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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세메스를 오르는 소 (삼상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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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무엘상 6장 7-15절 
제    목 : “벧세메스를 오르는 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강력한 원수국은 언제나 블레셋이었습니다.

전쟁을 치르는 이스라엘은 이겨 보고자하는 궁여지책으로 법궤를 전장에 갖고 나갔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하는 신념이 믿음처럼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법궤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자신들의 섬기는 다곤 신당에 법궤를 갖다 놓았더니,

그날 밤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졌던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어 이제는 「아스돗」이라는 마을에 갖다 놓았더니 온역이 돌았습니다.
이제는 설마하면서 「가드」라는 마을로 옮겼더니 그 마을에 독종이 번졌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이구나 하며 집히는 것이 있어서 마지막 「에돔」으로 옮겼더니 역시 무서운 재앙이 임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은 블레셋 방백들은 의논했습니다.
이 심상치 않은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냐?
◉ 아니면 우연한 재앙이냐?

하나님 재앙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습니다.

진위를 가리자는 의도로써 갓 새끼를 뗀 암소 두 마리를 구해서 새 수레를 매달고 그 수레에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를 가도록 했습니다.

법궤 실은 소 수레가 곧장 가면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요,
소가 좌우로 치우치면 우연히 일어난 일로 간주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벧세메스로」향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설정해 놓고 하나님의 재앙이 아니다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고 하나님의 재앙은 사실화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갓 젖 뗀 어미 소가 송아지의 울음을 뒤로 남긴 체 어찌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 땅을, 그 먼 길을,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사실 속에서도 불가능한 이은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1) 잘 못된 믿음.

여기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믿음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위 법궤에 관한 믿음입니다.
이 법궤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 구원의 처소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법궤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잘못된 태도가 나와 법궤를 전장에 메고 나갔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회관에서 잘못된 교회의 믿음이 발생되어 교회를 판단하고 자신의 편의에 꿰맞추는 경우입니다.

자기만의 교회관,
즉 자신이 생각해낸 교회 모습,
교회는 이래야 된다.
혹은 저럴 때는 저래야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마치 원숭이가 열매를 따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기듯이 교회를 옮기는 데,
이는 크나큰 잘못이고, 신앙의 손실을 봅니다.

일전의 어느 분이 오셨습니다.
어느 교회는 어떻고
어느 교회는 어떻더라 하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분은 교회 정하기가 힘들겠다 생각되어 우리 교회도 등록하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못난 부분만 보니 은혜가 있을 리 없고,

뭐 좀 안다, 과거에 뭐 좀 했다는 지식과 경험의 자기 기준이 교회 판단이 되고 있으니
우리 교회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은 그랬습니다.

◉ 어느 목사님께 이웃 교회 성도가 찾아와서 상감을 의뢰했습니다.
「목사님! 교회를 옮기고 싶어요!
좀 신령하고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있기는 한데 그 교회에서 당신을 받아 줄지가 의문입니다.
당신을 받아주면 완전함이 깨지기 때문이지요.」

의미 있는 충고입니다.
지상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바로 나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편의에 따라 법궤를 옮기듯 교회를 옮길 것이 아니라
법궤 있는 그곳에 나아가 법궤를 섬기듯이 교회를 섬겨야 참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
비로소 행복해 졌다고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섬길 수 있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교회를 만났다면 행복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러한 교회는 별난 교회가 아닙니다.
하늘 교회가 아니라
내기 지금 섬기고, 만들어 가는 바로 지금의 몸된 교회입니다.


2) 영광의 소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새끼 둔 두 암소가 한 수레를 끌고 있습니다.
송아지는 울고 있습니다.
어미 소도 울고 있습니다.
그 새 수레에는 법궤가 실려 있습니다.
이 소가 어떻게 보입니까?

◉ 송아지와의 이별 때문에 「불행의 소」여야 합니까?
◉ 처음 멍에를 메고 새 수레를 끌기에 「고난의 소」여야 합니까?
◉ 아님 법궤를 싣고 가기에 「영광의 소」여야 합니까?

