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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04년도에는 이렇게 변합시다 -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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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에는 이렇게 변합시다
-송구영신예배-

본문 : 요2:1-11
설교 : 이원희목사
일시 : 200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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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피 흘려 해산하여 한 생명을 낳았습니다. 그 핏덩어리가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랍니다. 백일이 지나니 갓난아이 티를 없고, 1년이 지나니 제법 걸음마도 합니다. 그러다가 엄마 소리 하고 아빠소리 하고... 점점 자라서 재롱을 떨며 퇴근하는 아빠 혼을 쏙 빼놓기도 하고... 그러다가 유치원도 가고, 초등학교도 가고,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교도 가고... 그러더니 취직을 해서 첫 월급으로 부모님 내복을 사오기도 합니다. 또한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손자 손녀를 안겨줍니다. 여러분, 부모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의 성장과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부모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 아주 진실하신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아주 잘생긴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4살 정도 되더니 그 이후로 몸은 자라는데 지능이 자라지 않는 겁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온 가족이 한숨쉬는 것을 보고 옆에서 보는 저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장하고 변하는 자녀를 볼 때 그것은 부모의 기쁨이지만, 세월은 가건만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일 때 부모님은 한숨쉬고 마는 겁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출생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해산대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엄청난 피를 흘리시고 저와 여러분을 낳으셨습니다. 우리들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아십니까? 4대 독자가 아들 낳은 것 이유가 아닙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생명록에 기록될 때 천국에서는 천사들이 뛰놀며 대 잔치가 벌어집니다. 제가 영적으로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여러분이 영적으로 태어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못 봐서 그렇지만...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때로는 똥오줌 못 가리고 하나님을 속썩일 때도 있었고, 징징거리기도 했었고, 철없이 떼 부리기도 했었고... 그렇게 철없이 살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싫다, 귀찮다 한마디 안 하시고 마치 갓난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양으로 우리를 세밀히 보살펴 주시고 여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때때로 아이가 재롱을 피우면 부모는 하하호호 좋아하는 것처럼 어쩌다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우리 하나님 입이 귀까지 벌어지셔서 “아무개가 말씀을 순종했다고, 아무개가 새벽기도 나왔다고, 아무개 일하는 것 좀 보라고...” 천사들에게 자랑 자랑하시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영적으로 태어난지 1년이 지나, 2년이 지나, 3년이 지나... 지나면 지날수록 자라고 변화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는 예수 믿은 지 5년이 됐어도, 10년이 됐어도, 20년이 되고 평생을 믿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한 살 짜리 아이처럼 영적으로 똥오줌 못 가리고 재롱이나 피운다면... 그러한 우리를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실까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한숨 쉬실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20살이 넘은 청년이 “엄마 아빠 도리도리 까꿍!” 그러면 그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믿은 지 수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영적으로 한 살짜리로 살고 있다면,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기에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연륜에 맞는 성장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004년도에는 우리가 성장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리자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성장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리고, 신앙적으로 성장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리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리고, 가정적으로도 성숙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리고, 경제적으로도 부흥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드립시다.

1. 삶의 변화

변화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변화인 물리적인 변화와 근본적인 변화인 화학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물리적 변화란 근본은 그대로 있고 껍데기만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은 H2O인데 이것이 고체면 얼음이고, 액체면 물이고, 기체면 수증기입니다. 이를 물리적 변화라고 합니다. 본질은 변화지 않고 겉모양만 변했습니다. 또한 이 강대상은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처음 나무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모양은 바뀌었고, 형태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물리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물을 술의 원료를 넣고 발효시키면 이제는 더 이상 H2O가 아니라 알콜이 됩니다. 이를 일컬어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무슨 변화이겠습니까?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변화는 껍데기 변화인 물리적인 변화가 아닌 근본적으로 변한 화학적인 변화임을 말입니다. 물이 포도주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물이 포도주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2004년도에는 여러분도 이렇게 바뀌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물의 빛깔이 변했습니다.

