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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신 기쁨 / 시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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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이 주신 기쁨
< 본 문 > 시8:1~8

여러분, 혹시 이런 성화 보신 적이 있습니까? 활짝 웃는 예수님의 얼굴! 아마 보신 분도 있겠지만 보지 못하신 분이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많은 성화들이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 혹은 엄숙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중요한 모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당연히 엄숙한 모습의 성화를 그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다양한 예수님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기쁨으로 가득한 모습, 활짝 웃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죄악 때문에 슬퍼하고 얼굴을 찡그릴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미지는 환하고 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신앙생활은 곧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뻐하며 사는 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지방 도시에 출장을 갔답니다. 마침 주일날이 되어서 교회에 가야 되는데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일단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리고 운전기사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교회로 데려다 주십시오!” 자동차가 달리는데 큰 교회들이 이곳저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다 지나치더니 자그마한 교회 앞에 서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니, 왜 큰 교회들은 다 지나치고 이렇게 작은 교회 앞에 세우는 거요?” 그때 운전기사분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나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주일날 다니다 보니까 이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의 얼굴 표정이 제일 밝습디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 아닙니까? 제일 좋은 교인은 기쁨이 충만한 성도입니다. 제일 좋은 교회는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신지 ... ? 각자 한번 진단해 보십시오. 나는 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혹시 근심, 걱정, 슬픔으로 침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핑계 댈 수 있습니다. “나는 형편이 다르잖아. 골치 아픈 문제도 많고, 환경 조건도 안 좋고 말이야 ... 아무개만 같으면 매일 웃고 다니겠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형편이 좋아서, 문제가 없어서, 환경 조건이 좋아서 기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형편이 안 좋아도, 문제가 많아도, 환경 조건이 나빠도 기뻐하는 게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누이 말씀합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겁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축복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이 체험한 기쁨 : 하나님이 주신 기쁨

시편 4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과거에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노년에도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울 왕의 핍박으로 오랜 세월 유랑 생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에도 고난이 끊이질 않습니다. 특히 본문의 배경이 되는 바, 자기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에서 쫓겨나갔습니다. 믿었던 신하들도 많이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짐작이 됩니다. 만일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심정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살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고 말 정도입니다. 마음이 괴롭고 아파서 갈피를 못 잡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담대합니다. 그리고 기쁨을 가득합니다.

물론 그도 처음 일을 당했을 때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7절~8절 보면 그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가당한 일인가! 전혀 가당치 않죠. 왕궁에서 쫓겨나와 피난살이하고 있습니다. 지인들이 제공해 주는 식량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기쁘답니다. 그리고 평안하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의 표현을 음미해 보십시오. 추수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농부가 추수할 때 어떤 표정인지 보신 적 있습니까? 너무 기뻐서 얼굴이 상기됩니다.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당시 고대 사회로서는 최상의 기쁨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기쁘다고 말합니다. 두 다리 쭉 뻗고 잘 잔다고 말합니다. 왕궁에서 비단 이부자리에서 잔다면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쭈그리고 자는데 새우잠을 잔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은데 숙면한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이게 신앙의 힘입니다. 분명히 주변 환경 조건을 보면 괴로워해야 되고, 슬퍼해야 되고, 근심해야 되는데 괜찮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이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기쁨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 이전에는 에덴동산에 있었죠. 여러분, ‘에덴’의 뜻이 뭡니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하나님과의 교제) 인간의 영혼 깊은 데 부어주시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이후 그 기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불안하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자기를 숨기려고 애를 씁니다. 창세기 3장 보면 타락한 아담과 여자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3:15에 여자의 후손 예수님이 오셔서 뱀(사단)을 넘어뜨리고 인간을 죄와 사명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가죽옷으로 입혀 줍니다.(창3:21)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애매하게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대속의 원리가 나온 겁니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런 원리에 입각해서 구약의 제사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때 비로소 기쁨과 평안이 회복되는 겁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구원받은 영혼만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환경 조건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그때뿐입니다. 조금 지나면 사라집니다. 우리가 다 경험해 봤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세상의 기쁨을 얻으려도 더 많은 것을 목표로 발버둥치는 겁니다. 잡고 나서 잠시 기뻐하다 보면 어느새 그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이비 기쁨’이요 ‘모조품 기쁨’입니다.