세상에는 누렁소, 얼룩소, 흰소, 검은소 물소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법궤를 싣고 가는 소처럼,
영광의 소가 어디 있으며,
세상의 숱한 수레가 있다지만,
법궤를 실은 영광의 수레가 어디 있습니까?

옛날 황희정승과 명콤비를 이룬 맹사성 정승은
소를 타고 상경했다고 합니다.
정승이 오신다기에 길 닦아 놓고 기다리니 소 탄 노인이 지나가기에 야단쳐서 보냈더니 그분이 맹사성 정승이었답니다.

비록 훌륭한 정승을 태운 소가 있을지라도,
법궤를 실은 이 소만큼 영광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직위가 있고 여러 직무가 있습니다.

◉ 국태민안을 위하는 대통령직, 국무위원직,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수직,
고치고 온전케 해주는 의사 변호사직, 대민 봉사를 위한 소방, 군인직…….

더 나아가 세계평화유지와 국제기아 대책을 위한 여러 직위와 직무가 있습니다.
다 요긴하고 훌륭한 직이요 직무입니다만,
그러나 교회를 섬기는 직분만큼은 영광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작년 이맘때 일입니다.
서대문에서 구두 닦는 이명수 안수집사가 계십니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가 보초를 서는 가운데 예수 믿는 연대장님이 눈물로 기도하기를 「교회당이 샙니다」하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휴가 와서 아버지 집사께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구두닦이해서 모은 돈 2000만원을 보냈고, 이 소식을 구두 닦으면서 손님으로 온 소망교회집사님께 말씀하자 소망교회에서 2억원을 보냈습니다.
이일이 소문 되어 5억 7천300만원이 모아졌던 것입니다.

성도로써 주님을 섬기는 직분은 작아도 다 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 얼굴이 밝으면 안내위원,
◉ 붙임성이 있으면 영접위원,
◉ 가르칠 수 있으면 교사,
◉ 좋은 음성과 음악적 재질이 있다면 찬양대원,
◉ 음향기재를 다룰 수 있으면 방송실,
◉ 손맛 좋다면 봉사부 등....

영광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골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안에서 받은 직분은 삼가 이루라고 하라” 했습니다.


3) 충성된 소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소를 볼 수 있습니다.

◉ 송아지를 떼 놓았으니 울음이 납니다.
◉ 험한 길을 가고 보니 눈물이 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골고다의 험한 고개 나고 가게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길은,
교회 섬김의 길은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해야 하는

◉ 울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 길입니다.

법궤를 싣고 가는 이 암소는 어린 송아지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무엇을 포기 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독자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위와 보화를 버렸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양식을
제자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얻기를 원한다면 기존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암소의 눈물은
버릴 때는 아픔의 눈물이지만,
버린 후에는 새로운 것을 얻을 때의
「감격의 눈물」이고 「감사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의 의미를 모른다면
아직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4) 함께 하는 소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두 마리의 소를 상상해 보십시오.
두 마리만 8개의 다리가 맞추어 갑니다.

거룩한 교회 섬김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저들에게 맞추어 주어야 됩니다.
앞서가는 소를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뒤쳐지는 소를 깔볼 이유도 없습니다.
열심을 내는 소에게 찬물을 끼얹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충성은 서로 보조를 맞춥니다.
이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소들의 최후를 보십시오.
마침내 제물이 되었습니다.
설렁탕이 된 것입니다.
세상은 이 소를 향해서 「미련하다고」손가락 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말씀합니다.
「죽기까지 충성한 것이란다.」


결 론)

여러분은 교회의 직분과 주님 주신 사명으로 인해 부담스럽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때 새들은 불평을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뿔도 있고, 다리도 길어 멋도 있고 공격도 하는데,
자기들은 불은커녕 등 위에 어떤 것이 달려 있어서 무거워 도망 갈 수도 없노라고...

그때 하나님은 날개를 펴고 휘이휘이 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새들은 창공을 높이 그리고 빠르게 날게 되었습니다.

우리에 주신 사명과 직분은 날개와 같습니다.
가만있으면 무겁습니다.
펴고 날개 짓해야 가볍습니다.

주의 일이 버겁습니까?
날개 짓을 하십시오.
믿음이 생깁니다.
은혜의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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