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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을 넘어 소망의 장래를 열어가라 / 잠 2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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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 소망의 장래를 열어가라 / 잠언 23 : 17-19

젊은이 설교 홈 myhome.naver.com/chapelaimhj 천안외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기에 독일 나치의 감옥에 끌려가 수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경험을 쓴 것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입니다. 내용 중에 1944년 성탄 전후, 그리고 1945년 신년 연휴 전 후를 통해서, 그러니까 불과 2주 사이에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왜 죽었느냐? 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이번 크리스마스 쯤 되면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겠지. 집으로 돌아가 크리스마스 추리를 켜놓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겠지.' 이렇게 막연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성탄이 지나가는 대도 전혀 석방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너무 절망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들어 2주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절망의 현실에서 무릎을 꿇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현실에서 소망을 가지면 장래를 얻게 됩니다.
 
  오늘날 이 절망의 그늘에서 소망을 잃고 좌절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의 사회적 문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살문제와 이민문제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2003년 8월 5일 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총 자살건수는 13,055건입니다.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50%이상 많았다고 합니다. 사회현상으로 두드러진 것이 이민인구의 기아 급수적 증가입니다. 최근 한 쇼핑업체에서 이민 상품이 대박을 터트려 무려 80분간 175억을 판매했다고 합니다. 이민 열풍이 이민 광풍으로 일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전문가들은 진단하기를 현실을 보면서 희망을 잃고 절망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민전체 60%가 바로  20-30대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며 소망 없이 살아야 하나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는 없을까요? 현실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희망을 볼 수는 없을까요? 암담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절망의 현실에서 소망의 장래를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절망의 현실을 희망의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절망의 현실에서 절망을 넘어 소망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 절망의 현실에서 소망의 장래를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왜 절망합니까? 비교하면서 일어납니다. 부러워하면서 절망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왜 그리도 안 될까? 나는 왜 이 꼴인가? 저들은 잘 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이렇게 비교하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러면 우울해집니다. 절망감이 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 17절에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제 절망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좌절감 속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비관할 때 절망합니다.

  죄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나는 그렇게 악하지 않게 살고 열심히 사는데 왜 이 모양인가 하면서 절망합니다. 남의 형통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그들의 형통이 부럽습니다. 비교하면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형통은 미끄럼위에 있는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솔직하게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 기왕 80년 90년을 사는데 적당하게 살고 싶습니까? 풍족하게 누리고 부자로 잘 살고 싶습니까? <네 잘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삽니까? 아니면 남 사기치고 등쳐먹는 놈들이 잘 삽니까? 등쳐먹는 놈들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어떤 반에서 수업을 하는데 학생이 그래요. 어떻게 살기를 원합니까? 그랬더니, 그 학생 대답하기를 “등쳐먹는 놈들을 등쳐먹고 살겠습니다.” 아주 JQ가 높습니다. 잔머리 지수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남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부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모방하지 말고 자기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십시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하십시오.

  어떤 날 영국 황제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순시하고 있었답니다. 조그마한 동리에 이르렀을 때, 방앗간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한 할머니가 혼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너무 아름답게 여겨져서 한 번 불러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 워 아니 하여도 나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이 찬송을 듣고 임금님은 너무 기뻐서 다시 부탁하기를 2절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이 할머니 얘기가 “이 찬송은 내가 만든 거라서 2절은 없습니다. 1절뿐입니다.” 임금님은 즉석에서 가슴에 우러나는 생각이 있어서 “내가 2절을 만들어 부르겠습니다. 지어 줄 터이니 앞으로 2절을 꼭 부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황제 날 - 부러워하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왜 절망합니까? 절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교하면서 생깁니다. 부러워하면서 생깁니다.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만의 인생이 있습니다. 비교할 때 당신의 고유한 특성을 상실합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고유한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현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만족하면서 인생을 펼쳐나가십시오. 절망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절망은 사단의 단어입니다. 우리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이겨나가십시오.

  둘째, 장벽 때문에 장래에 대해서 소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현실의 절망적인 장벽 때문에 우리는 장래에 대해서 소망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넘어서 소망의 장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소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네 장래가 있겠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장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나의 소망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 현실의 장벽 때문에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장래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의 인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장래를 예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결코 미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악성 베토벤이 서른두 살에 가장 슬픈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미리 써 놓은 유서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거라고 희망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잠시 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불우한 존재여.” 음악가가 귀머거리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작곡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이처럼 절망적이고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있다는 겁니까? 다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씁니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 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의 교향곡 제9번은 '기쁨의 송시'에 곡을 붙입니다. 곡이 연주될 때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보를 넘기면서 마음에서부터 노래를 들었습니다. 내면에서 오는 기쁨의 노래를 듣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을 극복합니다.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공저한『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제목이 맘에 듭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는 바로 소망의 시간입니다.
  서양의 속담에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는 꼼짝 없이 죽었구나 생각하고 네 다리를 쫙 뻣고  죽었습니다. 다른 한 마리는 깊은 우유 통이지만 살아나가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헤엄쳤습니다. 열심히 헤엄치다보니 우유가 버터가 되어 살아나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절망의 순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환경이 절망의 환경이어도 소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소망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비하심이 있기에 내 장래의 인생은 소망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장래의 소망을 다시 찾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정로(正路)를 걸어가십시오.

  절망을 넘어 소망의 장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정로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절망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은 걷는 것입니다. 정로라는 것은 굳건히 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인생길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듣고 지혜를 얻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찾아 가라는 말입니다. 그 길이 바로 정로입니다. 정로를 가는 인생으로 절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쩔 수 없기에 이젠 절망하는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순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죠셉 스크리븐(Joseph Scriven)이었습니다. 스크리븐은 영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카나다에 와서 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아름다운 여성과 약혼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위하여 오던 약혼녀가 배의 침몰로 사망한 것입니다. 스크리븐은 정신적인 타격을 받고 직업까지 중단할 정도로 3개월을 실망 속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호수에서 잃었으나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음으로써 인류를 사랑하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스크리븐은 맑은 샘이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작은 고통과 자신의 감정을 수습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날 밤 그는 시를 한 편 썼는데 오늘날까지 애창곡이 되어 있는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찬송가 487장입니다. 이 찬송의 2절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시험걱정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 속에서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아깝지 않습니까? 그 순간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그 순간이 바로 소망을 가질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소망의 미래를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절망의 현실에서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전 F. 케네디는 말하기를 “큰 위기는 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큰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기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주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절망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신뢰하십시오. 절망은 희망으로 바뀝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절망하는 순간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극복하는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미래는 항상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아는 분은 확실합니다. 내 인생은 불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아시는 분은 확실합니다.

  세상에는 소원을 품고 사는 사람과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소원'이나 '소망'이나 비슷한 말 같지만 본질은 엄연히 다릅니다. 소원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생겨나지만 소망은 하나님을 믿은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또한 소원을 품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지만, 소망은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선하게 이끌어 가실지를 기대합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의 삶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서 참 소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기도야 말로 절망의 현실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입니다.

  절망의 현실만 보면 미래의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의 현실에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의 날개를 달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 분과 함께 소망의 미래를 열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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