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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1) - 아버지가 없는 교회 - / 마 2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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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1) - 아버지가 없는 교회 -
복음의 말씀 : 마태복음 23:8-12

여러분,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저도 지난 화요일 오후7시 경에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 5시 경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는데, 고속도로에 눈이 펑펑 쏟아져 10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즐거운 귀향길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인상 깊었던 일은 없으셨는지요? 저는, 이번 설 명절을 보내면서 "우리 집안 밥상풍속도"가 어떤가에 말없는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저희 집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예수 믿기 시작한 흔히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지만, 제가 자라면서 받았던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왠지 모르게 전통적인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고향에서 뒷동산 뛰어다니며 성장했는데, 그 때 당시 저희 집은 대가족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장남이셨기에 대학재학 중에 일찍 결혼하셨고, 결혼하신 작은아버지와 그 외의 삼촌들, 저와 함께 성장하는 막내고모님과도 함께 살았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온 가족이 사랑방에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또 다른 기억은, 가족 식사 시간인데 특히 아침, 저녁 시간에는 온 가족이 함께 사랑방에 모여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방에 보이지 않는 두 분이 계셨는데 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입니다. 두 분은, 식사 시간에도 방에 계시지 않고 늘 부엌에 계셨고, 가끔 엄마 찾아서 부엌에 나가보면 부뚜막에 걸터앉아서 어린 눈에 보기에도 무엇인가 쫒기는 듯한 모습으로 급하게 바가지에 담긴 밥을 드시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왜 엄마는 부뚜막에서 밥 드세요?"하고 여쭈면, "응, 엄마는 할 일이 많아서 여기서 밥 먹는 거란다"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받는 맏며느리이셨지만, 이상하게도 사랑방 식탁에는 어머니의 밥그릇과 자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니 부뚜막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종종 본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자란 것은 사랑방 식탁에서 식사하는 방안 풍경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겸상해서 드시고, 또 다른 상에는 어른들과 고모들 저는 장손의 특권을 누리면서 할아버지 상, 아버지 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참 좋은 가정이었지만, 그래도 식사 시간 밥상과 사랑방에 흐르는 분위기는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와 장남이신 저희 아버지를 중심으로 유교적인 질서와 예의범절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보이지 않는 서열의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밥상이었습니다. 한 동안 그것을 오래 잊어버렸는데, 이번 설에 아버지 집에 모인 형제들과 가족들이 함께 먹는 아침밥상을 받으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유심히 식구들의 동태를 살펴보았는데,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우리 집안과 우리 가정의 제일 어른이신 아버지께서 밥상 자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의식적으로 자리 잘 챙기지 않는 편이라서 아무데나 앉아서 밥 먹으려고 했고, 사위들과 동생들, 조카들, 제수 씨, 제 아내, 어머니 모두가 한 상에 각자 밥 먹기 좋은 자리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거운 식사를 했습니다. 저는, 이번 설 명절 우리 집 식탁풍속도를 지켜보면서 서열의식 때문에 자리 신경 쓰지 않고, 아무런 긴장 없이, 가족들이 사랑스럽고 귀해서, 한 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그 자리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혼자말로 {야, 참 좋다. 그래 우리 집 밥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구나.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이지…}하면서 혼자 소리쳤습니다.

