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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 / 룻 4:7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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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룻4 : 7 - 17절 2004.1.18(일) 2.3부
제 목 :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

마1장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도저히 예수 가문에 들어 올 수 없는 여인 2명이 나오는데 라합과 룻입니다.
세 여인은 다 이방 여인으로서 도저히 예수 가문에 들어 올 수 없는 여인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가문에 들어와 믿음의 가계를 이어갑니다.
오늘 모압 여인 룻이 예수 가문에 들어온 배경을 살펴보면
모압 여인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들의 만남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사에 주도면밀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음으로 우리도 모압 여인 룻과 같이
나로 말미암아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룻은 어떤 여인입니까?

유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흉년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거기서 아비멜렉은 죽었고 두 아들은 모압에서 아내를 취하여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도 거기서 죽고
시어미 나오미와 자부인 모압여인 오르바와 룻만이 남았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자부 중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났으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는 룻이 우연히 이른 밭이
바로 시아버지인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가 곡식 베는 자에게 룻이 누구인가 물었을 때
곡식 베는 자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소녀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 오라고 하면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행한 일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하면서
보아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빌며 여러 가지로 룻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집의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임을 말하며 보아스와 룻이 맺어지기를 바라며 룻을 단장 시켜 보아스에게 보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위하여 기업을 무를 자가 되는 절차를 밟았고.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는 우선 순위를 가진 자를 만나
성읍 장로 십인 앞에서 소유지를 살 것인가를 묻자
그는 그럴 의사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게 되었고.
장로들은 이 일에 증인이 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오벳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 유대인과 결혼하고
또 남편이 죽은 후 시모인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에 왔고
가난하기 때문에 이삭줍기에 나서서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룻의 행동은 어떤 의도도 갖지 않은 것으로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섭리를 갖고 그 일을 이루고 계신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룻은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므로
시어머니 기생 라합과 함께 구원받은 인물일 뿐만이 아니라
그 생애에 저주가 끊겨지고
하나님의 장자적인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이 같은 축복이 내게도 임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기업 무를 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풍속 중에는 한 가문에 가장이 죽으면 그 기업을
민수기 27:8-11을 보면
1) 딸 2) 아비의 형제 3)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상속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이 기업을 무를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에게 아들이 둘 있었지마는 모압 땅에서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야 하는데 기업 무르야 할 사람이 기업을 물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친척 보아스에게 너가 기업을 물겠느냐? 고 하며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줍니다.
고대 이스라엘 풍습에서
무엇을 물려받거나 교환하는 일을 증명을 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신을 벗어 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 무를 사람이 보아스에게 신을 벗어 줌으로
그 기업이 보아스에게 물려진 것입니다.
왜 기업 무를 자가 무르지 않겠다고 합니까?
6절에
[ 나는 나의 유업이 손해를 입을까 하여 나를 위해 값을 치르지 못하겠노라. 내 권리를 네게 주노니, 네가 값을 치러라.
나는 그것에 값을 치르지 못하겠노라 ] 합니다.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물려 받아봐야 덕 될 것 아무 것도 없겠다 싶어서 포기한 것입니다. 두 과부 떠맡기가 귀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을 들고 찬 것입니다.
만약 기업 무를 자가 롯을 얻을 수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의 족보가 바뀌어 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을 들고 차는 사람 종 종 나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삼상24:에 마온 땅에 나발이라는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다윗이 부하들을 보내어 양식을 좀 달라고 할 때
이새의 아들 다윗이 누구관대 내가 물과 양식을 주겠는가? 하고 거절합니다.
만약 그 때 나발이 물과 양식을 주었더라면
다윗이 임금이 될 때 재무부 장관 자리 하나쯤은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인이라
다윗에게 양식을 갖다 주고 나중에 다윗의 여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찬아온 복을 들고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찾아온 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친족이 행하길 꺼려한 것을 보아스는 하였습니다.
보아스가 취한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9-10절에 보면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포기한 엘리멜렉의 소유와 그리고 룻을
값을 치루고 산 일에 대하여 장로들과 백성들이 증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먼저 여기서 샀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신약만 해도 이 단어가 열 네 번 나오는데 구속이라는 말입니다.
값을 치루고 샀다는 말입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소유물들을 "샀"을 때, 그는 룻도 같이 "샀습니다" 룻은 이방인(Gentiles)의 모형이자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인 보아스에 의해 구속을 받습니다.

고전6:20에 바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가리켜 <값으로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너희의 몸이 너희의 것이 아니기에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을 때 그것은 돈을 주고 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을 대가로 내주셨던 것입니다!
행20:28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
즉 우리는 예수의 피로 산 교회라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D.L.무디(Moody)는 보아스는
[ 유업의 구속자, 안식을 주시는 사람, 부한 친족, 필요를 공급하시는분, 그리고 신랑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 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가까운 친척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원했기 때문에
이름이나 유업에 손해가 갈 것 같으니 거절하였습니다.
보아스도 엘리멜렉에 속한 것을 다 다시 "살" 경우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일로 수반되는 조롱이나 손해가 무엇이든 기꺼이 받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룻기서에서
보아스의 행동에서 주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석가 윌리암 에반즈는(William Evans)
기업 무를 자와 보아스와의 차이를 꼭 말한다면,
[ 보아스는 룻을 "사랑"했으며,
룻과 그녀의 가족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자신이 성읍에서 더 부강하게 되는 일에는 개의치 않았다 ]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요한 웨슬레(Tohn. Wesley.)는 이 사랑에 관해
"자비(Mercy)로 인해 비참함(misery)이 제거되었고 풍복함이 주어졌으며 사랑으로 인해 구원이 베풀어졌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가치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의 소유가 되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비참함이 풍족함으로 바꿔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백성들과 장로들이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인 것에 증인이 되어
룻에 대해 축복을 합니다.

