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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발을 두 손에 안고 (왕하 4: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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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발을 두 손에 안고
본문 : 열왕기하 4장 17절∼27절

내용

이달 1월 22일은 저희 어머니의 14주기 추도예배가 있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 남아있는 6남매 저의 형제 중 유일하게 저만이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동생의 운명과 주검을 보았습니다만, 가족이 죽었을 때의 그 심정은 체험한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낮이 밤같고 밤이 낮같은 그 혼돈과 어지러움, 허무와 슬픔으로 인한 눈물 때문에 어느 한곳을 응시치 못하고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그 황망스러움...시인 릴케는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을 ‘깜깜한 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마는, 참으로 그러한 죽음 앞에는 모든 단어가 무색한 어떤 멍한 상태 혹은 어둠과 방향감각의 상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탈진현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제 경험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한 장면을 여러분이 먼저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아들의 시체를 안고있는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바로 이 여인, 곧 수넴여인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참으로 그 얼굴이 너무도 보고싶은 여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죽었던 그 수넴여인의 외아들은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그 분위기가 부활의 축복으로, 장례식이 있어야 할 그 집안이 잔치집으로 변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죽음의 분위기’라는 용어를 여러분께 말씀 드렸습니다. 마치 무덤과 같은 삶, 살았다하나 실상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의미없는 생활을 하는 자가 있다면, 오늘 소개할 이수넴여인에게서 그 어떤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자기 아들의 시신을 안았던 수넴여인의 손, 그러나 이제는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난 축복의 아들을 받게되는 그 변화의 과정을 함께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묘한 일입니다.
저는 다른 기적이 아니라 부활의 기적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건들을 살펴보다가 참으로 저를 깊이 생각게 하는 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11장 중에서)」
또 나인성의 기적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눅7장 중에서)」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도르가의 사건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메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모든 과부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장 중에서)」

그리고 유년 주일 학생도 잘 아는 사르밧 과부의 일입니다.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떡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이 후에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증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왕상17장 중에서)」

