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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니엘의 아침 / 창 3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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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창 32: 22-31
제목 : 브니엘의 아침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창세기 32: 22-31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저는 오늘, 칠흑 같은 긴 밤의 영적 투쟁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손에 거머쥔 야곱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와 제가 이스라엘이 된 야곱처럼 브니엘의 아침햇살을 받으며 새해를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는 새해의 청명한 아침 햇살보다도 훨씬 더 찬란하고 눈부신 빛입니다. 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온 몸에 받으며 새해를 맞이하고 새해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러나 브니엘의 아침햇살은 칠흑 같은 긴 밤에 얽힌 투쟁과 고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브니엘의 아침은 밤을 지새운 고통과 영적 투쟁 없이는 결코 밝아올 수 없는 성격을 그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과 함께 브니엘의 축복을 가능하게 한 영적투쟁의 현장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이 길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주인공은 브니엘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야곱이라는 이름의 거인(巨人)입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얍복강 나루터에 이르기 전 야곱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야곱은 20년에 걸친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 유업을 이어받을 야곱이 비로소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챈 나머지 빈 털털이 나그네가 되어 고향 땅을 떠난 후 두 아내, 두 여종, 11명의 자녀와 수많은 가축을 거느린 재산가가 되어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때 야곱은 고향으로 들어가기 전, 형 에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속한 가축들 중 암염소 이백, 수염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를 떼어 보냅니다. 장자권을 탈취한 죄값을 조금이라도 속량 받기 위한 묘책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그에게 속한 권속들과 가축들을 얍복 나루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브니엘의 아침을 맞기까지 그는 얍복강의 위기 속에서 그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약속 받게 됩니다. 야곱은 이 절박한 인생의 전환점에서 브니엘의 빛나는 아침을 맞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 때문에 야곱은 그에게 속한 소유와 권속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것일까요? 아마도 고향을 등진 이후 쉼 없이 달려왔던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과거의 삶과 앞으로 펼쳐질 삶의 불확실성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새롭게 시작되는 고향 땅에서의 삶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은 야곱을 홀로 두지 않고 그와 담판을 짓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채찍으로 야곱의 인격을 그가 원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결정을 내린 것이지요. 단 한번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던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야곱의 기질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야곱은 그를 단련하시려는 하나님과 생명을 담보로 한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할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생명을 건 쟁투입니까? 영원한 생명, 오고 오는 믿음의 순례자들에게 예비 된 미래를 열어젖히기 위한 전 생명을 건 영적 전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얍복 나루는 하나님과 인간이 겨루는 혈투(血鬪)의 현장이 됩니다. 밤을 새워 하나님과 인간이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는 얍복강 나루터는 한 인간의 영적인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새 창조의 진통이 절규하는 현장으로 화합니다. 우리들도 홀로 선 단독자로 하나님과 생사를 건 영적 투쟁을 벌이는 순간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빈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바라기는 올 한해는 우리들 모두가 야곱처럼 단독자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적으로 거듭나는 은총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음으로 우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일은 "야곱이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혈투의 현장에서 받아낸 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의 삶의 위기의 순간에 그를 찾아온 하나님을 그냥 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격렬한 격투가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 하는 끈질김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간청합니다. 그의 인생이 직면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야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한 해를 지내며 야곱이 보여준 끈질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간청하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 전에 야곱을 향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야곱은 그가 받아낼 축복이 그의 이름과 관련될 줄이야 꿈에라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과 역사가 있습니다. 쉼 없이 달려왔던 파란만장한 야망과 투쟁의 세월들이 직조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속한 권속들과 가문의 영예가 그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전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과 영적 투쟁을 감행한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씨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네에바크’가 ‘먼지를 일으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밤을 새워 벌이는 영적 투쟁의 정도가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간청하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는 이유를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겨루어 이긴 자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유대인 학자로서 개신교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바 있는 마틴 부버의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 품성(Gottheit)및 인간 품성(Menschheit)과 더불어 싸워 이긴 자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란 참으로 하나님적인 품성과 인간적인 품성을 소유하기 위하여 영적 투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던 진정한 믿음의 장인(匠人)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그처럼 진지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한 모험과 도전 가운데서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한 진정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야곱은 참 하나님이요 참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주어진 이름가운데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뜻, ‘하나님이여 통치하소서!’