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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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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 (엡 6:4)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함께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강력한 복음의 능력으로 뒤덮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이 시대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찾아 실행하여야 합니다. 

지난 새 생명 대 축제로 많은 심령을 교회로 초청했고 등록을 시켰습니다. 계속하여 전도하며 양육하는 일을 해야 하겠기에 금년 표어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목회방침에 있어 생활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 하는 교회(딤전 4:6)입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 (딛2:11,12)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 (딤전4:6) 지식과 명철로 양육 (렘3:15) 선한 행실로 양육 (딤전4:6)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양육(히 10:24)하는 교인입니다.

월별 실천 사항으로 1월은 하나님을 본받아 양육(사1:2) 2월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양육(엡5:29) 3월은 목자를 본받아 양육(겔 34:23)  4월은 아버지를 본받아 양육(살전2:1)  5월은 유모를 본받아 양육(살전2:8,9)  6월은 사라를 본받아 양육(창21:7) 7월은 바울을 본받아 양육(고전3:2)  8월 한나를 본받아 양육 (삼상 1:23)  9월은 엘리를 본받아 양육(삼상2:11) 10월은 여호세바를 본받아 양육 (왕하11:2,3) 11월은 요셉을 본받아 양육(창 45:10,11) 12월은 의인을 본받아 양육(마25:37,40)입니다.

성구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5)입니다.

그래서 표어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양육은 기본적으로 새 신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훈련은 리더를 위한 것으로 이해들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수년간 훈련은 리더와 새 신자를 위해서 공동으로 사용했지만 진정으로 새 신자를 훈련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새 신자 교육을 양육으로 리더교육을 훈련이라 구분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전도가 귀한 만큼 양육도 귀합니다.  양육(엑트레포)은  '가르쳐 길들이다, 교육하다, 기르다, 가르치다'를 의미합니다.

중국에는 거위에게 억지로 먹이를 먹이는데 그러면 거위는 금방 성장하는데 그들은 억지로 먹이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거위 주위에 음식이 많더라도 스스로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도 이와 같은 면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새 신자가 교회에 예배하고 다시 집에 갔다 다시 교회에 오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치 억지로 먹는 것처럼 되면 나중에 스스로 먹는 법을 모르게 되어 성장이 없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같고 스스로 먹지를 못한다고 지적들을 합니다.

새 신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양육입니다. 새 신자가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육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생산적인 제자가 될 때까지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 종류의 문제를 안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위해서 계속 섬기며 영적으로 변화 시켜 생산적인 성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배우게 하되 스스로 말씀을 배우게 하는 고기를 주는 방법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옛날 한 덕망 높은 관리가 변방의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장은 관리에게 마을의 견고한 방비상태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선 병사들이 철옹성처럼 구축한 진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조망이 무섭게 엉켜있는 국경의 수비망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관리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장은 관리의 격려를 유도해내기 위해 거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굉장한 방어력이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라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이 마을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것은 군사가 아니라 학교와 가정입니다. 왜 나에게 제일 먼저 학교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강력한 군대가 최상의 방어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이 강한 것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교사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이라 합니다.(인터넷 정보클럽)

양육에 있어 누가 양육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양육자에 따라서 신앙인격이 달라지고 신앙생활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서먹한 관계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부모의 일차적으로 부모의 양육을 받습니다. 어린이가 낯 갈이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양육자는 일차적으로 인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자가 양육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양육자가 양육하도록 연결해 주어야 합니다. 종국적으로는 먼저 믿은 성도들 모두가 새 신자들을 양육하는 양육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 또한 중요 합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한꺼번에 열 명을 낳게 하지 않으시고 한 명씩 낳게 하신 이유는 그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새 신자들을 양육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듯이 일대일로 양육하는 방법이라고들 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하려면 먼저 양육자의 기본적인 교양이 필요합니다. 새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양육내용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면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성실히 인내하며  사랑으로 새 신자 양육을 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양육할 것인가 하는 내용 또한 중요 합니다.

성경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교양(파이데이아)은 `훈련, 훈계, 징계' `훈육'을 함축합니다.

훈계(누데시아)는 '경고'로도(고전10:11)교육 방법에 대하여도 사용되었습니다.(엡6:4).
양육하는 올바른 방법은 교양과 훈계로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양과 훈계는 자신의 생각이나 가문의 전통 따위를 내용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을 근거로 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주의 교양과 훈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옥스퍼드 원어성경)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은 하나님의 인간 교육 방법을 강하게 반영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계속 보존케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징벌을 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고 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이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 징계 속에서입니다. 고난이나 징계는 아버지가 책임 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 보면, 징계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보증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입니다.