우리 집 밥상의 變化의 中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상(狀)"에 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 狀"에 대한 變化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유교적 서열의식과 예의범절의 중심자리를 차지하던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아버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의 아버지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른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아버지가 계시는 겁니다. 새로운 어른이 계시는 것이지요. 아침 먹고, 가정예배 드린 후 아버지 모시고 목욕탕에 갔는데, 저와 동생이 아버지 목욕하시는 것 보살펴 드리고 등도 밀어드렸습니다. 이번 설을 보내면서 아버지 연세가 벌써 칠순이 가까우시지만, 늙어 가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우리 아버지 참 좋다, 너무 귀한 어른이시지} 하는 감사와 더불어 {아버지는 우리 가정의 福의 根源이신 분이야}하는 마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마가복음 10, 29-30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좀 유심히 관찰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버린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세상에서도 되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집도, 형제도, 자매도, 어머니도, 자녀도, 토지도 되찾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버린 것들 중에 되찾을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되찾는다고 말씀하신 것 중에, 빠진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되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첫 번 쓴, 저자 마가는 매우 치밀한 저자입니다. 용어 선택 하나하나부터, 문장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매우 치밀하고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젊은 복음서 저자입니다. 그런 저자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가 되찾게 될 복을 열거하면서, 다른 것들은 버렸다할지라도 다사 찾게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백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를 버린 것에 대해서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말은 다시 받게 될 명목에서 빼버렸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라는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것이 결코 우연이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마가를 통한 매우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복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가정과 교회공동체에는 "아버지들"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복음 중 하나는, "부정적(否定的)인 아버지 상(狀)"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拒否)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拒否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지배구조의 상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지배의식"입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지배의식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宗敎·社會的인 아버지"의 의미는 "지배하는 힘"을 상징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면, 지배자요, 우두머리요, 힘의 상징입니다. 그 아버지 상(狀)을 버리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인 새로운 가정이 이루어지고, 세속적인 사회구조와 다른 새로운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배의식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가정이 세워지고,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인, 공생애 마지막 주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면서, 마지막 유언 같은 예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인 福音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너희는 땅에 있는 누구를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 8-12)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지배의식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고, 명예를 얻고,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고, 지배하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는 그 아버지 상(狀)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시 초대교회 안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지배의식의 상징인 아버지 상에 대하여 비상(非常)하게 날카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자들에게, "아버지"나 "랍비"라는 칭호뿐만 아니라, "지도자"라는 직능적인 호칭마저 부르지 못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 꿇고 질문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선한 선생(랍비)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말을 걸자마자, 예수님을 향해 부른 그 호칭 때문에, 그가 무안할 정도로 예리한 표현으로 그의 호칭의 의미를 바로 잡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 18). 여기서,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는 그 의도 속에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중심을 간파하신 이유 때문입니다(마 19, 16-17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그냥 설렁설렁 대충 대충 사람 눈 속이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고, 언제나 그 中心과 意圖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단 한 순간도 그냥 대충 넘어가시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 랍비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시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부하신 랍비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당시 랍비들에게 통속적으로 적용되고 있던 관례에 대한 부정(否定)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섬김을 받는 섬김의 대상자였습니다. 제자들은 랍비들의 몸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랍비를 예수님이 거부하신 겁니다.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섬기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자",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랍비이셨지만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고, 제자들을 지배하고 제자들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자기 발을 씻기도록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닦아 주시면서 만찬 시중을 드시는 분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있느냐? 섬김을 받는 자로 있느냐? 지배하는 자로 있느냐? 다스리는 자로 있느냐? 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민하셨고, 철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분기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그 어느 누구도 저와 여러분을 다스릴 자가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섬기는 자로 서 있을 뿐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섬김의 대상이어야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의 의미는, 내가 무슨 봉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무슨 봉사를 한다는 것 때문에, 내가 섬기는 자로 공동체 안에 서 있는 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섬김은, 봉사하는 자가 되라는 봉사명령이 아닙니다. 무슨 사역을 하는 자가 되라는 사역명령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의미는, "世俗的인 아버지 狀"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지배의식"을 철저하게 내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남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명령하고, 군림하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바로 그 마음, 그 자세, 그 가치관, 그 傳統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수많은 使役이 있고 奉事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수많은 봉사자들과 사역하는 자들 중에는 형제를 섬기는 자도 있지만, 그 섬김의 기회를 도리어 형제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아버지의 자리"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물론 우리 교회 여러 사역부서가 다 좋은 섬김의 사역이 되기를 기대하지만, 특별히 제 마음에 두고 기대하면서 눈여겨보는 사역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봉사부서들이 조직되기 전에, 교역자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아니라 거의 자생적으로 조직된 "이웃사랑모임"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지금은 "이웃사랑모임"이 앞장서서 교회 주변에 있는 쪽방봉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웃사랑모임은 조직중심의 사역팀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냥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름 그대로 하나의 "모임"일뿐입니다. 지금 약 50여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저는 "이웃사랑모임"이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마음과 정신으로 계속해서 끝까지 사역하는 부서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주변 쪽방봉사를 위해서 "이웃사랑모임"이 만들어 질 때, 30여명이 처음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또 어떻게 일할까? 서로 간단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는데, 제가 그 때 첫모임을 할 때 참석했습니다. 첫 모임에서 논의되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임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가칭 "이웃사랑모임"이라고 부르면서 모였습니다. 그 때, 어느 교우 한 분이 이 일이 잘 되려면, "이웃사랑선교회"라는 비중 있는 이름을 내걸고, 회장도 뽑고 조직을 잘 해야 일이 잘 진행될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의견을 제시한 분에게는 조금 죄송스러웠지만, 그 案에 대해서 다소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웃사랑선교회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지금까지 가칭으로 불렀지만 그저 소박하게 "이웃사랑모임"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느냐고 처음 모임에서 "제 고집"을 좀 부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부르고 싶은 취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을 보면, 무슨 무슨 "선교회"라는 조직은 참 많습니다. 그 모임마다 거기에는 무슨 무슨 선교회 "회장"이 있고, 총무 서기 회계 등의 조직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實狀)을 가만히 보면, 선교를 위한 모임이기보다는 또 하나의 인위적인 조직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는 집단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더러는 몇 몇 사람들의 낯을 세우기 위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 선교회들과 구별되는 뜻에서 그저 소박하게 어려운 이웃을 섬기려는 뜻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 취지 설명을 듣고 모인 분들이 그 뜻을 받아들이셔서 "이웃사랑모임" 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웃사랑모임"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웃사랑모임에는 어느 모임이나 회(會)의 우두머리격인 "會長"이 없습니다. 그저 이웃사랑모임 회원들의 사역을 도와주고 심부름 역할을 하는 "執事총무"밖에 없습니다. 회장도 없이 그저 총무가 일하는 "모임" 정도에 불과한 사역팀이지만, 저는 "이웃사랑모임"에 會長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가 추구해야할 모든 사역의 방향(方向)과 정신(精神)이라고 생각합니다. 금년부터 우리 교회에도 아직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제직회가 조직이 되었고, 각 부서에 부장도 세우고, 또 앞으로 조직될 사역팀들마다 책임자들도 세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무슨 봉사를 하느냐? 무슨 사역을 하느냐? 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또 내가 무슨 봉사를 하고 사역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문제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奉事를 하면서, 使役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남과 구별되는 지위나 신분이나 자리를 찾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앉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형제에 대하여, 공동체에 대하여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많은 교회나 가정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그 사람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 사람의 나라"일 뿐입니다.

우리가 목사로 부름을 받았든, 장로로 부름을 받았든, 집사와 권사로 부름을 받았든, 이웃사랑모임으로 부름을 받았든, 주차봉사위원으로 부름을 받았든, 찬양대원으로 부름을 받았든, 교사로 부름을 받았든, 그 무슨 일에 무슨 직임으로 부름을 받았든, 우리는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는 자일뿐입니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다스리는 자로 군림하는, 자로, 지배하는 자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그 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경영하시는 일터이든, 형제에 대하여 다스리는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고, 섬기는 자로 대할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에서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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