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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은혜의 때 /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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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4.  신년주일
고린도후서 6:1-2
지금은 은혜의 때 (1)

2004년의 새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새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04년의 새 해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새 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새로운 기회요, 도전이며, 새로운 삶의 장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받은바 은혜를 잘 간직하고, 믿음으로 2004년을 보람 있게 열어 나가는 새 해 첫 주일을 주님 전에 나아와 예배드리며 맞이합니다.

진정 2003년 새 해에는 우리 성도 성도님들의 심령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가정 가정마다 행복의 터를 깊게 하고 사랑의 터를 넓게 세우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시는 일마다 일터마다 일하는 기쁨과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보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에 갈등과 대립이 사라지고 많은 이들이 다 행복해지는 그런 새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새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성도님들, 이 해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교회를 통해서 삶이 부유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교회가 평안해야 내 생활이 행복합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내 생활이 윤택해 집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져야 우리가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지난 해 우리 교회는 일어나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해 설교문을 찾아보니 “가장 가난한 사람은 주머니에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에 꿈이 없는 사람이요, 진짜 시각 장애자는 현실만 보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는 내용으로 새 해를 시작했습니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은 여러 꿈을 주셨으며, 또 우리 성도님들 힘써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시고 헌신하셔서 은혜 가운데 한 해를 마감할 수 있었음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서른 살 난 청년 교회로서 사랑의 빚을 갚자는 꿈을 가지고 중국 조병산시에 공인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올해는 받은바 그 은혜를 잘 간직하고, 더욱 큰 은혜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를 이루고자 ‘넘치는 은혜로 성장하는 우리교회’라는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욱 믿음의 복된 길을 달려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2004년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거나 노력하거나 대가를 지불한 바가 없는데, 또 선물을 받을만한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바를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을 이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 사람들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산소를 계속 몸에 공급해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밥은 며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공기는 몇 분만 들여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집니다. 이렇듯 중요한 것이지만, 공기는 완전히 공짜입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이 산소를 마셔야 살 수 있듯이 태양 빛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햇빛을 받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 태양 빛도 완전히 공짜입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물은 어떻습니까?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혹 어떤 분은 ‘물이 무슨 공짜냐? 물 값, 상수도 요금은 내지 않느냐?’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도요금은 순수한 물 값이 아닙니다. 수도료는 우리가 사용하는 물을 정수하고 우리 집까지 끌어 들이는데 드는 비용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은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일반은총 또는 보편적인 은혜라고 하고, 자연적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땅 위에 생명을 누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이 은혜를 받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은혜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미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돌이켜보면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믿는 이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실 우리가 은혜를 말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이상의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선고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죄 값인 사망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 상에서 치르게 하시고,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는 자에게 죄 씻음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곡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나 대가가 아닙니다. 다만 그 구원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믿는 자에게만 그 효력이 있기 때문에 제한적 은혜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야말로 참으로 귀한 생명의 은혜요 영원과 이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은혜를 다시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돌보심,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와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절대로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란 분은 ‘하나님, 당신 안에서 받는 위로를 떠나서는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절대 필요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 없이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 가장 본질적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둘째, 은혜는 자격이 없는 가운데 얻어집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대체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잘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잘났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또 주위를 살펴보니 변변치 않은 사람들도 잘 살고 있는데, 잘난 나는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자세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누가 보나 별로 시원치 않은 사람이 예상 밖으로 나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기쁘고 복되게 살아갑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이야기하기를, 자기는 인물도 시원치 않고, 아는 것도 없고, 재주도 별로 없는데, 남편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마움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할수록 고마운 마음은 더 짙어집니다. 그저 큰 은혜 가운데 사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 집사님도 같은 말을 하십니다. 자기는 남처럼 돈도 많이 벌어 오지도 못하고, 그리 건강한 것도 아니고, 잘 난 것도 아닌데, 아내에게서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못난 사람일수록 자기만큼 상대방이 살아주지를 못하고, 상대방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실망하고 섭섭해 합니다.

자녀 교육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의 부모가 오히려 안달입니다. 그만하면 잘했다 싶은데도 그것 밖에 못하냐, 넌 누구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 아이들을 들들 볶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 아이는 공부를 잘 못하는데 그 부모는 태평합니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는 그만하면 잘하는 겁니다.” 자기 집안에서 제일이라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부모 된 내 자신도 별로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만 들볶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낮추고 또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은혜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교회를 핍박했고,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만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떤 여건에서도 진정한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생활에 감사도 기쁨도 은혜도 없습니다.

셋째로,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도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시점에 깨닫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배가 부르면 코가 둔해집니다. 배고픈 사람일수록 코가 예민합니다. 행복에 대한 감지력도 그렇습니다. 부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예민합니다. 부자집 아이들은 아무리 많은 용돈을 주어도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들은 조금만 주어도 아주 고맙게 받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합니다.

또 건강할 때는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병들고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건강할 수 있었던 그 귀한 은혜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병들고나니 그 건강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가를 뒤늦게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은혜를 깨닫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깨닫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시각 장애자로 태어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됩니다. 생각하면 40년 동안이나 소경으로 산 것이 억울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했느냐 따지고 들자면 할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떴습니다. 이것저것 복잡한 문제는 다 접어두고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셨다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단순한 마음, 이 깨달음,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은혜로 깨닫고 은혜로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과 기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가운데 강조되는 구절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는 말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이 ‘지금’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과거 내가 받은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앞날에 축복을 약속받고 있습니다만, 인내해서 미래에 얻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입니다. 여기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돈이 많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여기면, 그 돈이 없어지면 은혜도 사라집니다. 지금 내가 건강한 것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면, 그 건강을 잃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은혜의 현재성이 중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건강하건 병들었건, 성공했건 실패했건, 지금 이 상태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요건입니다. 오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오늘 여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내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일이 은혜의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 안에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 지금이 은혜의 날이라고 성경은 되풀이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바로 이 시간, 이 결정적인 시간을 최선의 기회로 만들라,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오늘, 이 현재의 시간을 은혜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로, 축복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좋은 일이 생길 때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환난과 핍박 속에 어렵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초대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내가 처한 이대로의 이 현장이 은혜 받을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이제 2004년이 새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이 다시없는 기회인 줄 믿습니다. 오늘이 은혜의 기회인 줄 믿습니다. 이 한 해 살아갈 때 이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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