징계나 고난은 기독교인을 영적 투쟁을 위하여 강하게 하는 훈련만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는 징계나 고난의 경험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 곁에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경험은 그에게 그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조차, 참된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가 그를 교육하고 '징벌하는'데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는 더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궁극적인 통찰력 없이 자녀를 징계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으나,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하십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10)고 합니다.

이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라고 합니다.

이런 '교양과 훈계'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 양식을 가르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메시야로 아는 지식과 믿음 가운데서 새 신자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삶과 교육으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양육책임자가 먼저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훈을 받으며 책망을 받으며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는 과정과 결과를 새 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친히 듣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말씀을 서로 나누고 삶 가운데 적용하며 적용의 결과를 서로 느끼며 생활로 보여주는 교육은 살아있는 교육이 됩니다.

수년 전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를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보십시오."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습니다.(사랑의 열매-디럭스바이블)

훈계는 복을 가져오는 전조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받을 때만 그 복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훈계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 책임이고 할 일입니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음식이 결코 몸에 유익하지 않은 것처럼 훈계도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히려 성격이 황폐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는 목적은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려 함이 아니라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를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때에 따라 가지도 치시고, 약도 뿌리시며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훈계에는 목적이 있어 부드럽게도 하고 절제케도 하며 강건하게도 합니다.

이씨 조선 영조 때의 이름난 학자 이재(李縡)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양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가 12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작은 아버지이자 당대의 정치가인 이만성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까닭에 이 아이의 앞날이 잘못될까 걱정이 됩니다. 이 아이를 맡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괜히 귀한 집 아들에게 매를 들어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거절했으나, 어머니는 끝까지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결국 그날 이후로 이재는 작은 아버지의 집에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이만성이 형수, 즉 이재의 어머니를 찾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형수님, 용서해 주십시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 글쎄, 글을 읽으라고 분부하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마당에서 장난을 치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고 매를 들었는데, 그게 잘못되어 그 녀석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시동생의 말을 듣고 난 이재의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찌 제 자식 놈이 미워서 매를 드셨겠습니까 ! 다 잘되라고 한 것인데 제 명이 짧아 그렇게 된 것이겠지요." 이만성은 형수의 태도에 깜짝 놀라 일어서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형수님, 실은 모두 거짓입니다. 제가 형수님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형수님께서 그렇게까지 저를 믿고 아들을 맡겨 주셨으니 이제부터라도 더욱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이재는 20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문인으로 이름을 떨치는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양육에 여러 가지 결과 따를 수도 있습니다. 이를 두 나무에 견주기조 합니다.

하나는 '벤진'이라는 나무로 이 나무는 열대성 나무로서 옆으로 가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뻗어난 가지가 땅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옆으로 계속해서 가지가 뻗어나가 결국 거목이 됩니다. 많은 가지로 새들이나 동물들이 와서 한가롭게 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결정적인 약점은 옆으로 뻗어나갈 때 그 밑에는 단 한 포기의 풀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거목이 영양분을 빨아 올렸기 때문에 땅은 척박해지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주위에 생명력을 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나나 나무입니다. 바나나 나무는 육개월이 되면 반드시 옆에 한 싹을 냅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가 옆에서 자라 올라오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일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 바나나 나무는 계속해서 새싹을 만들고 다른 나무들이 자라도록 뒷받침을 해줍니다.

자기가 죽을 때에 무수한 다른 나무를 만들어내는 바나나 나무와 거대한 숲을 만들지만 마침내는 주변을 황무케 하는 벤진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교회가 웅장함과 영광스러움만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며 위대함만을 자랑한다면 쓰러질 때 자기도 죽고 주변도 황무케 하는 벤진 나무가 될 수 있다고 지적을 합니다. 반면 계속해서 싹을 키우고, 잘 자라게 할 뿐 아니라 베어진 자리에 무수한 싹을 만들어 낸다면 사람들에게 열매를 제공해주고 생물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여 잎사귀의 싱그러움으로 보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밥상도 되고 비를 피하는 우산도 되며 지붕을 잇는 재료도 되는 바나나 나무가 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계속해서 벤진으로 키워갈 것인가 아니면 바나나처럼 새싹인 사람을 잘 키워 이 땅에 싱그러움을 주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벤진 나무와 바나나 나무)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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