비유컨대 웅덩이와 옹달샘의 차이와 같습니다. 얼른 보면 모양이 비슷합니다. 움푹 패어 들어가 있고 물이 들어 있는 모습이죠. 그런데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옹달샘은 속에서 생수가 계속 솟아 올라옵니다. 그러나 웅덩이는 물이 고여 있다가 증발하든가 아니면 썩어버립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떤 것 하시렵니까? 누구든지 옹달샘을 택할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꼭 웅덩이처럼 살아갑니다. 예수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늘 마음속에 모신 사람만이 옹달샘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4:13~14 “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는 기쁨이 바로 이런 겁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환란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늘 밝은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런던의 템즈 강변에 법원 건물이 있는데 그 뜰 안에 포도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유난히 싱싱하고 탐스런 포도가 열린다고 합니다. 품종이 달라서 그런지 조사해 보니까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뿌리가 깊은 곳에 박혀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강물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시1:3에서 말씀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면 환경이 악화돼도 괜찮습니다. 형편이 나빠져도 괜찮습니다. 세상 살면서 어떻게 편하고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고통, 환란, 역경, 풍파, ...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를 향해 공격해 옵니다. 그래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힘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조건들 추구하더라도 결코 그런 것에 목매지는 말자 이겁니다.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자 이겁니다. 그러면 세상 조건들은 있든 없든 어떤 경우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곧 바울의 자족의 비결 아닙니까?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 마디로 ‘전천후 기쁨’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주님 주시는 이 기쁨을 소유하고 늘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 항상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비결 : 하나님께 더 가까이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체험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항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수돗물이 뚝 끊이듯 기쁨이 멈추는 때가 생깁니다. 대개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 그렇죠. 혹은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휘청거립니다. 답답해집니다. 세상 살다 보며 누구나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다만 희미해지는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러면 기쁨이 다시 충만해집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① 기도함으로 : 다윗은 위기 가운데 마음을 추스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 ... )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6절. “ ( ... )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그럴 때 그의 심령 속에서 기쁨이 솟아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② 약속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 다윗도 목석이 아니기에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잘 되새겨 보면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 여기서 경건한 자는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사 왕으로 세웠는데, 그리고 언약하셨는데 어찌 그대로 무너질 수 있겠나 하는 겁니다.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런 확신 가운데 기쁨이 충만해진 겁니다.

③ 과거의 체험을 회상함으로 : 다윗은 현실을 보면 불안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1절에 “ ...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 ” 그랬는데, ‘곤란’은 본래 의미는 좁고 협착한 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그럽게 하셨다’는 것은 넓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과거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핍박에서 벗어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 고난이 닥쳐와서 내 마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이 가물가물하게 보일 때 ... 그럴수록 하나님께 다가 가 보십시오. 기도함으로, 말씀을 기억함으로, 과거의 체험을 회상함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그리고 내 영혼 깊은 데서 말라가던 기쁨의 샘물이 다시 용솟음치게 될 것입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생각지도 못한 평안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일이죠.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거기에 기쁨과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이 유럽 곳곳에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설치해 두고 학살을 했습니다. 한 수용소의 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시입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믿노라 태양이 비치지 않아도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노라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라도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여전히 침묵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이야기입니다. 임종 직전에 그가 갑자기 팔을 높이 들고 이렇게 기쁨으로 외쳤다고 합니다. “모든 것 중에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그러므로 이런 비결을 잘 활용하셔서 혹시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기쁨을 잃지 않고 늘 기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사명 : 기쁨의 증인

우리는 예수 믿고 나 혼자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면서 기쁨을 누리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기본이지만 이 기쁨이 흐르고 넘쳐서 우리 이웃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기쁨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근심과 걱정, 고통과 슬픔으로 짓눌린 영혼들에게 기쁨의 샘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나눠도 마르지 않습니다. 신기한 샘입니다. 오히려 더 풍성한 기쁨이 우리에게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 스스로 움츠러들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나보다 더 행복할 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겉으로 번듯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모조품 기쁨이 있을지언정 참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기쁨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백작이었습니다. 형식적이지만 모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족이 없습니다. 중년이 지나면서 불행과 절망감이 더 깊어집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까 귀족들이 대충 그랬습니다. 아쉬운 게 없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그는 번민합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무관심했던 농노들 중에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초라한 인생들인 줄 알았는데 ... 그 비결이 무엇인가 알아보니까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움 중에서도 신앙이 있기에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귀족들이 불행해하는 것은 이 농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한 까닭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비밀을 깨닫고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세상적으로 잘 난 사람을 통해 변화 받은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기쁨을 상실한 인간 세상에 기쁨을 전해주는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사명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자산은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이고 얕은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 말입니다. 부디 오늘 시편 4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기쁨과 동일한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에서도 항상 행복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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