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요 8:1-11

  • 잡초 잡초
  • 329
  • 0

첨부 1



제목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일시 : 2004년1월 25일 설교 말씀
본문 : 요한복음 8장1-11절
--------------------------------------------------------------------------------

어느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립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닌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고소 할 기회를 노리던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현장에서 잡힌 윤락여성을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 때는 어려운 문제는 당시 랍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성경을 가장 많이 아는 지식인 이었습니다. 오늘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랍비로 대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의 법에는 우상숭배, 살인, 음행 이 세 가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레위기 20:10, 신명기21:24). 그들은 지금 꼭 개선장군 같습니다. 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을 하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칭 의인입니다. 가장 경건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랑스러운 족보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욕을 하셨으니 좋을 리 없습니다. 늘 저런 독설가는 이스라엘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을 책잡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더 지속 된다면 일이 이상한 길로 갈 것을 그들은 짐작했습니다.

그러자 마침 음행하다가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성경에 이른 말씀대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여인을 죽이려고 하다가 마침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생각이 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모세의 법에는 이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평소에 사랑을 많이 강조 하셨는데 이 여인을 죽여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의 말씀대로 살려주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죽이라 하면 당신은 늘 사랑, 사랑, 하면서 이런 여인을 죽이라 하다니라고 책잡을 것입니다. 죽이지 말라 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긴 범법자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지도자는 잘 압니다. 이런 말을 진퇴양란이라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너무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땅에다 무 글을 쓰시다가. 둘러보시고 여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사람에게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저도 오늘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오늘의 바리세인은 누굽니까


바리세인은 당 시대에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가장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권위가 대단합니다. 성경 전문가입니다. 그들은 늘 성경과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늘 기도합니다. 십일조도 잘 합니다. 구제도 잘 합니다.누구보다 잘 난 사람입니다. 그들은 정말 랍비 중에 랍비입니다. 선생 중에 선생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에 너무 가증했습니다. 도무지 지도자로서 품위가 말이 아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리세인들의 자세에서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칭 의인입니다. 자칭 거룩한 지도자입니다. 그들은 무서운 감독관인 것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봅니다.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비판은 잘 합니다. 남을 정죄는 잘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개선보다 정죄하기에 바쁜 사람입니다. 오늘도 권위를 비판과 형벌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참된 권위는 동정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권위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이런 죄를 지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법에도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범죄는 반드시 범죄 할 의사가 있든지 고의성이 있어야 합니다. 법에도 눈물과 동정이 있습니다. 법에도 늘 사람으로 더 잘 살려면 용서가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세인은 정죄는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남이 당한 사정을 모르면 안 됩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이 사람이 개선해서 잘 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형무소라 했습니다. 지금은 교도소라 합니다. 우리나라도 교도소 사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거기서 자기를 반성하고 앞으로 더 잘 살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도 전도가 필요합니다. 가장 거룩하다는 사람입니다. 가장 우수하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랑이 우선입니다. 사람은 실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외교관이 사석에서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비난했다 해서 좀 어수선 합니다.

그런데 비판이 전혀 나쁜 것만 아닙니다. 건설적인 비판은 유익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늘 우리는 비판은 사랑이 담긴 비판을 해야 합니다.벌을 위주로 하는 권위는 잘 못된 것입니다. 권위의 책임은 죄인을 사회에서 격리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이 사회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인을 선한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고쳐 건강한 사회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인을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죄해서 이 사회에서 쫓아내려는 그런 심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골탕 먹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괴롭히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엉뚱한 모략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여인이 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에는 그는 이름도, 인격도, 심정도, 생각도 없는, 예수님을 해치는 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열한 사람입니까? 그들은 걸어 다니는 표본이었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가 확정되기 전 가지는 그는 아직 죄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바리세인들이 왜 이 모양입니까? 이렇게 비열하고 비인격적입니까? 그 사람이 과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그 사람이 과연 지도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도 죽이고 이 여인도 죽이자는 양면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이 여인은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미끼로 예수라는 거추장스러운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일거양득의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누가 감히 비판 할 사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II.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사람을 돌로 치라


예수님은 정말 난감한 입장입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거룩하다는 바리세인과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을 놓아 줄까요. 그러니 죽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킹제임스 번역에는 못 들은 체 하시고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의도를 잘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것입니다. 허물이 없는 자가 남의 허물을 말 할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자기는 지키지 않은 도덕적 표준을 남에게 요구하며 자기에게 얼마든지 있는 허물을 비난함이 인심입니다. 부모들 중에도 자기들이 흔히 범하는 과오에 대해 자녀들을 책하는 일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자기는 흔히 범하면서도 남을 무작위로  비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심판의 자격을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의사의 책임은 환자를 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고통이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는 의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세인은 그렇지 않습니다.환자인 여인의 사정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여인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괴로워 해 본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여인의 잘 못을 두둔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잘못을 마음아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가볍게 보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려는 깊은 사랑이 담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좀 아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좀 너그러운 아량이 필요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고 안아주는 것이 필요 합니다. 이런 답답한 시대에 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더 안아주는 그런 생동감이 있는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보다 더 깨끗합니까? 우리가 더 거룩합니까? 우리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보아도 성한 곳이 없습니다. 성경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라 했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아 아닙니까? 내가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이 박충웅 목사가 여러분들이 돌을 맞아야 할 대상이 아닙니까? 다 그렇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다 어리석은 여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저 동구 밖에 서서 무리의 돌을 맞아야 합니다.



맺는 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선 바리세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지금 당장 이 여인을 미끼로 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올무로 그 사람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려는 일거양득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사랑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성경을 연구 했습니다. 기도는 물론 많이 했습니다. 구제도 남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성을 잃었습니다. 오로지 미운 사람을 정죄하는데 온 정력을 다 쏟았습니다. 미운 한 사람 예수님을 잡아 처형하자는 데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이 여인을 미끼로 하여 두 마리의 토끼를 잡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살리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일방통행적인 그들이 악한 행동을 통해 얻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늘 남의 실수에 너그러운 자세가 필요 합니다,자기에게는 인색하고 남에게는 늘 너그러운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늘 믿음으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