라는 의미가 새벽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새 이름이 지닌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야곱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가 엄청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이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환도 뼈가 위골(違骨)되는 비싼 값을 동시에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 되는 일은 한 사람의 온몸과 존재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가운데는 그가 자랑하는 과거의 명성과 업적과 자랑이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야곱’, 아니 ‘이스라엘’은 인간적인 야망과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버린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의 삶을 주동하는 에너지는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입니다. 180도 전환입니다. 야망과 탐욕으로 얼룩진 낡은 인간의 삶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29절)라는 새 인간의 질문은 메아리 없이 끝이 나고 브니엘의 새 아침은 동터옵니다.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이전의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 세계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하나님을 어찌 낡고 유한한 세계의 틀 속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은혜(특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믿음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전사(戰士)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사가 걸린 얍복강 나루터의 긴 밤의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옛사람의 옷을 벗고 믿음으로 거듭난 위대한 하나님의 새사람이 탄생했습니다. 브니엘의 찬란한 아침햇살이 온 누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밤은 종식을 고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낡은 과거가 끝나고 무한히 열린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새 인간과 새 세계의 탄생을 지시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본문의 마지막 부분, 31절을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생명과 죽음이 교차했던 긴 밤의 전투 가운데서 죄와 야망으로 점철된 낡은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거듭난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새 인간 ‘이스라엘’은 위골된 환도뼈로 인하여 절뚝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무한한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새 인간이 행진하는 길 위에 브니엘의 아침햇살이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새 인간 이스라엘 앞에 펼쳐질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과 축복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는 새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습니까!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브니엘의 아침을 열어젖힌 야곱의 생사를 건 영적 투쟁의 역사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와 욕심의 본성으로부터 해방 받지 못한 자연인 그대로의 인간을 그의 동역자로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동역자로 선택하는 사람을 새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재창조하는 분이십니다.

신구약성경은 죄와 탐욕으로 물든 즉자적(卽自的) 인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믿음의 비전을 가진 대자적(對自的) 인간으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며, 시몬이 베드로가 되며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앙역사의 신비요 비밀입니다. 이 한해, 여러분들의 진정한 내면, 영혼의 깊은 곳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위에서 관찰한 옛 인간 야곱과 새 인간 이스라엘의 차이를 ‘야망’과 ‘비전’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얍복강에 이르기 전 야곱의 실존은 그야말로 야망(野望)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의 생명을 건 영적 싸움에서 야망의 사람에서 비전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야망과 비전은 얼핏 보기에 한번 설정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망과 비전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야망은 그 출발점이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독재자들이 흔히 빠지는 유혹은 이 세상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끔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재자들은 그들의 야망실현을 위해 동시대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무리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야망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해치는 흉기가 되었던 경우를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 등). 오늘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야망이 빚은 결과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야곱의 경우처럼, 야망의 사람에서 비전의 사람으로 재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비전이 야망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야망이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반면에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전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롭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인류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눈길은 오늘을 뛰어넘어 먼 곳을 향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미래를 향한 모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야망의 옛 인간이 아니요, 비전의 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도구로 삼아 믿음에 의해서 통치되는 나라,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믿음의 왕국의 백성들이요 후예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믿음은 야망이 아니고 비전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분의 일(비전)을 완성하기 위해서 미래 가운데 전 존재를 던지는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의 실존입니다. 역사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믿는 자들의 비전이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비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을 구원하며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열린 미래를 창조합니다. 사랑하는 할렐루야교우 여러분들은 모두 참된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새해에는 우리들도 야곱처럼 우리에게 속한 모든 소유와 권속까지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마련합시다. 우리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섭리의 은총 가운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고 복종시키십시다. 그러나 우리들이 새해에 종국적으로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옷자락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그로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한 축복을 간구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적인 품성과 참으로 인간적인 품성을 우리의 인격 안에 받아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죄와 야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얍복의 캄캄한 어둠이 걷히고 브니엘의 아침햇살이 찬란히 비추어 올 것입니다. 이 새해 아침, 브니엘의 새아침을 맞아들이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할렐루야 공동체 가운데 넘쳐 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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