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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리아는 왜 향유를 쏟아 부었을까? /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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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왜 향유를 쏟아 부었을까?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어느 날 베다니 마을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베 다니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이 베다니 마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잘 통하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퍽이나 마음에 들으셨는지 나의 친구라고까지 부르실 정도였습니다.(요11:11) 예수님도 우리처럼 인정미를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 한 사람쯤은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로 삼으셨으니 나사로라는 사람은 정말 괜찮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의 두 누이동생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큰 여동생 마르다는 인정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여성입니다. 2절을 보세요. “마르다는 일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식사 대접하느라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작은 여동생 마리아는 이지적이고 진지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거나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을 경청하는 것에 관심과 재미를 느끼는 성격이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아마도 동생들의 두 가지 장점을 다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정적으로도 풍부하고, 이지적으로도 섬세한 성격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주 편하게 대하실 수 있는 친구로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집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을 하면 꼭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동생 마리아가 특별한 순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약600그램)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립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자기의 그 긴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그 향유로써 씻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나사로의 집을 진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봉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중 가룟유다가 비판을 하고 나섰습니다. 명분은 이러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허비한단 말입니까? 시장에 내다 팔면 300데나리온(노동자 1년치 임금에 해당함) 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상당수 도울 수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본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 향유를 매각하여 현금으로 들어오면 회계로서 그 돈을 유용(도적)할 욕심에서 그렇게 그럴듯한 논리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동시에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비난에 대하여 뜻밖의 말씀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저 여인을 가만 두어라. 저 봉사는 나의 십자가 죽음과 장사를 위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곧 너희를 떠나 하늘나라로 돌아 갈것이니라. 7,8절‘

여하튼 마리아의 ‘향유 쏟아 붓는 헌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게 해드렸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왜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쏟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오라비(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보고 이 비싼 향유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1절 ‘이 곳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곳이다’ 이것은 본문을 이끌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31억 보험금을 탄다한 들 그 돈 대신 엄마가 죽어 버렸으니 그 자녀들에게 그 돈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얼굴의 사나이 그 남편은 돈을 손에 쥐는 대신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 마리아는 남매간에 정이 남달랐습니다. 평소 병약하던 오라버니가 결국 죽었을 때 너무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오라비가 불쌍해서 며칠동안 목놓아 울었습니다. 정말 오빠가 불쌍하였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병들어 죽어야 했으니 그것이 서럽고 마음 아팠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이 같은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정 많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의외로 빨리 병들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라버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와 보이던지 예수님 마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까지 찾아가셔서 나사로를 불러내사 다시 살려 내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기쁘고 또 기뻤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오빠가 죽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습니다. 아버지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오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빠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빠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을 또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요, 사치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빠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만큼 좋을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 자기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에 사용하려고 준비해 놓았던 향유를 오늘 꺼내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에게는 저 마리아 만한 감격거리가 과연 없을까요? 그래서 마리아만큼 결정적인 예물을 예수님께 바쳐드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볼까요? 나사로 못지 않게 우리들도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 난자들입니다. 엡2: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살리셨음)하였음이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요일4:9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즉 우리는 죽을 몸이요, 죽은 몸이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니라고요?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결코 없다고요? 이렇게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느냐고요? 그 동안 우리는 영혼의 우위성과 절대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영혼이 우리 몸의 주인이요, 그리고 영혼이 없으면 그는 죽은 몸이라고 배웠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사위를 하고, 승인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범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입니다. 사형선고는 이미 내려져 있으며 단지 사형 집행이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잠시(정말 잠시 입니다.-약4:13-14, 사2:22, 벧전5:24, 눅12:20)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사소통)가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이 선고되어 졌습니다. 이 육체도 언제, 어느 순간 죽을는지 모르는 죽음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삼중 적인 죽음의 굴레가 우리를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능력으로는 인간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과연 우리 인생은 불쌍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인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절망해 본 사람이 ‘살아 있음’에 대하여 감격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을 놓고 처절하게 절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리아는 이 감격을 그냥 감정만으로, 입술만으로, 추억만으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삶으로 바꾸어 놓으신 예수님에게 자신의 감격과 존경심을 뚜렸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 ‘나드향유 옥합(병)’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드향유 옥합’을 간수하고 있을 정도의 여성이라면 평범한 여성이 아닙니다. 인도의 히말라야산맥 깊은 계곡에서 자생하는 나드나무에서 채취하여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를 거쳐서 예루살렘 시장에까지 상품이 되어 전시되려면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사치품입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최고의 의미 있는 사랑을 꿈꾸는 경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이 나드 향유를 구입하였습니다. 일생 최대의 결단이지요. 그러니 이 나드향유 옥합을 장만해 두는 여성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위하여 힘들게, 정말 큰 마음먹고 히말라야산 나드 향유 한 병을 장만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 향유 옥합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향유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오빠를 살려주신 분, 죽은 지 4일이나 되어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진동하는 오라비의 시체를 향하여 죽음을 야단치시면서 오빠를 불러일으키시던 예수님! 마리아는 이 분 예수님이야말로 ‘내 인생의 전부요,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이요, 내게 진정 고마우신 분이요, 내게 살아갈 소망과 능력을 주신 분’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나드향유 옥합을 꺼내와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갈하게 잘 관리해왔던 긴 머리털을 풀어서 그 머리털로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장 좋고, 가장 귀하고, 가장 위대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나드향유 옥합을 깨뜨려 남김없이 쏟아 부어 드리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 누구에게도 주지 말고 예수님에게 드리십시오. 내 인생의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 절망과 한숨, 저주와 죽음을 제거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십자가의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할렐루야) 이 예수님 위해서라면 무엇이 아까울 것입니까?(고전1:18, 2:1-2, 고후5:15, 12:15, 갈2:20, 6:14, 빌1:20, 3:8)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는 빌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전 재산 600억 달러 중 250억 달러를 이미 기부하였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내 Melynda French Gates의 설득으로 재산의 반 이상을 가난한 사람과 인류의 질병 퇴치를 위하여 기부하고 있습니다. 멜린다는 지난 1993년 아프리카 여행에서 신발을 신은 여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던 경험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열 일곱 살 때 황해도 해주에서 6.25전쟁을 피하여 월남한 김 화영소년 당시 서울농대를 다니던 오빠를 찾았으나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오빠를 그리워하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던 중 72세가 되었습니다. 혼자 몸인 할머니는 자신이 언제 눈을 감게 될는지 모르므로 전 재산을 오빠의 모교 서울대에 기증하면서 이렇게 말씀했답니다.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나의 전 재산을 기증하니 오빠의 후배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혼자 살아온 50년의 한이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특별한 동기(자기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충격, 감동이나 슬픔)를 체험하고 나면 자신의 소유를 값지게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마리아 역시 오빠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 그 오빠를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무덤에서 살려내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서 결정적인 충격을 받게 되고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가격의 나드향유 옥합을 아낌없이 꺼내어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에게 우리가 장만해 놓은 향유 옥합을 꺼내어 쏟아 부어 드립시다. 예수님에게 부어 드리는 것은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히말라야 산 나드 고급향유를 받으실 자격이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드리면서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감격과 보은의 마음으로 쏟아 부어 드리는 향유옥합은 가장 가치 있고 보람있게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퍼져 나가는 향기야말로 정녕 아름답고 고상한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주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어드리는 향유 옥합들이 갈수록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고 그윽한 히말라야산 나드 향유 향기가 우리 세 예배당에, 해외선교에, 주일학교에..... 곳곳에서 진동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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