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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 / 시 8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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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 
본문 : 시편 84:1~12 

40주년 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하여 감독님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선배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부흥되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회가 되기까지 많은 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세계를 향하여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본문의 말씀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갈 때에 부른 찬송시이다. 본문 말씀의 주제는 “행복”이라 말할 수 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우리 삶의 행복이다. 2004년 이 한해가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교회를 생각할 때에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게 하셨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양가의 아버님 어머님이 훌륭하게 목회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지금은 뒤에서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좋은 동역자들을 주시고, 한 마음으로 잘 협력하는 장로님들, 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 이렇게 좋은 생명의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가?

아마 이러한 마음은 우리 뿐만 아닐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교회를 생각할 때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 믿음의 사람인가? 우리는 이것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행복한 목사이다. 나는 행복한 성도이다. 나는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렇게 고백한다면 얼마나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좋을까?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자.

첫째로, 교회는 우리에게 평안한 쉼을 준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힘든 날개를 접고 둥지에 머무는 새를 생각해 보라. 그곳에 참된 평안이 있고 쉼이 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우리에게 쉼을 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엄청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살기에 힘이 들어서 사랑하는 식구들을 한 차에 태우고 모두 한강을 향하여 자동차 핸들을 틀지 않는가?

40년 전에 감독님께서 교회를 개척하여 시작하실 때에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셨다. 삶에 지쳐 힘든 자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었다.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셨다. 지은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용서의 은총이 가득한 곳이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기도회에 가던 어느 장로님이 쓰러져 있는 부랑자를 하나 발견했다. 의사였던 그 장로님은 혹시 그가 얼어 죽지는 않았는가 맥박을 짚어 보았다. 다행히 그는 살아있었다. 장로님은 그를 엎고 교회로 데려왔다. 그후 교회권사님들이 정성껏 그를 간호했다. 죽어가던 부랑자는 28살의 택시기사였는데 얼굴 피부가 마치 문둥병을 앓은 사람처럼 흉측했다. 그는 삼대독자로서 일찍부터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의 그 흉측한 얼굴 때문에 시집오겠다는 처녀가 없었다. 그는 절망하여 결혼을 포기한 채 돈만 생기면 술독에 빠졌다. 거리에서 발견된 그 날도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든 것이었다. 그는 교인들의 정성스런 간호에 마음이 녹았다. 그래서 그는 권사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잘못을 회개하면서 울었다. 며칠 후 그 택시기사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나 교회를 떠나지 않고 40일 동안을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얼굴을 덮은 흉측한 피부가 비늘처럼 모두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해졌다. 그는 거울로 자신의 깨끗해진 얼굴을 보면서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이삿짐을 가지러 간 그에게 하숙집 여주인이 본인이 아니라며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고 잘 살고 있다.

교회는 우리의 삶에 참된 쉼을 주는 곳이다. 참된 안식을 주는 곳이다. 새가족 헌신예배 때에 부르는 찬송이 있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황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다.”

이같이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쉼을 주는 곳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참된 행복을 얻는다. 둘째로 교회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린 남편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정으로 들어간다. 집에서 쉼을 얻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이면 힘을 얻어서 다시 직장으로 출근한다. 교회가 바로 이런 곳이다. 쉼을 얻고 힘을 얻는다.

배가 고프면 힘이 없다. 그러나 밥을 먹으면 힘이 생긴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지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우리에게 힘이 생긴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서 로스엘젤레스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를 본다. 얼마나 힘이 들까? 그리고 그 비행기는 그곳에서 다시 기름을 공급받고 다시 서울로 향한다. 머무는 동안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다시 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힘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아합왕 시대 때에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를 사백 오십명을 물리쳤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을 간다. 어느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그는 기진 맥진하였다.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한다. “하나님, 나를 죽여 주세요.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서 그는 죽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면서 “일어나서 먹으라” 머리 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이 있었다.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엘리야는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엘리야처럼 삶에 지쳐 스스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든 자들에게 쉼을 주고, 힘을 주는 곳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바로 우리 교회가 브엘세바 광야의 로뎀나무와 같은 곳이 되기를 바란다. 삶에 지쳐 힘이 들 때에 이곳에서 쉼을 얻고, 다시 힘을 얻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로, 교회는 우리에게 꿈을 주는 곳이다. 지친자들에게 쉼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는다. 여기에 끝나지 않고 꿈을 얻는 곳이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곳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할 사람인지 깨닫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라.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로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는다.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을 살리는 인생의 방향을 공급받게 된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할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하바드 대학의 전 총장이었던 나단 퍼시(Nathan Pusey) 박사가 젊은이들은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목숨 걸 대상”을 찾는다고 했다. 어디 젊은이들 뿐이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들 깃발을 찾고 목숨 걸 대상을 찾는다. 교회는 우리에게 목숨 걸고 흔들 만한 가치가 있는 깃발을 우리의 손에 쥐어준다. 교회는 우리에게 꿈을 주는 곳이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어느 사형수가 어린 딸의 손목을 꼭 쥐고 울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를 혼자 이 세상에 남겨두고 내가 어떻게 죽는단 말이냐" "아버지...아버지..." 마지막 면회시간이 다 되어 간수들에게 떠밀려 나갔다. 소녀의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그것을 신호로 하여 교수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소녀는 그 날 저녁에 종지기 노인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내일 아침 새벽종을 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종을 치시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아요." "할아버지 제발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슬피 울었다. "얘야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만약 내가 종을 안 치면 나까지도 살아 남을 수 가 없단다" 하면서 할아버지도 함께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다음 날 새벽이 밝아왔다. 종지기 노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종탑 밑으로 갔다. 그리고 줄을 힘껏 당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힘차게 줄을 당겨보아도 종이 울리지 않았다. 그러자 사형집행관이 급히 뛰어왔다. "노인장 시간이 다 되었는데 왜 종을 울리지 않나요?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지 않소"하고 독촉을 했다. 그러나 종지기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글쎄 아무리 줄을 당겨도 종이 안 울립니다." "뭐요? 종이 안 울린다니? 그럴리가 있나요?" 집행관은 자기가 직접 줄을 힘껏 당겨보았다. 그러나 종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노인장! 어서 빨리 종탑 위로 올라가 봅시다." 두 사람은 계단을 밟아 급히 종탑 위로 올라가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의 추에는 가엾게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소녀 하나가 매달려 자기 몸이 종에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 날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목숨을 대신해서 죽은 이 소녀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 사형수 형벌을 면해 주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어린 딸을 부둥켜안고 슬피 우는 그 아버지의 처절한 모습은 보는 사람 모두를 함께 울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 후에 그 사형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사랑의 빚을 지고사는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꿈을 공급받는다.

교회는 우리에게 쉼을 준다. 힘을 준다. 그리고 꿈을 준다. 계속하여 우리 교회는 쉼이 있는 곳, 힘이 있는 곳, 꿈이 있는 교회가 되어서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이 행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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