이 살았단다.
할아버지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생각은 별로 없어.
이 나무를 심는 것은 너랑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야.
난 일생동안 사과를 많이 먹었단다. <7>
그것들은 모두 내가 심지 않은 나무에서 난 것들이지.
그래서 나도 보답하는 마음에서 이 나무를 심는 것이야. ]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심지 않은 것으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 왔습니다.
이제 내가 심음으로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구원의 잔을 높이 드는 행복한 교회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복한 교회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가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시는 그 모습을
27절에서는 [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 로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팔은 권능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능력 있는 팔로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안아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 영원하신 팔 ]이라는 말씀 속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그 양을 팔에 안고 오듯이 사랑하는 양을 안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 품에 안으신다는 말씀으로 이 얼마나 놀라운 보호입니까?
이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 지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하나님의 팔에 앉기 시기를 바랍니다.

추운 겨울날, 영국의 어느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이올린을 켜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켰지만
누구 한 사람 귀기울여 들어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바빠
할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에 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외국인이 다가오더니 할아버지의 연주를 서서 듣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연주를 듣고 있던 그 외국인은 할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8>
발걸음을 멈추고 그 외국인의 연주를 듣기 시작하더니
채 5분도 안되어 동전을 구걸하던 할아버지의 모자에 돈이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도 않고 그 외국인의 연주를 계속 듣고 서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파가니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파가니니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그 곳을 지나가다가 바이올린을 키며 구걸하는 노인이 불쌍하여
대신 바이올린을 연주하므로 불쌍한 노인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하였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만 살려고 할 때는 어렵고 곤고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도와 주시면
평안하고 풍성하며 기쁨의 삶,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며 우리들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행복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팔은 원수들을 박살내는 팔이십니다.
27절에 [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하신 팔의 권능이 어떠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도,
홍해를 가른 것도, 반석에 샘물을 낸 것도
다 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기를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을 진멸하신 것을 모세는 신7:19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팔은
우리들을 대적에게서 건지셔서 감싸 안으시며 보호하시는 팔이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능력의 팔에 붙들려지면 행복자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팔에 붙들려지면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29절에 [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 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어려움과 대적이 앞에 가로 놓여 있어도 <9>
승리의 삶을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꼭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험에 대한 승리의 확신과 그기에 따른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남의 민족에 빌붙어 사는 종살이로 끝날 민족 같으면 이런 시련과 훈련이 필요 없겠지만
땅의 더 높은 곳을 타고 다니는 빼어난 민족으로 세움 받기 위해서는 신32:10-11절에 보면
1) 하나님이 광야에서 눈동자 같이 지켜 주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훈련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동굴에 숨어사는 박쥐나,
땅을 파고 숨어사는 두더지 새끼 같으면 이런 훈련이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땅의 더 높은 곳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가 되자면
남다른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꼭 신앙의 시련 속에 훈련 받을 때
불평하거나 비명을 지르지 마시고
인내와 의지 속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여수룬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 나의 삶에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사 중이라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수룬에 대해서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고의 말씀도 있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신32:15절 [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
신11:17절 [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
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여수룬 즉 행복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 행복을 발로 찬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 르우벤을 보면
창49:3절 [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 마는
물의 끓음 같아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
물의 끓음 같은 인생 뭔가 되려고 하다 만 인생
성경에 보면 많이 있습니다.
에서가 그렇고, 사울 왕이 그렇고, 압살롬이 그랬습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10>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결론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구원의 잔을 높이 드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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