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외롭고 고독한 자 / 딤전 5:5-6

  • 잡초 잡초
  • 352
  • 0

첨부 1



      외롭고 고독한 자

본문: 딤전5:5-6, 시102:7
"참 과부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5,6)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102:7),

1979년 뉴욕에서는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의 카메라 사진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고독이라는 제호의 사진전 이었는데 작가는 부제를 붙여 "한 인간의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전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뉴욕의 뒷골목인 흑인들만이 살고있는 거리였습니다. 불이 꺼진 석유난로가 있고 새벽에 뿌옇게 창가를 찾아오는 냉기만이 있는 한 칸 방에 한 노인이 흰 벽을 향하여 담요를 뒤집어쓰고 앙상하게 누워있는데 머리맡에는 전화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가 바로 사진의 초점이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밀폐된 방안에 외부 세계와의 단 하나의 연결인 가느다란 이 전화선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어김없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밤새 별 일이 없으셨습니까?" 이 전화는 자녀들이나 친구들이 아닌 "장의사"의 문의 전화입니다. 전화의 응답이 없으면 이 노인이 간밤에 별새한 줄로 알고 앰브란스가 늦지 않게 찾아오도록 조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전화선 하나 외에는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이 노인 방에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이 노인 방에서 죽음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의 고독을 상징으로 한 사진전이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는 고독만이 남아 그의 인생을 더욱 처량하게 하며, 결국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로움(loneliness)은 '친구가 없고 홀로 있으며 의지할 것 없는 느낌의 상태'로 정의합니다. 외로움은 때때로 내적 공허함, 텅빈 느낌 같기도 하고 혹은 사무치는 쓸쓸한 느낌, 불명확한 만족에 대한 깊은 갈망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고독"이란 병에 걸려 슬퍼하며 신음하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성격상으로 내성적이면서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 중에 많고, 또한 뚜렷한 삶의 목적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지 못한 분들 중에 많습니다. "고독"이란 병을 치료하려면 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주기를 바라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대신에 나도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도와주는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해 조력하는 것이며 ② 보람 있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분투 노력해야 될 것이며 ③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죄와 불안과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고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독한 자를 보거나 만났을 때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첫째,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어 유리구두의 주인공인 듯 살던 전직 탤런트가 황금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독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환상의 유리구두를 벗어던져 버렸습니다. 젤러는 “고독이란 사실 하나님께 대한 본향의 향수”라고 말했습니다. 고독이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느끼는 허무의 감정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망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람들은 고독하고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① 음주(잠23:29-35) ② 음란한 행위(잠7:22- 23) ③ 방탕(눅15:12,13) ④ 자아도취(단4:30) ⑤ 자포자기(왕상 19:2-4) ⑥ 가학(삼상18:10,11) ⑦ 우상숭배(사44:15-17) ⑧ 쾌락(단5:1-9) ⑨ 탐식(잠23:21) ⑩ 자살(마27:3-5, 행1:16- 20) 등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해결방법입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둘째, 혼자 지내거나 불우한 이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롬13:9, 10)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 70 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 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 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하게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는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어느 날 책을 뒤적이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파리 한 마리 죽이는 데 야단법석 떨지 말고 지금 당신이 이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라."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살며 내 주위 사람들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서로가 기대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영양소결핍이 아니라 애정 결핍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외롭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다리를 놓는 대신 벽을 쌓고 있는지 제 자신부터 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셋째,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삼상18:1-4)
도시의 어느 조용한 거리를 키 작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을 오후였습니다. 낙엽들은 그에게 지나간 다른 여름들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제 이듬해 유월이 올 때까지..
그는 또다시 길고 고독한 밤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때 고아원 근처의 낙엽들 사이에서 종이쪽지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습니다. 노인은 몸을 숙여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어린아이의 글씨체로 쓰여진 그 글을 읽으면서 노인은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 단어들이 하나씩 그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이 필요해요. 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노인은 눈을 들어 고아원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마침내 노인은 창틀에 코를 누른 채 밖을 내다보고 있는 외로운 여자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마침내 자신에게 친구가 생겼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이 그 겨울을 웃으며 보내리라는 것을. 그들은 실제로 그 겨울을 웃으며 보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얘길 나누고, 서로를 위해 만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노인은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노인을 위해 크레용으로 초록색 나무와 햇빛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부인들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이 웃었습니다. 이윽고 여름이 오고 유월의 첫째 날이 되었을 때 어린 소녀는 노인에게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해 담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는 알았습니다. 그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소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크레용과 종이를 꺼내 써 내려갔습니다.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이 필요해요. 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상호간의 관심사를 가지고 먼저 다가가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12-15)