물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는 액체인데 포도주로 변한 후에는 붉고 아름다운 빛깔이 되었습니다. 2004년도에는 이와 같이 변하시기 바랍니다. 늘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기쁨의 얼굴로 바뀌어야 합니다. 늘 화가 나있는 듯한 얼굴이, 포학했던 그 얼굴이 평화롭고 유순한 얼굴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왜 갑자기 얼굴이 그렇게 밝아졌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또한 2004년도에는 내 말의 빛깔도 변해야 합니다. 비난의 말이 칭찬의 말로, 원망의 말이 감사의 말로, 짜증의 말이 격려의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둘째, 물의 맛이 변하였습니다.

물은 심심하고 아무 맛도 없으나 포도주로 변한 후에는 달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가 됐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 맛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2004년도에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04년도에는 맛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04년도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물의 가치가 변했습니다.

물은 본래 값이 없습니다. 우리가 수도료를 무는 것은 물 값이 아니라 사용료일 뿐입니다. 이렇게 물은 값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포도주 된 후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여섯 동이를 부으면서 한푼도 안 냈던 무가치했던 물이 이제는 한 동이에 수백만원을 홋가하는 고급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전에는 나같은 게... 했는데 2004년도에는 나라는 가치를 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용도가 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현관에 물 항아리를 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서는 집안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손발을 씻는 규례가 있는데 가나 혼인집이 돌 항아리를 여섯이나 둔 것은 손님들의 손발을 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물은 손님들의 손발을 씻는 천하게 쓰는 물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포도주가 된 후에 고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전에는 불의의 병기로 쓰여졌었습니까? 이제 2004년도에는 변하여 의의 병기로 쓰여지시기 바랍니다. 비난하던 입이 전도하는 입으로, 고스톱 치던 손이 봉사하는 손으로, 내 일을 위해서만 돌아다녔던 발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전에는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았지만 변하니 의의 병기로 쓰여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2004년도에는 이렇게 변합시다. 

2. 신앙적인 변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삶의 변화, 근본적인 변화 이전에 신앙적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변화만이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4년도에는 우리 신앙이 이렇게 변해야 합니다.

첫째,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합니다. 교통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왔다 갔다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받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3가지를 주시는데 은혜와 축복과 생명입니다. 이 3가지가 다 중요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축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만 하나님 편에서는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생명 공급”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죄와 싸워 이길 수도 없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죄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그런 내가 죄와 싸워 이긴다?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력을 언제 공급받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습니다. 따라서 예배 생활의 성공은 곧 신앙생활의 성공이요, 신앙 생활의 성공은 곧 인생의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 실패는 신앙실패요, 신앙실패는 곧 인생실패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목축을 하기 때문에 이사를 많이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꼭 장막을 세운 옆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을 쌓았습니다. 반드시 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이 무엇입니까? 제단이란 신약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로 말하면 예배 중심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예배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 예배 실패로 크게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배생활이 철저했던 아브라함이 한 번은 제사를 드리는데 귀찮아서 그랬는지 하여튼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그냥 통째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셨는지 아예 10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그 10년의 세월이 아브라함에게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한번 생명공급이 중단되니 지옥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4년도는 여러분들도 예배를 통해서 생명을 공급받아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일 오전 예배를 잘 지켜야 합니다. 시간도 잘 지키고, 맡은 순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후예배도 참석해야 합니다. 낮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 다르고, 오후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양하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가서 수요예배도 참석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잘 알지 않습니까? 월요일 화요일쯤 되면 생명력이 쇠퇴되는 느낌을 가지실 겁니다. 그런 때는 수요일에 한번 더 나와서 재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목, 금, 토요일을 여유 있게 이길 수 있는 겁니다.