무엇이라고 축복합니까? 그들은 룻을 위해 축복합니다.
1) 11절 [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
즉 [ 하나님께서 그녀를 현모양처가 되게 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도저히 유다 가문을 이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5>
그러나 보아스를 만남으로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내가 예수 믿고
그 가문을 예수 가문의 장자로 세운 여인들 많이 있습니다.
이런 축복이 먼저 우리 여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라헬과 레아는 "이스라엘의 집을 세웠습니다."
그들의 모든 자녀들이 교회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로 말미암아
믿음의 자손들을 많이 배출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에브랏에서 유럭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보아스에게 빈 축복입니다.
여기에 유력하다는 말은 <뼈대있는 양반>이라는 말입니다.
즉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신앙의 장자를 말합니다.
그러니 장자적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잘 물려주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자가 되라고 축복합니다.
이것은 공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위대한 명성을 말합니다.
그 시대에 쓸모 있고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룻을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룻3:11절에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가리켜
[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 고 합니다. 현숙한 여인이라면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지요
잠31:10절 이하에 보면 현숙한 여인이 나옵니다.
[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 하면서 23절에 보면
[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바로 현숙한 여인은 남편을 유력하고 유명한 자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학자들이 바로 이 현숙한 여인에 대해
바로 룻기서에 나오는 룻을 모델로 들고 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현숙한 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세우는 현숙한 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3) 12절 [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아준 베레스의집과 같게 하시리를 원하노라 ]
[ 네 집으로 베레스의 집 같게 되기를 원하노라 ]
즉 [ 네 집안의 사람이 많은 수가 되고 베레스의 집안같이
크게 번성하기를 원하노라 ] 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베레스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요,
이제 룻을 통해 보아스의 집안이
베레스의 집안 전체처럼 그렇게 무수히 번성하기를 빈 것입니다.
이런 축복들이 바로 룻으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룻은 보아스를 만나 복 받은 여인이 되었고
바로 행복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믿고
나로 말미암아 집안이 복 받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로 말미암아 살 맛 나는 집안을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인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본문 말씀에 보니 나오미가 더 기뻐합니다.

나오미가 룻이 낳은 아들을 앉고는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기록한 것은 단순히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장면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많은 그리고 깊은 신앙적 교훈을 앉고 있습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행복한 장면으로 시작되지 않고,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기근과 죽음의 장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유다 땅에 심한 흉년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서
다른 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길을 찾아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이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대표적입니다.
룻기는 분명히 기근과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기근과 죽음을 넘어서는 풍요와 생명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룻기 1장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통을 의미하는 '마라'. 즉 '괴로움' 이라는 단어이고,
룻기를 마감하는 4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찬송'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쓰디쓴 고통을 당해야 했던 가정이
룻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사를 의미하는 찬송의 삶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룻기의 전체 메시지는
['고통에서 찬송으로 바뀐 삶 ]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나로 말미암아 고통이 찬송으로 바뀌듯이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로 말미암아
가정의 저주가 끊겨지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에게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 말하기를 오벳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붙여 줄 때는 뭔가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오벳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오벳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오벳이 태어나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오벳의 탄생은 오벳 한사람이 태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벳의 탄생으로 룻기 이야기가 바뀌어집니다.
죽음의 이야기가 생명의 이야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벳의 탄생으로 세상이 바뀝니다.
죽음의 세상이 생명의 세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벳이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벳이 태어나는 장면을 잘 살펴보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 아이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13절에
[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
보아스와 룻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잘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셨다. 합니다.
이 말은 오벳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이 아이는 대를 잇는 아이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니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베들레헴 여인들은 아이를 축복한 다음에,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여인들이 그 아이의 이름을 왜 오벳이라고 짓습니까?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17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오벳은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지 나오미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짓습니다.
이것은 오벳은 <8>
보아스와 룻 사이에 난 아들이지만 또한 나오미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오벳은 종,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 집안을 다 섬기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도 섬겨야 하고 세상도 섬겨야 할 아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믿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꼭 맺어야 할 열매가 있다면 바로 오벳입니다.
잘 들어세요 또 목사님이 세상에서 오배오라고 하더라 하지 말고요.
섬김,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인 것입니다.

오벳의 탄생으로
보아스의 가문은 평범한 가문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을 낳은 왕의 가문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벳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교훈을 주는 인물입니다..
오벳은 이 세상에도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구속사에도 희망을 주는 아들인 것입니다.

< 라면 집사 별명 가진 김 장로님 간증 >

오늘 룻기서 4장 마지막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오벳이 아니라 룻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낳음으로 세상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벳은 룻의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의 열매를 통해 섬기려고 할 때
우리 가문에 다윗 왕과 같은 인물이 태어날 줄 믿습니다.

<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
어떻게 해서 룻이 그런 복의 샘터가 될 수 있었습니까?
희생이다, 성실이다, 신앙이다, 지혜다, 순종이다, 긍정적인 자세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연이다 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단어로 말하고 싶습니다. 결단입니다.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결단하였습니다.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그 하나님 그분을 의뢰하고 순종하면서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 결단을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끝까지 지켜 나갔습니다. <9>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도에 따르기로 결단하고
보아스를 선택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을 결단하고 예수님을 결단하세요
그러면 우리도 룻과 같이 행복한 사람이 되고
나로 말미암아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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