넷째, 무시하거나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슬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입니다. 한 늙은 노인이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오들오들 떨고 서있었습니다. 마침 교회에 다녀오던 그 집 가장이 방금 들은 설교말씀이 떠올라 그 노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따뜻하게 노인을 잘 대접하여 보낸 그는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다음날 또 이 노인을 만나게 된 그는 이번에도 노인을 극진히 대접해서 보냈습니다. 노인은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몇 번 더 노인은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밖에서 뛰어 들어오며 너무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것 봐, 전에 왔던 할아버지가 주셨어." "그게 뭐니?" "맛난 과자야." 아빠는 즐거운 마음보다 언짢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그 할아버지가 주는 것은 받지 마라. 그 할아버지는 얻어 먹는 할아버지야. 그게 얼마나 더러운 건지 아니?" 아들은 시무룩해 졌으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아빠는 골목길에서 과자를 아들에게 주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재빨리 뛰어가서 과자를 빼앗아 때묻은 노인의 손으로 돌려주며, "이래서는 안됩니다. 노인네. 자, 어서 받아가세요." 어리둥절하던 노인은 잠시 후 더듬더듬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 고마워서... 아니, 아이가 너무 이뻐서..." 그래도 아빠가 막무가내로 말리자 노인은 슬픈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얼굴전체가 어두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아이의 아빠는 노인이 너무나도 쓸쓸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과자를 얼른 아이에게 주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기뻐하며 깡충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 아빠는 몇 번이고 할아버지가 서있는 곳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다섯째, 구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광화문 지하도의 층계아래 매일같이 쭈구리고 앉아있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구걸하는 사람답지 않게 옷차림은 제법 깨끗하였습니다. 하나 구걸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앞으로 벌리고 있는 손바닥 위에는 백 원짜리 동전이 한 개 외롭게 놓여있었습니다. 부산히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손바닥 위의 동전은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어느 여학생은 홀깃 할머니를 쳐다본 다음에 시선을 돌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한 넥타이 차림의 젊은이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동전 하나를 꺼내어 할머니 손에 얹어 놓습니다. 동전은 이제 한 개가 아닙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수그립니다. 엄마의 손에 끌려 지나던 어린이가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엄마는 급히 어린이 손을 잡아당깁니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자리를 지킵니다. 언제 밥을 먹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끼니를 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구걸을 하면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할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앞을 지나갑니다. 떠들썩한 그 속에서 할머니는 홀로 앉아만 있습니다. 하루 얼마나 벌이가 될까? 그걸 또 할머니는 뭣에 쓸까? 혹은 어느 움막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어린 손자를 위해 라면을 사갈까? 할머니의 얼굴에는 외로운 모습이 스칩니다. 그런 할머니가 어제도 오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병이라도 났을까? 부산하게 오가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잊었습니다. 비정한 도시는 모든 감상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이나 고통, 외로움에도 무감각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워 질 수 있는 풍토가 이제는 아닙니다. 할머니가 앉았던 콘크리트바닥에 빗방울이 맺힙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번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니라"(잠28:27)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2)
여섯째, 따뜻한 마음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 한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의 목적은 남을 가장 잘 생각할 줄 아는 아이를 뽑는 일이었습니다. 심사위원이 뽑은 우승자는 일곱 살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옆집에는 최근에 아내를 잃은 나이 많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우는 것을 보고 어린 소년은 노인이 사는 집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의 무릎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의 엄마가 나중에 아이에게 이웃집 노인께 무슨 위로의 말을 했느냐고 묻자 어린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할아버지가 우는 걸 도와 드렸어요."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예배에 잘 참석하고 전도에 열심이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에 열심인 것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에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고아와 과부는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 고려하고 도와야 할 연약한 이웃의 대명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한 방식이 바로 고아와 과부 즉, 연약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필요를 채운다는 것은 꼭 물질적인 차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의 가장 큰 특징은 외로움입니다. 이런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별로 큰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함께 있어 드릴께요."