둘째, 새벽기도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기도는 주님 안에서의 호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많이 하면 주님을 호흡하기 때문에 그만큼 주님을 닮아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되 잘못된 기도는 절대로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기도하고도 기도했다는 것 때문에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나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내 참 모습을 보기 때문에 더 겸손해지고, 더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한 분들을 보면 정말로 겸손합니다. 정말로 온유합니다. 정말로 변화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중심으로 기도한 것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했다하더라도 절대로 내 머리카락 하나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요청의 기도 이전에, 내 자신의 처절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고 울부짖으며 통회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최근 기도를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을 보고 울부짖어 본적이 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꼬!” 탄식해 본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절대로 여러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합시다. 이대로 가면 안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생명력이 끊어져 바짝 마른 삭쟁이가 되어 나무로부터 언제 끊쳐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끊쳐지는 날에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불쏘시게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새벽기도 합시다. 심야기도회에 참석합시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변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의 자리에 빠지지 맙시다.

셋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을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 말짱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뜻대로 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성경으로 확인해 보셨습니까?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놀랍게도 잘못 알고 믿는 것이 수두룩 할겁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님이 있는데 그분은 한해에 성경을 15독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공사판에서 노가다 하시는 분인데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사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거칩니까? 그분도 예외가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변하더라는 겁니다. 지금은 안산에서 직장이 안정되어 출근하는데 안산까지 출근버스를 타면 두시간 걸린답니다. 그러니까 왕복 4시간입니다. 게다가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가면 출근시간까지 한시간 여유가 있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밤 10시랍니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니 언제 성경 읽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새벽기도 끝나고 출근하기 전까지 한 시간동안 성경 읽습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12시 잠들기까지 성경 읽습니다. 3시간을 성경 읽는 겁니다. 그 부인이 아주 불만이 대단하답니다. 저 양반은 성경에 미쳤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출퇴근하는 4시간이 그렇게 아깝더라는 겁니다. 그 시간에 성경을 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이 눈이 아주 안 좋습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차에서는 안경 끼고 도저히 성경을 읽을 수 없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차에서도 성경 읽을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눈이 좋아져서 지금은 안경을 벗어 던지고 왕복 4시간동안 차에서도 성경을 읽는 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상황 속에서 15독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더니 큰소리가 사라지고, 술도 사라지고, 담배도 끊고 텔레비전도 안보고... 어쩌면 그렇게 사람이 변하는지 그야말로 180도 바뀌었다는 겁니다. 무엇이 그분을 이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성경으로 여러분들도 한번 변화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넷째, 가정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정 예배란 하나님을 내 가정으로 임재시키는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저는 단언하건데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고는 절대로 가정이 변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남편이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내가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자녀가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가정 예배는 여러분의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것이요, 가정의 기도제목을 단시간 내에 이루어줄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님 중에 딸 하나 낳고 단산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딸이 점점 크면서 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저 핑계 댈 말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실거라고... 그냥 그렇게 둘러댔습니다. 믿음 가지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뭐라고 말하기 난처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이후부터 가정예배 드릴 때마다 동생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때마다 엄마 아빠는 피식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부흥회 갔다왔는데 사모님이 임신이 되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도 기가 막혀서 의심(?)했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알아보니 진짜 목사님의 애기가 임신된 것입니다. 가정 예배 때마다 기도했던 그 아이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예배의 파워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변화되기를 원하는 가족이 있습니까? 구원받기를 원하는 가족이 있습니까? 가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한해가 지나기 전에 응답될 것입니다.

다섯째, 전도해야 합니다.

금년도 우리교회 표어는 ‘전도에 미치자!’입니다. 왜 이 표어를 선택했느냐? 예수님은 전도에 미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전도에 미쳤습니다. 사도바울도 전도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전도에 좀 미쳐보자는 것입니다. 평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한 해 동안만은 전도에 미쳐보자는 것입니다. 눅8:1을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복음 전파가 중요하고 시급했으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복음을 증거하셨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 혼자서 복음을 전하시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마10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전도에 투입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11:1에 가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12제자를 파송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도 모자라 다시 복음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70인을 택해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면을 볼 때 예수님께서 전도의 중요하고 긴급하게 여기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예수님이 직접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전도하셨고, 12제자를 파송하셨고, 70인을 다시 보내시고... 그것도 모자라 행1:8에 유언으로까지 남기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이 보시는 관점처럼 긴급하게 보고 있습니까? 주님과 우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 영혼을 보고, 못 보고의 차입니다. 주님 눈에는 당장 지옥가는 영혼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느긋한 것입니다. 지옥 갈 영혼을 보니 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보이니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뭇 영혼들은 지옥에 차례차례 떨어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도해야 하느냐?