이상의 사건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배경에는 대부분 여인이 등장하였고 그 등장한 여인들의 행적이라는 것이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데에 저의 놀라움은 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기적의 주체자요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천지가 요동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는 시체가 일어날리는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들이 원하지 않아도 주님의 뜻이며는 마른 뼈다귀가 살아납니다. 기적은 오직 하나님만의 전권적인 것이지 인간들의 어떤 행위가 그 기적의 필요적이며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들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며는 거기에는 그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로서 쓰셨던,  곧 하나님이나 그 종들을 기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준 ‘인간행동들’이 발견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전권적인 주관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때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인간행동들’이 하나님의 행사 배경에 펼쳐 있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 나인성 과부, 도르가, 사르밧 과부등...그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은 분명 보통 여인들과는 다른 어떤 특이점이 있다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결코 크고 대단치 않은, 곧 우리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상적이라는 것을 보게되면서 우리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할 수 있으며 도르가처럼 바느질로서 능히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수넴여인도 특별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우리와 같은 일상의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독 그녀에 대하여 4장과 8장의 두장을 할애하면서 강력하게 그녀를 그려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없고 남편은 늙었나이다-』-게하시의 말입니다만,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자기보다 훨씬 나이든 자를 남편으로 맞이했는지,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하여 자세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첫 부분에서 이 수넴여인을 천국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만, 그 첫째 되는 이유가 ‘질서있는 여인의 모습’이 바로 이 수넴여인의 태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인들이라는 책을 쓴 키엔카젠은 이 수넴여인을 창조적인 사고자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종을 위한 그녀의 주밀한 봉사 정신을 그렸지마는, 저는 그녀가 그러한 아름다운 생각의 실천에 있어서 ‘언제나 남편과 상의하고 허락을 득하는 그 질서있는 모습’에 더욱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 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 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그녀는 나이가 많고 늙은 남편을 무시하지 않고 존경했으며 자기 하인에 대해서도 결코 주인된 위세와 교만이 없는, 말 그대로 귀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자식이 죽었고 즉시 갈멜산에 가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남편에게 자기의 외출과 사환의 대동과 나귀사용의 허락을 득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묻습니다. 이때 이 여인의 답변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평안이니이다-미주 크리스찬 신문사가 발행한 영어성경에서는 ‘It will be well’로 표현하면서 이 수넴여인이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침상에 눕힌 것은, 자기 아들을 살리는 길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있다는 암시라고 그의 신앙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닥쳐왔는데도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미친듯한, 어쩔 줄 모르는 태도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수넴여인의 고상한 모습, 남편에게 말을 아끼며 인내하는 신앙의 조용한 여인, 결코 악착스럽지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은 여인,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제멋대로 하지 않는 이 여인, 진정 귀감이 되는 가정주부다운 이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성경의 표현대로 ‘귀한 여인’이 된 이유는 보다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죽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입니다. 
저는 지금 이 여인의 모습에서 참으로 비밀스러운 열쇠처럼 3가지의 귀한 단계를 찾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곡식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그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성경학자는 이 어린아이의 두통을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일사병으로 해석을 합니다만 바로 이 아들의 죽음에서부터 이 여인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계속 자기가 품었던 자기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지금 가장 슬픔과 고통의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자기를 가장 기쁘게 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와 희망이었던 이 귀한 것이 돌연 가장 내 가슴을 에이게 하고 찌르는, 그 주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때 이 수넴여인이 취한 첫 번째 일은 이 아들의 시체를 즉시 하나님께, 곧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침상으로 옮겼던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는지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참으로 바른 자세였습니다.  가슴에 안겨진 이 짐을 하나님께 그녀는 맡겼던 것입니다.  내가 가슴에 안고 고민해보았자 ‘썩는 냄새’일 것입니다. 문제가 닥칠 때, 괴로운 일이 가슴을 찌를 때, 이유는 모르고 원인도 모르지만 일이 꼬이고 답답함으로 삶 자체가 힘이 들 때, 그 첫 번째 일은,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밟아야 할 수순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의식이고 생각의 전환입니다. 그 아들을 누가 주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인 자식이었습니다. 이 아들의 시체까지도 하나님의 것인 것입니다. ‘아들을 침상에 누이며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문을 닫는’,이러한 자세를 이 수넴여인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넴여인은 80리 길을 달려 갈멜산에 간 두 번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수넴여인이 그 먼길을 달려 갈멜산에 도착하는 모습을, 오늘날 성도가 교회를 찾는 모습과 동일시하는데 여러분의 전적인 동의를 얻고 싶습니다.   
참으로 단순해집시다. 복잡하게 생각하여 나의 비유가 너무 비약된 것이라고 비판치 않기를 바랍니다.
수넴여인이 엘리사의 득남소식에 너무 기뻐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이 고백만 보아서도 이 여인의 신앙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녀는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신앙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고 ‘갈멜산에 가는 행동’ 곧 공간을 옮긴, 환경을 바꾼 수고를 한 것입니다.  이 행위가 오늘날 ‘교회출석’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확고한 지지를 저는 참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무교회주의가 세력을 확장하고, 세상의 편리함이 신앙생활을 침해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교회의 존재가치가 침해되는 흐름을 우리는 방어해야 합니다. 집 안방을 걷어차고 나와 교회로 나가 홀로 무릎을 꿇는 모습...그러한 신앙을 체험한자는 그 가치와 특별함을 알 것입니다. 그렇게 수넴여인은 갈멜산에 나왔습니다. 남편의 말처럼 초하루나 안식일도 아닌데 이 여인은 시일이나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문제를 안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어스름한 창문의 불빛 아래서 소리쳐 그리스도의 이름을 호명해 보십시오. “예수여 예수여”144장의 찬송을 기도로서 주님께 드려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수넴여인의 최고의 모습은 그러나 따로 있었습니다.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설교문을 작성하다가 여기에서 글을 멈추고 밖에 나가 울었습니다. 가만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구나-엘리사의 이말...말없이 그만 엘리사의 두발을 안아 엎드린 수넴여인의 그 모습....
너무도 서럽고 슬퍼서 교회에 나갔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그만 울고만 있었던 내 모습이 많았음을 정직히 고백합니다. 저는 이 수넴여인의 모습에서 실로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엘리사 앞에 엎드려 말없이 두 손으로 그 발을 안은 수넴여인의 모습, 오늘 제가 제목으로 여러분께 드리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 엘리사도 즉각 수넴여인의 심중에 깊은 괴로움이 있음을 알았고 바로 이 모습을 여호와와 직결하여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에서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무릎을 꿇는다든지 혹은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청언을 하기 위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자세에 그치지 않고 엘리사의 발을 끌어 안았다함은 그녀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하여 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간절함」오늘의 초점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간절함이 없는 예배, 간절함이 없는 기도, 간절함이 없는 신앙의 태도! 이것이 마치 암처럼 기독인에게 퍼지는 병이라는 소리입니다. 교회까지는 나왔습니다. 갈멜산에는 왔습니다. 잘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는, 가장 의미있는 존재가 이제는 가장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되었을 때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온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간절히 참으로 지성스럽고 절실하게 주님의 발을 두 팔로 안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의 심정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세의 심정으로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그런 자세의 심정으로 주님을 생각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진정 예배를 진행하는 목회자의 우선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녕?”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장난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예배는, 모든 기도는 드리는 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를지언정 표현되는 형태는 ‘엎드려 주님의 발을 두 손에 끌어안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며 또 그래야 합니다.

수넴여인의 이 모습에 하나님의 사람도 긴장하며 마음이 급해집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고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이 구절은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표현합니다.

아들은 살아났습니다. 자! 우리는 이 수넴여인의 귀한 행동에서 이처럼 몇 단계들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그 문제를 즉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궂이 성경에 「문을 닫고 나와서」라고, 문을 닫았다는 표현을 쓴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 다음 수넴여인은 갈멜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안았던 그 두 손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발을 끌어안았습니다. 간절함이 온몸에 사무쳐 하나님의 사람을 긴박하게 만드는 청원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 아름다운 교회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함이 갈수록 없어지고 편리하고 축복소리만 진동하는 교회의 타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앞에 엎드려 그 발을 끌어안는 수넴여인의 그 간절한 모습이, 주님께 향한 우리 계명교회의 모습이고 성도의 모습이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이 간절한 모습의 신앙인이 또한 바로 여러분이 되어서, 이러한 간절한 교회의 이 땅위 설립을 위해 더욱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이여.
주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가상의 공간에서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주께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혹 무거운 짐을 가진 자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연고로 그 짐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른다해도 오 주님께 완전히 맡기게 하시고 간절함으로 주께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신 그 기쁨과 축복의 역사를 주여 이 글에 마음으로 참여한 우리에게 허락하시옵소서! 주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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