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의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채우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사역하실 때 얼마나 많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병을 고쳐주시거나 먹을 것을 제공하심으로써 보다 더 근본적인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고아나 과부와 같이 자연적으로 외롭게 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리와 창기 같이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소외당함으로 외롭게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콜로라도 주 덴버 시는 겨울이 되면 북극을 능가하는 시속 60km의 강풍이 불어대는 곳입니다. 그런 어느 겨울날 아침 한 24시간 편의점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추위를 피해 들어온 어떤 노신사와 계산대 뒤에 있는 여자 직원이었습니다. 사실 얼음이 뒤덮이고 강풍이 부는 거리를 다니는 것이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 이른 아침에 노인이 사러 온 것은 싸구려 옥수수 빵 하나와 바나나 하나였습니다. 노인은 오래된 동전 지갑을 꺼내어 동전 몇 개와 다 구겨진 지폐 한 장을 계산대 위로 떨어 뜨렸습니다. 계산이 끝나고 빵과 바나나가 비닐 봉지에 담기고 났을 때 이상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노인이 아무 말 없이 지친 손을 천천히 계산대 너머로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 직원이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벌려 노인의 손목에 걸어준 후에 크게 미소지으면서 계산대 너머로 몸을 숙여 노인의 두 손을 맞잡아서는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노인의 손을 자기 얼굴에 대고 따뜻하게 덥혀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슨씨, 건강 조심하셔야 해요. 난 내일도 당신이 여기에 꼭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란다구요." 노인은 바나나 한 개와 옥수수 빵 하나를 사기 위해 그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따뜻해지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속까지.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시10:14)
영적인 고독과 외로움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겨야 합니다.(신29:18)
세계적인 전도자를 꼽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미국의 무디를 꼽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밖에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교회학교 생활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찾는데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가려할 때 거절당했습니다. 학교생활을 계속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왕따 당했습니다. “너처럼 희망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너와 친구 되는 것이 부끄럽다.”그래서 그는 늘 고독했습니다.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디가 어리석은 존재로 비쳐졌지만 하나님 눈에는 희망의 재료로 보였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스펄전은 고등학교만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독서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더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2. 주님께서 나의 외로움 속에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악한 길에서 벗어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왕하 17:13)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3. 하나님을 의지하며 교제해야 하고(시10:14), 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시44:18)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고독'을 느낍니다. 고독은 자기 연민, 자기 중심주의, 몽상, 움츠림, 냉소, 두려움과 같은 좋지 않은 것들을 동반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독'이라는 심한 열병을 앓고 계시다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독이라는 병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파악하고, 인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깊은 내적 상처를 내보임으로써 하나님께서 완화시켜 주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4.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시68:6)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욥 16:19-21)
5. 불의를 버려야 하고(딤후2:19), 죄에서 떠나야 하며(사59:20), 사특한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시101:4)
6.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고(겔14:6), 주의 계명과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시119:10, 시119:21)
7.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딤전5:5),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약5:19)
프랑스의 공학자였던 훼르디난드 마리 드레셉이 지중해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여행 중이던 동료 한 사람이 갑자기 전염병을 앓게 되어 그들이 탄 배가 격리 조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레셉은 그 격리 상태로 인해 심한 좌절감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운하 건설 가능성에 대해 연구한 찰스 레페레의 "회고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에즈 운하 건설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37년 만에 그 유명한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탄생되기 위해서는 "인생의 고독기" 즉,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동안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 80년 동안 준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시기 위해 30년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고독기" 즉, "준비 기간"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독기"를 지혜롭게 보내십시오 그 뒤를 "새로운 세계"가 바짝 따라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주인 사라에게 쫓김을 당해 광야에서 방황하는 하갈에게 안식을 주시고(창21:16, 레26:12), 에서의 낯을 피해 고향을 떠나 홀로 하란으로 가던 야곱에게 함께 하시고(창28:11), 우상숭배자와 싸우고 홀로 도피한 엘리야를 위로하시고(왕상19:13,14), 홀로 진리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다 투옥된 예레미야에게 용기를 주시고(렘15:17, 렘38:6), 환란과 핍박 중에 전도하는 제자들에게 끝까지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교제하십니다.(마18:20, 요14:16- 18)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용기와 교제와 안식을 주심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