(1)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마28:19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세상의 불효자식도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말은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하물며 청개구리조차도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않습니까?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유언을 이 땅에 남기시고 간 유언을 지키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마28: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합니까?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신 다음에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는 아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전도의 현장에 뛰어 들어가 보면 압니다. 그 현장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쓴 “기도해 보지 않을래요?” 라는 책 속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일본에 이또오 에이이찌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야마구찌 현의 보우후라는 곳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이 목사님에게는 중국 선교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침 선교사로 갈 기회가 생겼고, 그래서 교회에 얘기를 하고 교회의 허락을 받고 중국으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갈려고 보니까 돈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성도들이 1엔, 2엔, 3엔...씩 선교헌금을 해주어서 배표는 살 수 있었습니다. 배표를 사고 보니 딱 1엔이 남습니다. 지금 선교를 가려면 최소한 50엔은 있어야 합니다.(당시 화폐가치로) 그런데 1엔 가지고 어떻게 중국선교 여행을 떠납니까? 겨우 몇 끼 식사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도 해볼까 했지만 이미 광고도 다 되고, 배표도 사놓고 했으니 지금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선교사로 간다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게는 1엔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일이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시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여전히 1엔이었습니다. 그래서 1엔을 가지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1엔을 포켓에 넣고 기차를 탔습니다. 역에는 자기가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 중 13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이 1엔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 다녀오시라고 봉투를 하나 주는데 뜯어보니 30엔이 들어 있습니다. 선교 헌금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기차가 섰는데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혹시 이 기차에 에이이찌 목사님이 타고 있으면 잠시 플렛홈에 내려오시라고 말입니다. 내려갔더니 자기가 알지 못하는 교인인데 몇명이 평소에 목사님을 존경했는데 오늘 중국으로 출발하신다고 해서 저희들이 헌금을 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필요하면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봉투를 하나 주는데 15엔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자른 49엔중에서 45엔이 생긴 셈입니다. 그런데 시모노세끼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어떤 교인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에이이찌 목사님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목사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헌금을 했는데 지극히 작은 금액이지만 중국선교를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그리고는 아주 작은 금액이라 창피한 모습을 봉투를 건내 주고는 급히 사라졌습니다. 배를 타고 뜯어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한동안 할 말을 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두 사람이 2엔씩 헌금해서 4엔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합해서 얼마입니까? 49엔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머니에 들어 있는 1엔까지 합해서 딱 50엔입니다. 과연 주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에이찌 목사님에게 49엔을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선교를 떠나는 목사님을 향한 하나님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일로 하나님께서 나와 분명히 함께 하신다는 담대함을 얻고 중국으로 갈 수 있었노라고 간증했습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도처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모릅니까? 전도를 안 하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3) 우리가 피 값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겔3:17-19을 보면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는 설교하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그 누군가 여러분이 증거하지 아니하므로 지옥에 갔다면 그 책임을 여러분에게서 찾으실 것입니다.

(4) 빚을 갚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의 빚 말입니다. 대동강변에서 목잘려 죽은 토마스 목사님이 대가를 받고 죽었습니까? 아펜젤러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죽으신 것이 대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아무 대가없이 그저 생판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신앙 선진들이 목숨 걸고 지켰고, 또한 목숨걸고 전했기에 우리에게까지 들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우리도 그들 방식처럼 똑같이 전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4년도는 좀 다르게 삽시다. 변화된 모습으로 삽시다. 그래서 금년에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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